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存 共存 / 나호열 무섭다, 남의 목 속에 들어가 남의 피와 살이 된다는 것이‥‥‥ 땡변 내리쬐는 여름 한낮 무료하게 휘두르는 채질에 건너편 우사牛舍에서 날아온 파리들이 툭툭 허공을 움켜쥐며 떨어진다. 완강했던 노인의 팔뚝에 自害처럼 그어진 불거진 푸른 핏줄 기쁘게 게으른 닭들..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6.09
빈 화병 / 나호열 빈 화병 / 나호열 자유를 향하려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산소를 호흡하려 수면을 박차는 물고기들의 입 속은 투명하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 누가 이렇게 힘든 자세를 견뎌낼 수 있겠는가 먹지도 말하지도 않는 입 속으로 칼칼한 먼지가 내려 쌓이고 한 번도 주인공이 되..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6.07
조영필 조영필 / 나호열 나 슬픈 노래를 부르리 겨울 스산한 날 찻집의 이별 창밖의 여자를 어두운 조명에 풀어놓으면 어느새 나는 스타가 되어 몽롱한 밤하늘에 하늘거린다네 나는 조영필 그대는 왜 나에게 박수를 치는지 몰라 모방의 삶, 어쩌면 그렇게도 흡사한지 놀랄 따름이야 완벽해질수..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6.06
동부간선도로 동부간선도로 / 나호열 끼어들고 빠지며 일차선에서 이차선으로 추월하고 뒤처지며 앞으로 앞으로 급커브 안개낀 길을 조심조심 무심한 들꽃 피었다 지고 거품 문 검은 강물이 수상하다 낚시 드리우며 수심하는 사람들 한 발짝 안전선 밖에서 바라보니 왜 저리도 악다구니 쓰며 앞으로 ..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6.04
누대 累代 / 나호열 累代 / 나호열 나는 자꾸 인생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건들거리는 큰 놈과 천방지축 나돌아다니는 막내 놈에게 '살아지는'과 '사라지는' 그 사이를 말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당신도 모르는 인생을 애들이 어떻게 알겠냐고 빈정대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도 주목하..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6.02
너, 나 맞아? 너, 나 맞아? / 나호열 시인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저 개울가 깊이 박힌 바위를 들어올려 마음 속에 모래로 담아두었다가 다시 그 모래 속으로 마음을 집어넣는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31
壁 / 나호열 壁 / 나호열 방법은 세 가지다 가고 없는 사람 앞에 서성이듯 스스로 그 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그 사람 잊어버리듯 벽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벽을 뚫고 벽을 넘어서거나 그러나 오늘도 나는 내 앞에 버티고 선 우람한 벽을 밀어보려고 한다 사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30
오전 7시 30분 오전 7시 30분 / 나호열 아침마다 절벽을 향해 갔지 간밤의 불온했던 생각들 쓰레기봉지 하나 가득 재활용 수거함에 편지를 부치듯 넣곤 했지 지름길은 없을까 체증으로 뒤범벅된 붉은 신호등 앞에서 가끔은 차선을 넘고 싶었지 저 금지의 신호들 부질없는 이정표의 손가락질 사이로 때이..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28
황사, 그 깊은 우울 / 나호열 황사, 그 깊은 우울 / 나호열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24
큰 바보 큰 바보 / 나호열 슬픈 일에도 헤죽거리며 웃고 기쁜 일에는 턱없이 무심한 사람 그 곁을 애써 피해 가지만 걸어가야 할 먼 길 바보가 되어가는 길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23
낡은 집 / 나호열 낡은 집 / 나호열 낡을대로 낡아서 한순간 몰락의 기침소리 기다리는 무허가의 집 나도 그렇게 지상의 한 칸 한 때 등짝을 덥혀주던 온돌 틈새 사이로 윤기 없는 사랑의 식언처럼 솟아오르는 잡풀들 아름다운 은폐를 보여주던 늘 바깥에서 열리는 문짝들 젊은 날의 죄수는 간 곳이 없다 ..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21
멍든 빵 멍든 빵 / 나호열 푸르게 굳은 빵, 멍든 추억을 씹는다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어 이빨 자국 선연하게 물어뜯고 싶은 추억 이미 굳어버린 벌써 딱딱해져버린 사랑은 맛이 없다 밀밭 길을 밤새 미쳐 뛰어다닌 파랗게 물든 바람과 당분이 빠져 쭈글해진 세월 흔들리는 이빨 사이로 헝클어진 실..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20
어머니 해탈하시다 어머니 해탈하시다 / 나호열 어머니 해탈하셨다. 이제 머리 염색하지 않을란다. 어딘가에서 거울 깨지는 소리 들리고 흰 나비가 날아오른다. 삶의 느즈막에 창공을 박차보는 비상, 몸속의 깊은 감옥에 사는 수많은 타인들이 어머니를 벗어난다. 평생을먹여 살린 내 살과 같은 타인을 우리..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19
사랑은 사랑은 / 나호열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17
河東 松林 河東 松林 / 나호열 그 때에도 섬진강은 낮은 목소리로 바다를 향해 걸음을 늦추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소나무들을 허허벌판에 심으며 몇 백년이 흘러야 울울한 숲이 되겠는지 그저 푸른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을 사람들 머물지 못하는 목숨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이.. 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201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