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 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