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놀이를 하던 저 젊은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932년 휘문고보 졸업반 이쾌대(당시 19세)는 진명여고 졸업생 유갑봉과 결혼했다. 이쾌대(1913∼65)는 이듬해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 가 신접살림을 차렸다. ‘카드놀이 하는 부부’는 이 시절 그림이다. 졸업하던 1938년 일본의 유명 미술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 입선하며 화가로 데뷔했다. 귀국해 서울 돈암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개소, 작품을 제작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광복 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를 안고 여러 미술단체에서 동분서주했다. 6·25가 나자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의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했다. 9월 서울 수복 후 국군에게 체포돼 부산을 거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수용소에서 부인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던 그는 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을 택했다.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하다”고 국립현대미술관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61년 이여성 숙청 후 북한에서 이쾌대에 대한 기록도 사라졌다. 남한서도 그는 금지된 이름이었다. 월북작가의 가족이어서 고초를 겪었던 부인 유씨는 패물을 팔아 네 아이를 길렀다. 남편의 그림은 신설동 한옥 다락에 숨겨 지켰다. 유씨는 80년 세상을 떴고, 88년 월북화가들이 해금됐다. 이쾌대가 체포되기 한 달 전 태어났던 막내아들 한우씨는 작품을 수리복원해, 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대거 공개했다. 이쾌대는 그렇게 90년대 한국 미술계에 벼락 같이 등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을 연다. 1930∼50년대, 20여 년간 짧지만 치열하게 활동했던 그의 대표작 40여 점과 각종 자료로 꾸린 대규모 전시다. 대표작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뿐 아니라 마지막 역작인 ‘군상’ 시리즈 네 점 전부가 출품된다. 전시작 대부분은 유품이다. 가족들이 간직해 온 드로잉 400여 점과 유화 중에서 다수의 미공개 자료를 추렸다.
전시는 사랑·전통·시대 등 세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연대기적으로 구성했다. 17세 때 그린 수채화 ‘정물’(1929)부터 제국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무희의 휴식’(1937)까지 행복했던 수업기의 작품,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에 골몰한 1944년까지의 작업, 화가로서의 소명의식으로 민족미술을 꿈꿨던 광복 후의 ‘군상’과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손수 그려 묶은 교재 『미술해부학』 등이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광복 70년, 이쾌대 서거 50주기를 맞아 역사와 시대를 응시하고 서구와 전통 화법을 융화하여 독자적 작품 세계를 형성한 이쾌대 예술이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1층은 이쾌대전, 2층은 ‘광복 70년 기념 한국근대미술 소장품전’으로 광복 직후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담은 동시대 미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쾌대는 한국 화단에서 비밀스럽게 기억된 이름이었다. 연초 전시 계획이 알려지면서 문의가 이어졌고, 21일 오후 전시 개막에는 김창열(86)·심죽자(86)·정정희(85) 등 성북회화연구소 시절 제자들도 참석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은 전시를 준비 중인 큐레이터가 자료 확인차 그 시절 사진을 내밀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이쾌대=1913년 경북 칠곡 출생.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광복 후 ‘군상-해방고지’(1948)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충격을 줬다. 홍익대 강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화가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25 발발 후 북한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고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월북, 65년 위천공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다. 87년 자강도에서 숨졌다는 설도 있다.
이쾌대
수용소에서 부인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던 그는 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을 택했다.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예상치 못한 듯하다”고 국립현대미술관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61년 이여성 숙청 후 북한에서 이쾌대에 대한 기록도 사라졌다. 남한서도 그는 금지된 이름이었다. 월북작가의 가족이어서 고초를 겪었던 부인 유씨는 패물을 팔아 네 아이를 길렀다. 남편의 그림은 신설동 한옥 다락에 숨겨 지켰다. 유씨는 80년 세상을 떴고, 88년 월북화가들이 해금됐다. 이쾌대가 체포되기 한 달 전 태어났던 막내아들 한우씨는 작품을 수리복원해, 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대거 공개했다. 이쾌대는 그렇게 90년대 한국 미술계에 벼락 같이 등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을 연다. 1930∼50년대, 20여 년간 짧지만 치열하게 활동했던 그의 대표작 40여 점과 각종 자료로 꾸린 대규모 전시다. 대표작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뿐 아니라 마지막 역작인 ‘군상’ 시리즈 네 점 전부가 출품된다. 전시작 대부분은 유품이다. 가족들이 간직해 온 드로잉 400여 점과 유화 중에서 다수의 미공개 자료를 추렸다.
전시는 사랑·전통·시대 등 세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연대기적으로 구성했다. 17세 때 그린 수채화 ‘정물’(1929)부터 제국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무희의 휴식’(1937)까지 행복했던 수업기의 작품,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에 골몰한 1944년까지의 작업, 화가로서의 소명의식으로 민족미술을 꿈꿨던 광복 후의 ‘군상’과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손수 그려 묶은 교재 『미술해부학』 등이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광복 70년, 이쾌대 서거 50주기를 맞아 역사와 시대를 응시하고 서구와 전통 화법을 융화하여 독자적 작품 세계를 형성한 이쾌대 예술이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1층은 이쾌대전, 2층은 ‘광복 70년 기념 한국근대미술 소장품전’으로 광복 직후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담은 동시대 미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쾌대는 한국 화단에서 비밀스럽게 기억된 이름이었다. 연초 전시 계획이 알려지면서 문의가 이어졌고, 21일 오후 전시 개막에는 김창열(86)·심죽자(86)·정정희(85) 등 성북회화연구소 시절 제자들도 참석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은 전시를 준비 중인 큐레이터가 자료 확인차 그 시절 사진을 내밀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이쾌대=1913년 경북 칠곡 출생.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광복 후 ‘군상-해방고지’(1948)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충격을 줬다. 홍익대 강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화가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25 발발 후 북한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고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월북, 65년 위천공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다. 87년 자강도에서 숨졌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