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간의 눈꽃 백일 간의 눈꽃 가부좌를 틀고 동안거에 들었다 이제 그는 예고 없이 와서 이유 없이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작정이다 느닷없이 다가온 겨울과 함께 몇 편의 단편소설을 소리내어 읽어주었고 촛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얼굴을 마주보는 밤도 있었다 웃음은 작은 물의 입자들이 만.. 촉도 2015 2017.08.09
도선사道詵寺에서 보리수 까지 도선사道詵寺에서 보리수 까지 법당 안에 금빛 가사를 걸친 부처가 말한다 극락은 없다 처음에는 발바닥 아프고 다리 풀리고, 당기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난 후 비로소 머리 속에 가득 차는 어지러운 굴복 백 팔 번 너는 내 앞에 무릎 꿇은 것이냐 너는 너에게 무릎 꿇은 것이냐 도선사.. 촉도 2015 2017.03.06
어슬렁, 거기 어슬렁, 거기 - 거진에서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엔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팔딱거리고 그 옆 딸깍 목젖을 젖히며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는 수평선에 가 닿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건너가고 싶으면 건너고 멈추고 싶으면 그만인 언제나 토요일 오후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 촉도 2015 2016.10.22
강화도, 1월 강화도, 1월 온통 바람 밭이다 말의 씨앗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발자국들이 이랑 위로 돋아 오르려고 사위를 둘러싼 칼과 채찍 즐겁게 맞아들이는 동안 점점 더 커져가는 내 귀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그 말을 번역하려고 허공에 하염없이 그물을 던졌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촉도 2015 2016.01.17
금서 禁書를 쓰다 금서 禁書를 쓰다 그날 밤 나를 덮친 것은 파도였다 용궁 민박 빗장이 열리고 언덕만큼 부풀어 오른 수평선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빨래줄에 걸린 집게처럼 수평선에 걸려 있던 알 전구가 몸의 뒷길을 비추었다 상처가 소금 꽃처럼 피어 있는 뒷길은 필요 없어 거칠지만 단호하게 .. 촉도 2015 2015.11.30
칠월 칠월 - 고운사 풍경소리 청포도 같은 싱그러움으로 익어가야 할, 물들어가야 할 입 안에 붉은 앵두 몇 알 터질 듯 오물거리는 그 말 사분음표로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비 소리 같은 그 말 마악 알에서 깨어난 휘파람새가 처음 배운 그 말 하늘을 푸른 출렁거림으로 물들이는 그 말 촉도 2015 2015.11.26
아름다운 집. 1 아름다운 집. 1 내일이 하안거 해제일인데 그들은 아직도 묵언수행 중이다 햇볕은 다람쥐 등 무늬에 얹혀 팔랑거리고 쪽물 든 바람이 몸을 비틀자 산길의 꼬리가 살랑거리는데 문 열릴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 위로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태워버려야 할 말들이 아직도 남아 .. 촉도 2015 2015.11.19
밤바다 밤바다 - 신두리에서 이놈아, 받아 적거라! 어딘들 바다가 아니고 누군들 바다가 아니겠느냐 길을 버린 생의 행간으로 달려드는 일만 마리의 말발굽 소리 다시 읽으려 하니 일 만 송이 꽃 지는 소리 저 부풀어 오른 보자기 나비 매듭을 깨물어 보는 밤 모래, 해당화, 바람, 발자국...... 한 .. 촉도 2015 2015.11.12
지나가네 지나가네 서녘하늘에 걸린 노을을 읽는다 붉어졌으나 뜨거워지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닿을 수 없는 손길로 걸어 놓아도 그 깃발을 신기루로 이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 노을이 꺼지기에는 몇 번의 들숨이 남아있어 긴 밤을 건너갈 불씨로 빙하기로 접어든 혈맥을 덥힐 뜨거운 피로 은은.. 촉도 2015 2015.11.06
어느 유목민의 시계 어느 유목민의 시계 하늘이 어둠의 이불을 걷어내면 아침이고 멍에가 없는 소와 야크가 마른 기침을 토해내면 겨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식솔만큼의 밥그릇과 천막 한 채를 거둬들이면 그 때가 저녁이다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목민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멀리 떠나 본 적이 없다 소.. 촉도 2015 2015.11.01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 부석사 가는 길에 서 있다 저, 외톨이 나무 이름 부르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하였으나 가닿지 못할 곳을 꿈꾸는 자에게만 흐름을 허락하는 길의 어깨 너머로 온 몸을 휘덮는 초겨울 어둠을 손사래 치니 비로소 주어만 남은 생이 남았다 어두워서 춥고 추워서 .. 촉도 2015 2015.10.27
거울을 깨다 거울을 깨다 - 재인才人폭포 멀리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젊음의 눈은 망원렌즈를 필요로 하는지 묵이 쉰 격문은 희디 흰 뼈를 뱉어내며 나풀거렸다 슬픈 전설을 남길 것 같은 저 멀리 서 있는 나를 두고 돌아서 온지 몇 십 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의 아내를 탐하는 못된 원님과 줄 타다 죽은 .. 촉도 2015 2015.10.19
구석기 舊石器의 사내 구석기 舊石器의 사내 하루 동안 이 만년을 다녀왔다 선사 先史로 넘어가는 차령 車嶺에서 잠시 주춤거렸지만 돌로 도끼를 만드는 둔탁한 깨짐의 소리가 오수를 깨우는 강변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한 사내를 만났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강을 따라 목책으로 둘러싸인 움집 속 몇 겁.. 촉도 2015 2015.08.06
제 1부 거울을 깨다 ─ 재인才人폭포 멀리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젊음의 눈은 망원렌즈를 필요로 하는지 목이 쉰 격문은 희디흰 뼈를 뱉어 내며 나풀거렸다 슬픈 전설을 남길 것 같은 저 멀리 서 있는 나를 두고 돌아서 온 지 몇십 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의 아내를 탐하는 못된 원님과 줄 타다 죽.. 촉도 2015 2015.08.03
자서 ■자서 아직도 자폐自閉와 유폐幽閉사이에 걸린 세월을 꿈꾸듯 걷고 있다. 외롭지 않으려고 뒤로 걸었다는 사람의 그 발자국을 시로 읽으며 종심從心을 향해 가고 있다. 2015년 5월 무이재無籬齋에서 나호열 촉도 2015 2015.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