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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규 기자]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때문에 10대 시절, 술 많이 마셨다. 책임지셔야 한다.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으면 슬프고, 그래서 소주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기억되고 있더라. 애상적이라 하지만 그래도 기억조차 희미한 지난 날을 되돌아보고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된다면 나름 성공 아닌가?”

 

박인희가 돌아왔다. 1981년 LA로 떠난 뒤 무려 35년 만에 ‘노래를 부르러’ 한국에 온 것이다. 그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누구나 한번쯤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가수다. 함초롬한 이미지에 생머리를 곱게 묶은 그녀는 어느 순간 대중에게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울행 발걸음 딱 끊어 그녀의 근황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LA에서 한인방송 활동을 한다더라’ 정도의 소문에 이어 나중에는 “죽었다 카더라”란 소문까지 떠돌았다. 복고풍에 힘입어 웬만한 옛날 가수들이 TV에 얼굴을 비추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깜깜 무소식이던 그녀가 ‘돌아온 장고’처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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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 등 히트곡이 담긴 앨범.

 

-인기 절정에 왜 돌연 그만두셨나.

“노래가 싫어 그만뒀다. 가수는 꿈이 아니었다. 연극이 꿈이었다. 대학(숙명여대 불문과) 다닐 때 실험극장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일간지에 합격이라고 사진이 나오자 집에서 야단이 났다. 그래서 포기하고 꿍꿍 앓다가 우연히 노래를 했고 반응이 좋아 얼떨결에 가수가 됐다. 그러나 히트곡 위주로 불러야 하는 당시 상황이 불편했고 말재주도, 연예인 기질도 없어 힘들었다. 그래서 곧 그만두고 방송만 했다. 70년대 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 MBC FM ‘박인희와 함께’ 등등이 생각난다.”

 

-그 오랜 세월, LA에서 뭐하고 지내셨나.

“그냥 살았다. 살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인터넷도 없고, 해가 뜨면 산책하고 동네 도서관에 파묻혀 책 읽고 여행하고 지냈다. 나는 캘리포니아가 좋다. 오래 살았지만 늘 꿈꾼다. 특히 몬터레이 해변의 작은 마을 빅서를 좋아한다. 안개 낀 날 벼랑길을 걸을 때가 좋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냥 살았다. 누구는 ‘스님 같다’고 하더라. 『월든』의 소로처럼 살았다. 밥하고 빨래하고, 그렇다고 무위도식한 것은 아니다. 가끔 방송도 하고. 혼자만의 긴 침묵기를 가지면서 글도 쓰고, 덕분에 세 권의 책을 냈다. 수필집 『우리 둘이는』은 풍문여중 동창인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들로 꾸며져 있다.”

 

-거참,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삶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으로 돌아온 이유는 뭔가? 궁금하다.

“가수는 싫었지만 노래는 좋았다. 노래만 기억하고 나는 잊어 달라는 의미로 세상과 담을 쌓았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 누구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내 노래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한국을 떠난 것이다. 반전이 있다. 2004년 어머니와 LA 인근 샌타모니카 바닷가에 갔다. 인근 과수원, 농장에서 기른 채소·과일, 바닷가에서 잡은 생선들을 직거래하는 5일장 같은 곳에 갔다. 눈부신 배꽃이 양동이에 가득 있더라. 미국에서 이화, 배꽃 보기는 아주 어렵다. 그래서 ‘어머, 저 배꽃 좀 봐라’ 하며 지나갔는데 한 사람이 따라오더니 나를 불렀다. 이화여고 1학년 때 가족을 따라 이민 온 분이었다.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 내 노래를 듣고 견뎌냈다고 하며 나를 껴안고 서럽게 엉엉 울더라. 충격이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나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마흔에 암으로 죽었다. 반성 많이 했다. 노래도 노래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아차 한 것이다. 이제 얼마를 더 살겠나. 그래서 그분들을 위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다. 내 노래를 아껴주던 사람도 세상을 떠난다. 나도 떠날 테고. 2000명이 가입해 있는 팬 카페의 존재도 나중에 알았다. 30년 동안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여전히 모임을 열고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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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아 에 무아’ 시절 박인희와 이필원.

 

-잠깐이지만 돌아온 계기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가수 생활 시작은 ‘뚜아 에 무아’라는 요상한 이름의 듀엣이었다. 불문학도라서 프랑스어 이름인가.
“우연히 지었다. 프랑스 문화원 알리앙스 프랑세스가 명동에 있었다.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이필원씨와 부른 ‘약속’과 ‘그리운 사람끼리’가 유명해지자 이름이 필요했다. ‘너와 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밋밋하다고 해서 프랑스어로 지었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 뉴욕·파리를 그리워했던 이국정서와 맞아떨어진 것 같다. 그때는 샹송도 참 많이 들었다.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불문과’ 여대생이 곧잘 등장했던 시절이다.”

 

-소년 시절 난 선생을 흑백 TV에서 보고 자란 세대다. 옛날 내 기억에도 사회자가 말을 시키면 얼굴만 빨개지고, 그래서 오히려 사회자가 무안해했던 기억이 있다. 내숭인가, 천성인가. 노래도 하나같이 서늘하고 정적이고 늦가을 같은 느낌이다.
“천성이다. 일평생 꾸미지 않고 살아왔다. 비누 세수가 전부다. 내성적이고 외골수, 말재주가 전혀 없다. 화려한 게 싫었다. 노래는 불렀지만 연예인은 싫었다. 늦가을 같은 성격, 맞는 말이다. 삶 따로, 노래 따로가 아니다. 정적이고 가을 분위기, 이게 나고 내 이미지다. 어떡하겠나.”

-시인 박인환을 얘기 안 할 수 없겠다. 많은 분들이 박인환·박인희를 오누이로 알고 있다.
“많이 들었다. 시인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당연히 일면식도 없다. 그의 시가 좋았다. 그냥 좋았다. 알려진 대로 ‘세월이 가면’은 시인의 시에 극작가 이진섭 선생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이 선생은 나의 왕팬이었다. 굳이 자랑하자면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태어나 서른에 요절한 시인의 존재를 내 노래가 한국인에게 각인시켰다고 자부한다. 선생의 시 ‘목마와 숙녀’ 역시 우연히 녹음했는데 대중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름까지 비슷해 오누이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강원도 인제 박인환 기념관에 갔더니 노래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가 24시간 들리더라.
“사람들은 ‘세월이 가면’이 던지는 인간의 숙명적인 의미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옛날을 추억한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을 그리워하게 된다. ‘세월이 가면’은 자신을 다시 보게 하는 기제가 되고 그래서 나까지 새삼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 나의 노래로 빛을 발했다는 사실도 감격스럽다. 그러나 ‘얼굴’까지 박 시인의 시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대학 1년 시화전에 출품했던 자작시다.”

-나이가 들었다.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이상하게 젊을 때부터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땐 막연히 나이가 들면 희로애락에서 벗어나고 여유가 있어지지 않을까 싶었고. 지금 이 나이(71세)가 편안하고 좋다. 세월이 지난 후의 더 초췌해진 모습도 전혀 두렵지 않다. 미국 생활은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새치가 넘치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이번 컴백 기자회견도 메이크업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주최 측이 야단을 쳐서 머리만 조금 염색했다. 나이 들어 잡티나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듯이 나무가 나이테가 생기듯이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사람들은 박인희의 노래를 두고 기가 막힌다고 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듣노라면 짙은 그리움에 숨이 턱 막혀 온다고 한다. 센티멘털이나 낭만이라는 단어는 애써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온 젊은 날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늙어간다고 느낄수록 그녀의 노래를 부르고 듣게 된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월은 너무 빨리 갔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그녀도 많이 늙었고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던 소년도 귀밑에 서리가 내렸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 yule21@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