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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위협받지 않는’ 죽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1. 30. 13:52

‘죽음에 위협받지 않는’ 죽음
 
황동규 /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생각이 한없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딱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오래전부터 인간은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왔다. 피라미드나 스톤헨지 같은 고대 거대 건축물 대부분이 인간이 죽음과 만나기 위한 곳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는 죽음이 삶의 일부분임을 문자로 남겼다. 삶 자체가 기본적으로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가팔라졌다.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이후 하이데거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현대 서양철학의 주요 관심이 인간의 죽음에 할당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 현대에, 죽음을 삶의 상수(常數)로 삼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의 말을 대충 종합하면 인간이란 ‘죽음에 위협받지 않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다.

많은 사람은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죽음이 뭐 별거냐 하며 태연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대화를 해 보아도 그들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쪽 생각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느낌으로 알게 된다.

두려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죽음은 온다. 작년 가을 어머님이 세상 뜨시자 나는 늙은 고아가 되었다.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던 친구들도 갔다. 의식을 회복 못 하고 세상을 뜬 친구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으나, 주위 사람들은 괴롭지만 치매 걸린 사람 자신은 천국에 산다는 식의 평온이 아니었을까. 의식을 가진 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개 살려고 발버둥치다 만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인간답고 품위 있게 죽음을 준비할 수는 없을까?

종교적인 수련이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자들의 죽음도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기독교인일 때 나는 가장 죽음을 두려워했다. 죽음이 닥치면 천당행과 지옥행을 가르는 재판정이 설 터인데, 천국에 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그게 아니겠지만, 아마 거의 모든 종교가 신자의 믿음을 돋우기 위해 그런 의구심과 공포를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에 위협받지 않는’ 죽음은 어떤 것인가? 쉽게 말해서 죽음을 길들여 삶의 일부로 만든 죽음이다. 스티브 잡스 같은 풍운아도 죽음을 인간 최대의 발명품이라고 술회하지 않았던가?

오래전부터 연작시 ‘풍장’ 등을 통해 죽음 길들이기를 시도해 왔지만, 죽음을 평상적인 것으로 만들면, 특히 오래 살려는 마음을 버리면 죽음의 공포를 이겨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진하게 가지게 된 것은 작년 가을 어머님이 우리 나이 100세로 세상 뜨시기 조금 전이다. 죽음을 멀리하려는 삶은 삶의 삶다움에서도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쓴 시 두 편을 소개한다.

‘하늘 한편이 기울만큼

갈까마귀 줄지어 날아가는 꿈을 꾸다 깨니

초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안이 너무 조용하고

옆방에서 전화하는 아내의 말소리가

새소리처럼 눈부시게 들린다.

이제 시간 밖으로 나갈 시간,

눈에 띄지 않게 슬그머니 현관에 나가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뽑아들고

손가락으로 신발을 꿰신으려다

허리를 펴고

신발장 고리에서 구두주걱을 벗겨든다.//

문을 열자 열린 층계 창을 통해

확 달려드는 빗소리와 싱그러운 물비린내,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챙기지 않고 가지?

허나 생각을 벌기 위해

빈 엘리베이터를 내려 보내지는 않을 거다.’ (마지막 날 1)

길들이면 죽음도 일상생활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도 죽음의 눈으로 삶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고 오십 년 가까이 같이 산 아내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눈부시게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초여름 빗소리와 물비린내도 새롭게 듣고 맡게 될 것이다.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사방에 녹음 넘칠 때 가고 싶다. (중략)

냄새 자욱한 밤꽃이 가실 무렵

모든 추억의 냄새가 녹음처럼 다 비슷비슷해질 때,

우회도로 난 후

길 한가운데까지 쳐들어온 자갈과 풀에

신경 내주지 않고 걷다

갈림길에서 그만 길을 잃는다.

두 길이 양옆에서 춤추듯 설렌다.

평생 한 길 취하고 다른 한 길 버리는 일 하고 살았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한 번에 둘 다 취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날 2)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면 그 자리를 상상력이 채운다. 친숙해진 죽음 앞에서라면 무슨 상상인들 못 하랴. 프로스트는 시 ‘가보지 못한 길’에서 언덕에서 만난 두 길 가운데 한 길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죽음과 친숙해진 삶에서는, 미지의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양쪽 길을 다 가보듯, 죽음 앞에서도 길을 잃었을 때 한꺼번에 두 길을 가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스트가 생존해 있다면 이 시를 번역해서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