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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냐 돈키호테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12. 14:28

[김진영의 자작나무 숲]

햄릿이냐 돈키호테냐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4.11.11. 23:58
 
 
 
일러스트=이철원

 

우디 앨런의 30년 전 영화 ‘부부일기’(Husbands and Wives)가 떠오른다. 남편과 헤어진 여자가 새 애인을 만나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던 중 머릿속으로 두 남자를 여우와 고슴도치에 비교하는 장면이다. 여자는 이어서 주변 친구들마저 두 유형으로 분류하기 시작하고, 그 바람에 사랑은 시들해진다. 무릇 모든 피조물이(그들의 사랑 방식마저도)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뉜다는 우디 앨런식 유머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힐로쿠스의 다음 명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

이 명제의 본질은 상반된 두 기질을 비교하는 것이지 어느 한 편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지 않다. 여우의 시야는 넓고, 고슴도치는 깊다. 여우는 유연하게 다양한 원리를 섭렵하고, 고슴도치는 완고하게 단일 원리를 고집한다. 여우는 밖으로 펼쳐진 온 세상이 자기 것인데, 고슴도치는 온 세계가 자기 안에 응축되었다. 러시아계 영국 학자 이사이야 베를린은 톨스토이·셰익스피어·괴테·푸시킨 등을 여우형으로, 단테·니체·헤겔·도스토옙스키 등을 고슴도치형으로 분류했다. 지남철의 자성이 플러스-마이너스 양극으로 나뉘듯, 인간 기질도 상대적인 양극단 중 어느 한쪽에 좀 더 기울기 마련이다. 완벽한 중도는 없는 것 같다.

여우냐 고슴도치냐 외에도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햄릿이냐 돈키호테냐 같은 기질 양분설이 있다. 이런 물음은 사유의 틀일 뿐, 요즘 유행하는 MBTI 유의 성격 테스트가 아니다. 특정인을 대입해보며 지적 유희를 즐길 수야 있겠지만, 대립 명제의 궁극적 기능은 서로 당기고 밀어내는 대등한 두 현상을 나침반 삼아 생각의 길을 열 수 있게끔 돕는 일이다.

20세기 초 혼란기의 러시아는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논쟁을 통해 미래의 향방을 모색하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톨스토이의 이교주의와 도스토옙스키의 정교주의, 톨스토이의 민중론적 아나키즘과 도스토옙스키의 일원론적 이상주의 사이에서 혁명 러시아의 선택은 전자였다. “인간 영혼은 톨스토이 쪽으로 기우는 타입과 도스토옙스키 쪽으로 기우는 타입의 두 유형이 있다”(베르댜예프)는 진단은 사회와 시대 흐름에도 엇비슷하게 적용된다.

‘햄릿이냐 돈키호테냐’ 논쟁 역시 사회적 상황이 반영된 질문이다. 투르게네프가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에세이를 쓴 1860년은 러시아의 농노 해방을 한 해 앞둔 시점이자, 관념의 자유에서 행동의 자유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다. 르네상스 후기의 두 걸작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으며,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정확히 같은 날(1616.4.23.) 사망했다는 배경도 공교롭다.

 

햄릿과 돈키호테는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억울하게 죽은 선왕의 복수를 결심하지만, 선뜻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다. 시골 말단 귀족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에서 자극받은 상상력으로 말도 안 되는 모험을 전전하다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행동은 생각을 앞서 있다. 햄릿은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고 돈키호테는 엉뚱한 나머지 무모하다고 쉽게들 판정하는데,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그들 성격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무엇보다 고결하다. 행동 방식은 서로 다를지언정, 자신이 설정한 도덕 기준과 신념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둘 다 자기소외적이지만, 세상으로부터의 소외가 그들에겐 더 없는 명예다. 위선에 찬 세상이 바로 그들의 적이기 때문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를 품은 그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돈키호테의 묘비 문구(“그가 죽었음에도 죽음은 삶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대로, 죽음이 삶 앞에서 무력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햄릿은 사색하고, 돈키호테는 실행한다. 투르게네프는 모든 사람이 두 유형 중 하나에 속한다면서, 그러나 햄릿 형이 더 많다고 덧붙였다. 시대를 말해주는 흥미로운 진술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두 유형을 얘기하다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밝혀보자 했더니, 의외로 거의 반반의 결과가 나왔다. 이 또한 뭔가 오늘 우리 시대에 대해 시사하는 것 아닌가 싶다.

투르게네프는 잉여인간의 시대를 살았다. 이상은 드높았으나 행동이 따르지 않던 시대다. 그래서인지 투르게네프의 글을 읽다 보면, 평생 돈키호테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해 좌절하는 햄릿의 고백을 엿듣는 느낌이다. 햄릿은 필경 돈키호테이고 싶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햄릿은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 “생각은, 곰곰 새길 경우, 일부만 현명하다./ 그리고 언제나 4분지 3은 겁쟁이다. (중략) 맞아,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한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 거다, 명예가 걸려 있다면.”(4막 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