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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7. 8. 23:11
 

내 아버지 서정주, 어린아이같이 순진했던 분

[중앙일보] 입력 2015.07.08 00:30 / 수정 2015.07.08 01:04

한국 찾은 둘째 아들 서윤씨
후학 뜻 모아 『미당 시 전집』 발간
올해 탄생 100주년 … 산소에 헌정
“아버지 못 따라가” 중학 때 시 접어
미국 시애틀서 내과 전문의로 일해

전북 고창 미당시문학관 안에 있는 대형 서정주 시인 사진 앞의 서윤씨. 시인의 둘째 아들인 서씨는 “아버지는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분이셨다. 그런 마음으로 시를 썼다”고 했다. [고창=프리랜서 오종찬]

한국 현대시의 큰 나무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은 평생 1000편이 넘는 시를 썼다. 스물한 살에 등단해 타계하던 해까지 60여 년에 걸쳐서다. 한국어를 살찌운 그의 시편 가운데 다음 같은 구절도 보인다.

 ‘그러나 1957년 2월 4일/그 아이 윤(潤)이 태어나고부터/우리 집 살림은 서서히 자리가 잡히어/부부 사이의 이해도 더 늘어나고,/내 직장의 인내력도 배가하게 되고,/저축도 한 푼 두 푼 더 모으게 되고 하여/…’

 1988년 출간한 열두 번째 시집 『팔할이 바람』에 실린 ‘차남 윤 출생의 힘을 입어’의 한 대목이다.

 이 시의 주인공인 미당의 둘째 아들 서윤(58)씨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아내 박승희(57)씨, 미당의 두 손자 건(25)·신(23) 군과 함께 지난 2일 전북 고창의 아버지 산소 앞에 섰다. 최근 출간된 『미당 서정주 시 전집』(전 5권, 은행나무)을 아버지 영전에 바치기 위해서다.

 경기고 졸업 후 서울대 물리학과(76학번)에 진학한 서윤씨는 군 복무를 마치고 훌쩍 미국으로 건너갔다. 화학과로 전공을 바꿔 학부를 마친 후 의대대학원을 선택해 평생 내과전문의로 일했다. 지금은 시애틀의 버지니아 매이슨 병원에 적을 두고 있다.

 서씨는 생전 아버지가 즐기던 맥주부터 한 잔 올렸다. 속이 거북하면 찬 맥주는 손님 대접하고 자신은 냉장 보관하지 않은 미지근한 것을 마실지언정 결코 마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 맥주다.

 

무등을 보며’가 새겨진 미당 묘비 앞의 서윤씨 가족.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윤씨와 부인 박승희씨, 작은 아들 신, 큰 아들 건.
 “제자 분들과 아버지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족들이 해야 할 일을 열정을 갖고 하셨어요. 감사 드려요.”

 서씨는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아버지 사후 첫 정본(定本) 시 전집 출간에 이어 지난달 29일 풍성한 출간기념회까지 열어준 이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스스럼없이 아버지 미당을 얘기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분”으로 아버지를 기억했다. “제자들이 찾아오면 속을 다 꺼내줄 것처럼 격의 없이 대했다”고 했다. 덕분에 부인 방옥숙(2000년 작고) 여사는 그 많은 술 손님을 대접하느라 날마다 홍역을 치렀다.

 “제가 1977년 데모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하루 구류를 살았어요. 아버지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는데도 20년가량 어린 아들뻘 지도교수에게 머리를 조아려 선처를 부탁하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에요.”

 서씨는 “나도 시 쓰기에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 백일장에 나가 상도 받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 아버지의 시를 차츰 이해하게 되면서 시 쓰기를 그만뒀다. “아버지 그늘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의 시 가운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내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무등을 보며’, 한국전쟁으로 인한 정한을 담은 ‘풀리는 한강가에서’를 가장 좋아한다. 미당이 육체적·정신적으로 가장 힘들 때 썼는데도 따듯함을 품은 시들이다.

 미당은 평생 시 세계의 변모를 추구했다. 그래서 얻은 풍성함 안에는 친일 논란 등 오점도 있다. 아들은 어떻게 볼까.

 서씨는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한때의 잘못으로 그 이후 아버지의 삶 전체를 정죄하려 한다면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창=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