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촉도 2015 77

바람의 전언

바람의 전언 저기, 별똥별 그리우면 지상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밤을 기다려 하루 이틀 마다 않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은 맑고 그윽한 일 오지 않는 전언 대신 겨울이 왔고 바람이 불었다 푸른 이끼가 돋은 약간의 우울에는 쌉싸름한 냉소가 섞여 주저하며 닫지 않은 문 안으로 그림자를 들여놓았다 얼굴 보이지 않으니 가슴이 따가워지고 목소리 들리지 않으니 귀가 커지는 바람의 그림자 홑이불 야윈 몸에 두르니 기척이 들릴 듯도 하였다 별똥별은 화약을 품고 있었다고 바람이 전해 주었다 이런, 이미 당신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봄이면 지천으로 당신을 받아들여 온몸으로 터져 버린 꽃들을 누군가는 보게 될 것이다

촉도 2015 2020.07.21

믿느냐

믿느냐 하냥 높은 산에 올라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외쳤던 그 말 벗에게 귀 간질이며 했던 그 말 그녀에게 일생을 던지며 울먹였던 그 말 도끼로 내려치듯 하늘이 쩌엉쩡 깨지는 어느 날의 우레처럼 그 말을 오늘 듣는다 문밖에 그 기척 걸레가 된 신발이 끌고 온 길은 세월이 삭제된 테이프처럼 바람이 가득 차 있다 믿느냐 진즉 나에게 물었어야 할 그 말 벙어리 폭설로 그 죄를 묻고 있다

촉도 2015 2020.07.06

어디로 가고 있나

어디로 가고 있나 안산행 지하철 지금 막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후 2시에서 3시를 향하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한 사나이 마지막 칸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다 어두운 물방울들이 합쳐지지 않은 채 굉음을 내며 지난 신문을 읽거나 졸고 있다 마지막 칸까지 갔던 사나이가 빈 동전 바구니를 흔들면서 오후 2시와 3시 사이를 혜화역과 동대문 역 사이를 머리롸 꼬리 사이를 지팡이로 내리치면서 지나간다 동굴은 철갑으로 둘러싸인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내는 날카로운 비명 때문에 더욱 어두워진다 내려야 할 곳을 잊지 않으려면 눈이 좋거나 귀가 밝아야 하는데 굉음이며 비명인 물방울들은 눈이 멀었다 빨리 이 생을 지나치고 싶은 어떤 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치고 싶은 어떤 날

촉도 2015 2020.06.28

어제 저녁

어제 저녁 은은한 양탄자 노을은 발자국 소리를 순하게 만들어 산자락을 휘감아 돌아오던 종소리를 기억하고 방금 갓 구운 빵이 적당히 식어 가며 뿜어내는 밀밭의 가슴을 더듬게 한다 수런거리는 날숨의 고단함을 오랫동안 기다리다 떠난 사람의 체온이 여적 남은 나무 의자 그 곁에서 지나간 신문을 읽듯 잊어버리고 싶으나 결코 잊히지 아니하는 슬픔 따위를 너무 멀리는 말고 손 내밀면 닿을락 말락 한 그맘때쯤 좋겠네 귓가에 헤살거리는 들릴 듯 말 듯 노여움을 용서하기에 딱 알맞게 경계를 지우는 어둑한 숨결 모두 다 어제 저녁 일이다

촉도 2015 2020.06.22

가슴이 운다

가슴이 운다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예정되어 있으나 슬그머니 뒤로 밀쳐 놓은 정답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한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달려드는 파도가 있다 못질 소리 똑딱거리는 시계의 분침 소리 바위가 모래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 이 나이에 사랑은 무슨 이 나이에 이별은 무슨 가슴이 울 때에는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은 혀를 닮은 낙엽이 길을 지우고 난 후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은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슬픔인 까닭 짐짓 잊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을 엿보았던 커다란 오해를 받아들인 까닭 가슴이 운다 높은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바람 앞에 속절없이 속을 내놓듯이

촉도 2015 2020.06.19

성자와 청소부

성자와 청소부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어두운 생각 무거워 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말씀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로 같은 가슴에 모으기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든다 누군가 물었다 성자가 된 청소부는 누구이며 청소부로 살다 성자 된 이는 또 누구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리라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돋아 오르는 새싹을 그 숨결을

촉도 2015 2020.06.15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가장이란 떠돌이 말과 뒷면에 끈끈이풀을 감춘 아름다움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청중들 한 사람은 향기가 고운 백합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붉음에 취해 장미라고 했고 끝자리 한 분은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다 ─ 백합과 장미와 사람 사이에서 그때그때 다르다는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정답은 이러하였다 ─ 향기가 붉은 그때그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길!

촉도 2015 2020.06.08

당신이라는 국도

당신이라는 국도 처서나 이순 그때쯤의 서늘한 설렘을 아는가 그윽한 파문이 채 닿기도 전에 머쓱하게 손을 거두 어들이는 차오를 듯 말 듯 이울어지는 낮달을 닮은 얼굴을 기억하는가 담쟁이넝쿨처럼 뻗어 나가는 푸르른 길 구름으로 엮은 하늘을 오르는 밧줄 같은 길을 지나 이세상에서가장멀리있는우체통으로가는마음은 밑이 빠진 편지함에 내려놓는 손에 들려 있으니 나는 한 줄의 긴 편지를 쓴다 순례자와 여행자의 동상이몽이 당신이라는 국도 어디쯤에서 피었다 진다

촉도 2015 2020.06.01

불타는 시詩

불타는 시詩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 동천 눈물주머니를 꿰뚫었는지 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 시인들은 역으로 나가 시를 읊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 길고 길었다 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 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 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 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 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 매운 눈물이 된다 아, 불타는 시

촉도 2015 2020.05.28

외설의 법칙

외설의 법칙 세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 있을까 안개 가득한 목욕탕에서 문득 다가서는 벽과 같은 등들 어린 아들에게 등을 내밀며 부끄러운 때를 벗겨 내는 사내를 보며 바로 저것이 얼굴도 아니고 가슴이 아니고 저 밋밋하기 이를 데 없이 제 손이 닿을 수 없는 등짝이 수줍은 아름다움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세월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햇볕 좋은 날 복사꽃 피는 어느 봄날 느닷없이 늙은 아내에게 등을 어 달라고 등의 때를 긁어 달라고 푸른 하늘 아래 거침없이 네 발로 덮칠 수 있기를 불끈 용을 쓰며 땀을 빼고 있지 않은가

촉도 2015 2020.05.25

따귀를 맞다

따귀를 맞다 아침에 일어나니 뺨이 얼얼하다 세차게 얻어맞았는지 푸른 멍이 보일 듯하다 대체로 더럽고 치사한 놈들은 어둠의 자식이어서 남의 피나 빨아 먹고서는 휑하니 달아난다 추적의 길도 보이지 않는 몽유의 하루 웬 사내가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다 허공에 헛손질하며 어둠에 가로세로 삿대질을 해 대 는데 손바닥은 여지없이 왼쪽 오른쪽 뺨을 가르고 또 가른다 모기 탓이라고 둘러대면서 왠지 내가 더럽고 치사하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꿈이 사라진다

촉도 2015 2020.05.22

알몸의 반가사유

알몸의 반가사유 숨죽여 울기 위하여 옷을 벗는데 알몸이 되고 보니 더 서럽다 옷에 묻은 얼룩이 언제 소리 없이 속으로 배어 물들 었나 무엇이 때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만 있다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쭈그려 앉아 있다 발뒤꿈치는 갈라져 있고 발바닥에는 티눈이 박였다 어디서 부딪쳤는지 정강이에는 멍이 들어 있고 찍히고 베인 상처들이 알몸에 단풍 들었다 누가 알몸을 눈부시다고 했는가 이 알몸으로 눈멀게 하고 흉기처럼 세월에 덤벼들 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알몸에게 슬며시 문신을 새겨 넣는다 알 듯 모를 듯 웃음 한 획을 그려 넣자 흉측한 동물이 사람으로 훤하게 개과천선 중이다

촉도 2015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