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촉도 2015 77

스물두 살 ─ 전태일

스물두 살 ─ 전태일 너도 걸었고 나도 걸었다 함께 스물두 살을 지나가면서 너는 맨발이었고 나는 평발이었을 뿐 티눈이 박이는 세월을 막지 못하다 어쩌랴 너는 스물두 살에 멈추어 섰고 나는 쉰하고도 여덟 해를 더 걸었으나 내가 얻은 것은 평발이 된 맨발이다 나는 아직도 스물두 살을 맴돌고 있고 너는 아직도 더 먼 거리를 걷고 있을 터 느닷없이 타오르던 한 송이 불꽃 하늘로 걸어 올라가 겨울밤을 비추는 별이 된 너와 그 별을 추운 눈으로 바라보는 중늙은이 걸어 걸어 스물두 살을 지나가면서 너는 맨발이었고 나는 평발이었을 뿐 같은 길을 걸었으나 한 번도 뜨겁게 마주치지는 못 하였다

촉도 2015 2020.05.13

가끔씩

가끔씩 가끔씩 나는 옷섶에 손을 넣어 본다 심장이 뛰고 있는지 마치 우편함 속으로 손을 어 넣을 때 약간의 금속성 차가움 다음에 찾아오는 홍조처럼 팔딱거리는 먼 발자국 소리 봄이 언제 단번에 달려오던가 보여 줄 듯 말 듯 앵돌아 몇 번 뒷걸음 친 후에 그만큼 애꿎게 한 사내를 불 지르지 않던가 가끔씩 나는 심장 속에 손을 넣어 본다 새싹이 돋았는지 무슨 꽃이라도 몇 송이 묶어 볼 요량으로 더듬어 보다가 불량한 짓거리 들킬 때처럼 화들짝 꼬집어 보는 봄날의 꿈 이미 가고 없는지 다시 오기는 하는지

촉도 2015 2020.05.09

떠도는 섬

떠도는 섬 섬들이 부딪치지 않으려고 파도로 외로움을 만드는 시간 눈에 불심지를 매단 차들이 조심조심 좌우로 앞뒤로 순례의 길을 간다 섬 속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섬 무언의 깜빡이를 켜고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는 신을 닮은 우리는 스스로 고독한 채 말문을 닫는다 길 위에 떠도는 다도해 긴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해도 물속에 다리를 묻은 두루미처럼 몹시도 가려운 그리움의 바닥을 쳐다보며 커엉컹 개 짖는 소리 들린다 급히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어둠의 벼랑 아래로 아득히 추락하는 떠도는 섬

촉도 2015 2020.05.05

낡아 가고…… 익어 가고

낡아 가고…… 익어 가고 사그락거리는 내 몸이 배운 단어들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별이다 모래시계 속에서 낙하하는 별들을 또 한마디로 더 줄이면 바람이다 바람 속에 숨어 있는 둥지 안에는 아직 내가 배우지 못한 단어가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낡아 가고 그 알은 익어 가고 단어장에 마지막으로 배운 그 말 푸른 잉크에 묻혀 나올 때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 먹물 같은 그림자를 남긴다 사랑이라는 말

촉도 2015 2020.04.30

있으나 마나

있으나 마나 월화수목금금금 휴일에도 생계를 이으려 험한 세상으로 나가는 아내 에게 아무 말 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이 말은 마음 저 천 리 밖에 있고 뭉툭한 돌멩이 하나 정수리에 닿는다 에구구 있으나 마나 한 인간아! 늦은 밤 고개 들어 도시의 손톱달을 본다 너도 있으나 마나 그러나 흐린 날이든 맑은 날이든 달은 떠오르고 끊임없이 이울고 벅차오른다 시궁창에도 빛살무늬를 남기고 풀벌레 울음에 넌지시 손을 내민다 내 그림자만 봐도 마음 든든하다고 늙어 가는 아내가 저만큼 달려오듯이

촉도 2015 2020.04.27

변검變瞼의 하루

변검變瞼의 하루 구둣발에 밟히지 않으려고 지지 땅속으로 기어 다니다 무엇에 홀린 듯 무슨 새싹이라도 되는 듯 지상으로 올라와 용트림하다가 번뜩 눈을 뜨니 원래 나는 눈이 없었다 수컷 공작처럼 온갖 문양의 날개를 펼쳐 보이겠다고 스스로 다리 난간을 넘어갔으나 앗차! 몸이 무거워 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 당겨 주기를 바라는 허튼 수작 으로 내가 진심을 다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이런 화두를 던졌던가 쌓이면 오라 길을 덮었던 수많은 세월의 낙엽 소리 없이 내렸던 폭설이 그 위를 다시 밟고 난 후의 더듬더듬 발걸음을 내딛을 때 나는 사그락 소리 그 두렵고 안타까웠던 그 소리 터지는 순간 와르르 눈물 대신 쏟아지던 모래의 얼굴

촉도 2015 2020.04.25

촉도蜀道

촉도蜀道 경비원 한 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 주던 낙짓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 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 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 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 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 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촉도 2015 2020.04.17

경계

경계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안과 밖 의 경계가 신기루처럼 멀리 휘날렸다 헛디딘 말들이 곳곳에 붉은 신호등을 걸었다 앞을 못 보는 농부가 밤에도 논으로 나갔다는 이야 기가 있다 몸이 졸리면 밤이지 캄캄하기는 마찬가지 인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걷고 달리고 밀어올리고 당기고 구부리고 펴고 운동 기구 앞에서 하는 일들이 몸에서 연둣빛 새잎이 돋아 오르는 듯하다고 하자 바로 그것이 한밤중 논에서 벼 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안경은 그까짓 흐리고 어두운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흐리고 어둡게 각인하는 일 그 눈먼 농부처럼 눈을 버 리고 귀를 얻어 볼까 손전등 없이도 밭두렁 논두렁이 두런거리는 소리 살아 있는 것들의 숨소리 그 거친 숨 소리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 볼..

촉도 2015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