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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조용히 꿈틀거리지만,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겨울 숲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2. 16:22

[나무편지] 조용히 꿈틀거리지만,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겨울 숲

  ★ 1,215번째 《나무편지》 ★

  바닷가 겨울 숲에 다녀왔습니다. 천리포수목원입니다. 겨울 숲은 언제라도 평안합니다. 월든의 헨리 데이빗 소로가 겨울 숲을 좋아한 건 무성했던 잎 내려놓고, 솔직하게 드러낸 나무의 속내를 그대로 오래 바라볼 수 있는 때문이었지만, 천리포수목원의 겨울 숲이 좋은 건 무엇보다 한적하다는 겁니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26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던 때여서, 언제라도 한적했습니다만, 요즘은 그때만큼 한가로운 날은 전혀 없습니다. 고작해야 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이 계절이 그나마 한적하다 할 수 있습니다.

  빈곤퇴치를 비롯해 집 없는 이들을 위한 노숙인 지원단체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님은 《영혼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1월과 2월, 정원은 조용히 자라고 있지만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수녀님은 숲의 조용한 움직임이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겨울 숲의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들의 가만한 움직임의 결과를 하나 둘 눈치챌 수 있습니다. 빨갛게 익어 배고픈 날짐승을 기다리는 겨울 열매들이 그렇고, 새 봄을 기다리며 조금씩 키워나간 꽃봉오리들이 그렇습니다.

  케네디 수녀님의 겨울은 “고요한 영혼의 정원과 만나는 시간”이며, “내면의 힘과 아름다움의 씨앗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새 소리만 왁자한 겨울 숲은 사색의 숲입니다. 숲의 깊은 내면에 담긴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숲을 푸르게 하기 위한 씨앗에 담긴 나무의 혼을 발견하는 계절이 바로 지금 이 계절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적한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살아온 지난 날들을 하나 둘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다가올 내일 일을 짚어보는 명상의 시간이 됩니다. 아무리 바람 매워도 겨울 숲은 좋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겨울 숲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지난 여름부터 길섶에서 노란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가을 바람 불어오자 꽃잎 내려놓은 털머위입니다. 꽃 피었던 자리에는 솜털을 가득 단 열매가 맺혔습니다. 나무가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겨울 털머위에는 또 하나의 꽃이 피어났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겨울 햇살 머금고 다소곳이 피어있는 털머위의 보솜한 열매는 길손의 발길을 잡아당겨 머무르게 합니다.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노라니,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사진으로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운 나무 풍경으로는 작은연못의 낙우송이 있습니다. 물을 좋아하는 성질의 이 낙우송은 처음부터 연못 가운데에 자리잡았습니다. 물 속에서 자랄 수 있다는 특징을 시험하기 위해 오십 여 년 전에 일부러 연못 한가운데에 심어 키운 나무인데요. 봄이나 여름에 연못 속의 이 나무를 바라볼 때에는 더없이 싱그럽다는 느낌이었지만, 이 겨울에는 차갑다는 느낌이 앞섭니다. 물론 긴 세월을 그 자리에서 이곳의 기후를 버텨온 나무이기에 나무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바라보는 느낌이 그럴 뿐입니다.

  바람 찬 겨울이지만, 나무들은 벌써부터 봄길맞이에 나섰습니다. 목련 꽃봉오리는 겨울 햇살 머금고 도톰하게 부풀었습니다. 당장에라도 벌어질 듯한 목련 꽃봉오리에는 봄의 향기가 담겼습니다. 가만히 목련 꽃봉오리 그늘 아래에 멈춰 섭니다. 가지마다 피워올린 목련 꽃봉오리가 무척 풍성합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하고한 꽃봉오리들이 모두 화창하게 꽃 피우는 봄 그리는 마음 따스해집니다.

  천리포수목원 겨울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 꼭 보여드려야 할 나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길어진 오늘의 《나무편지》는 여기에서 줄이고 다음 《나무편지》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아침부터 영하 10도 안팎으로 기온이 급하게 떨어졌습니다. 널뛰듯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무엇보다 건강 잘 챙기셔서, 험한 계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월 22일 아침에 1,215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