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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작은 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15. 17:56

[나무편지]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작은 꽃

  ★ 1,214번째 《나무편지》 ★

  뜬금없이 따뜻한 봄볕 받고 피어나는 제비꽃이 떠올랐습니다. 봄볕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사진첩에서 제비꽃 사진을 뒤적여 끄집어냈습니다. 더없이 화려한 빛깔로 피어난 꽃인데, 그들이 마침 자리잡은 곳들은 그야말로 ‘아무데나’ 였습니다. 누가 일부러 심어 키우지 않아도 알아서 저절로 아무데나 찾아가 뿌리 내리고 주어진 생명의 한 살이를 말없이 살아가는 풀꽃입니다. 가만히 돌틈에서 피어난 제비꽃 바라다보며 겨울 날의 이른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드디스크를 좀더 뒤적여 보니, 시인 안도현의 ‘제비꽃에 대하여’라는 시(詩)도 눈에 띕니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로 시작하고는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라고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제비꽃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발견할 수 있을 거야//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제비꽃이 들으면 섭섭해 할지 모르지만, 공부할 게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굳이 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허리를 낮출 줄’ 알아야 볼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기야 제비꽃 못지않게 작은,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작은 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비꽃은 그 빛깔도 화려하고, 또 낮은 몸으로 피어나는 봄꽃 가운데에는 크기도 작지 않은 편입니다. 제비꽃보다 작고, 더 담담한 빛깔로 피어나는 꽃들은 더 많습니다. 그들 모두가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그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제비꽃은 오래도록 우리 땅에서 친하게 지낸 풀꽃이어서, 여러 이름을 가졌습니다. 오랑캐꽃 장수꽃 씨름꽃 병아리꽃 앉은뱅이꽃 가락지꽃 등이 모두 제비꽃을 가리키는 이름들입니다. 종류도 많습니다. 흰색 꽃의 남산제비꽃을 비롯해, 작은 꽃을 피우는 콩제비꽃, 향기가 좋은 태백제비꽃, 고깔모양의 잎을 가진 고깔제비꽃, 노란 꽃의 노랑제비꽃, ‘팬지’로 더 많이 알려진 한 송이에 세 가지 색을 가진 삼색제비꽃 등이 모두 제비꽃 종류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종류만도 60종류가 되고, 세계적으로는 450종류나 된다고 합니다.

  다시 봄 오면 들에서도 숲에서도 혹은 도시의 보도블럭 사이에서도 제비꽃은 피어날 겁니다. 허리만 낮추면 어디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제비꽃, 다시 올 새 봄에는 제비꽃 앞에 쪼그리고 오래 머무르겠습니다. 큰 나무 그늘에 하냥 머무르는 것처럼요. 꽃잎 위에 가늘게 뻗어난 잎맥도 짚어보고, 멋스럽게 휘감긴 잎 가장자리도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어요. 그 안에 든 꽃술도 헤아릴 겁니다.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시인의 노래를 오래 기억하면서, 새 봄 기다립니다. 오늘은 천리포 바닷가 나무들의 겨울 안부를 묻고 돌아오겠습니다. 다녀와 소식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월 15일 아침에 1,214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