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촉도 2015 77

지렁이

지렁이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 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

촉도 2015 2020.10.03

향나무*처럼

향나무*처럼 칠백오십 년 살았다 이리 뒤틀리고 저리 꼬여 버린 세월 따라 용의 승천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도끼로 찍으면 흘러나오는 피 봄 햇살보다 부드러운 향기는 비바람과 한숨과 오열이 발효된 까닭 그 첫 술잔에 도원경을 눈망울에 가득 담으려면 아직 몇백 년 더 살아야 할 것 같다 정적 한 폭에 바람을 빌려 힘껏 한 획을 긋는 일처럼 *창덕궁에는 수령樹齡이 7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향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촉도 2015 2020.09.29

분수에게 묻다

분수에게 묻다 끓어오르는 분노도, 솟구치는 환희도 한 순간 포말로 부서져 내리는 것을! 미사여구도, 독설도 누군가의 가슴팍에, 정수리에 가닿지 못하고 휘발되어 버리는 것을! 무럭무럭 아이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적시고, 지어미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오갈 데 없는 노인네의 동공 속으로 들어가는 포말의, 순간의, 추억의 주름진 그림자……

촉도 2015 2020.09.24

불후의 명곡

불후의 명곡 세월 이기는 사람 보지 못했다 어느 사람은 늙어 갔고 어느 사람은 낡아 갔다 늙지도 않고 낡지 않을 수 없으나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저 잘 익어 갈 수는 있을 듯 문득 한 소절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늙음과 낡음이 몸을 섞어 물컹 뒷맛으로 남는 일 독이 오른 가슴에서 쏴아쏴아 술 익는 소리 석류 기어코 터지고 말 때 들려오는 시월의 시린 저 발자국 소리

촉도 2015 2020.08.24

어떤 말씀

어떤 말씀 뼈 없는 동물이 되라 하신 이 겨울잠인지 동안거인지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신 이 그 닫힌 문을 향하여 신이 사라지고 발이 닳고 닳도록 무작정 걸어왔으나 쓸데없이 길어진 팔 붉은 혀의 꽃밭 같은 손은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 봄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네 차라리 삭풍에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미치지 않으면 저럴 수 없다 눈사람 말씀 대신 서 있네

촉도 2015 202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