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나무에는 몇 개의 나뭇잎이 달려 있을까?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시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정민
시인 김정희
『가방을 메고 아침을 건너간다』는 김정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2015년 첫 시집『너는 봄꽃이다』펴낸 이후 2년에 한 권씩 꾸준히 시집을 상재하였으니 시인에게 시마詩魔가 깃들어있음이 틀림이 없다. 시마란 무엇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시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강렬한 충동, 표현의 열망을 뜻하는 것이다.
이 시마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옛 시론 중의 하나인 ‘시궁이후공 詩窮而後工’이다. 이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어떤 결핍의 감정이 시를 짓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마와 시궁이후공의 맥락으로 김정희 시인의 시 세계를 탐색한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 될지 궁금한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김정희 시인의 모든 시집을 감상하고 그 감상을 해설과 발문으로 남긴 사람으로서 김정희 시인의 시작詩作이 지니고 있는 풍경의 실체를 이렇게 요약한바 있다.
김정희 시인이 꿈꾸는 시는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상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며, 언어의 조탁彫琢을 통한 미학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다가온 변화의 일상 속에서 함몰되기 쉬운 서정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속뜻이 김정희 시인에게 있어서는 타고난 순수한 품성이 각박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훼손되지 않게 하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김정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비켜선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에 얹은 이와 같은 분석이 이번 시집에도 일관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만드는 원동력은 분명히 ‘무엇에 대한 결핍(궁窮)’ 또는 시인의 삶을 압박하는 ‘무엇에 대한 저항’이며 결핍과 저항의 의식을 시작詩作을 통하여 정화淨化하려는 의지임은 분명하며 그런 일관성이 시인 김정희만이 획득한 소중한 시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인은 장편掌篇과 같이 한 편에 담긴 하나의 이야기를 스냅snap으로 처리하고 화자話者의 시선을 객관화함으로서 현대사회의 곤고함을 상쇄한다.
도시의 그늘을 읽다
김정희 시인은 고향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다. 한적한 농촌 마을이 ‘우리 마을에도 바래길 있었더랬지 / 경동시장에 내다 팔 산나물 들깻잎 / 머리에 인 어머니 / 첫 차 타러 비탈길 걸어가던 길’( 시집『비껴 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중 「바래길」 부분)이 시인의 고향이다. 바래길은 어떤 길인가? 바닷가 여인네들이 물때에 맞춰 해조류와 조개와 같은 어패류를 채취하여 돌아오는 힘든 길이라고 한다. 그런 바래길에 비견할만한 비탈길을 오가던 어머니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재개발로 비어가는 뒷골목 터전 / 떠나기 싫어 똑딱똑딱 / 두툼한 굳은살 새겨진 손바닥 뒤로 하’(「벽시계」)게 만드는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좀 더 도시화의 그늘을 이야기하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뚝딱뚝딱 기계 소리 망치 소리
새벽부터 동네를 깨우고 있다
아이 웃음소리 사라진 곳에
신축 바람이 타오르고 있다
삼층 올리는데 10억이 넘었다며
자부심과 걱정이 교차하는
눈빛이 바삐 움직인다
앞뒤 그린벨트 풀린 곳에
이집 저집 새집 바람이 분다
조용하던 동네 강아지
세상 만났다 밤까지 짖어댄다
주말 새벽에도 시끄럽게 구는 굴착기
갑자기 불어 닥친 이 바람 지나가면
평온이 다시 찾아오고
아이 울음소리에 아침이 깨어나며
신난 놀이터 그네도 멀리멀리 날아가리니
- 「부는 바람 멈추어 서면」전문
이 시는 작금의 세태를 묘사하고 있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 재건축의 열풍 속에는 주거환경의 개선이라는 목적보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적 이득이 감춰져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원주민은 어쩔 수 없이 떠나고 그 자리에는 낯 선 이주민들이 둥지를 튼다. 삶의 추억도 없이 찾아온 이주민들은 익명匿名의 유목민이 되어 높이 솟구친 허망을 오르내린다. 그런 까닭에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누려야 할 축복이 미래의 고통으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이 시는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땅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풍경을 그린 또 한 편의 시를 보자.
전선처럼 늘어진 세월이 하루처럼 돌고 있다
철공소와 거미줄로 연결된 둥지 즐비하다
기계 굴러가는 터전에서
나지막한 지붕을 타고 오르는 쇳소리
손끝에 물들인 기름때로
어린 자식의 꿈을 그려갔다
낚지 못한 보랏빛 시간이 금 간 골목길에 서 있다
문어발 뻗는 재개발에
비어가는 둥지 지키는 나이든 청년이
고락의 잡초밭에서 두 손 모아 고개 숙이는 저녁
무심한 달빛이 환하게 떠오르고 있다
-「 하얀 둥지」전문
이 시는 어느 도심都心의 재개발 지역의 풍경으로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일률적인 도시화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주의 논리, 그에 부합하는 달콤한 삶의 편이성에 함몰되는 슬픔을 잘 보여주고 있다. 풍족하지는 않으나 근면을 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시 도시의 소시민이 되어 변두리로 쫓겨 가야 하는 모순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도시는 무엇일까? 빠르고,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 도시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락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장거리 마라톤 하는 / 너와 내가 ’(「가방을 메고 아침이 건너가고 있다」 1연) 되어 짐짝 같은 지하철에 ‘포탄처럼 날아가는 / 멈출 수 없는 삶‘(「길 위에서」)을 싣고 누구보다도 빨리 움직여야 하는 노동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에 온갖 노동력을 쏟아내고 늘 부족한 삶의 무게를 견딘다. 유쾌한 호칭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소시민이라 일컫는 사람들은 도시라는 그물 속에서 자생自生의 꿈을 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북적이는 마을 한적한 집 / 동생과 단둘이 세 들어 살’(「잉여인간」)다가 쓸쓸하게 애도도 없이 죽어가는 잉여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공사판에서 일을 마치고 / 축 늘어져 / 밤새 관속에 누워있던 시체’(「산다는 것은」)로 사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나 ‘넉 달 동안 / 떠돌다 / 어렵게 구한 신혼집 ’( 「49.95제곱미터 」 ) 15평짜리가 매매가보다 더 높은 전세로 매겨져 비싼 대출을 통해 살 집을 구해야 하는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숨겨놓은 배금拜金의 족쇄를 풀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문자 알림이 울린다
올 연봉도 안 오른다는
탄식 섞인 숨소리 묻어 있다
일 년 동안 뛰었는데 또 적자란다
저 멀리 달아난 보람은 어디에
문자 속 이모티콘이 울먹인다
까맣게 내려온 어둠 속에서
중고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한쪽 눈을 감고 온 차는
손에 들린 약통을 바라보고 있다
아픈 눈에 약을 넣은 헤드라이트
거기는 괜찮아
까만 밤에 신호를 보내며
몇 시간 후 만날
꿈틀대는 아침을 지켜보고 있다
- 「아침을 기다리며」전문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낙원이 있을 것이라는 꿈만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은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괴로우면서 유일한 출구가 된다.
쓸모가 필요해!
도시에는 사통팔달의 도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 길에는 가로수들이 열 지어 있다. 삭막한 도시의 풍광을 그럴싸하게 채워주는데 나무만큼 유용한 식물은 없다. 그러나 봄만 되면 왕성하게 팔을 뻗은 나무들에게 톱을 들이대는 몹쓸 일들이 벌어진다. 교통표지판, 신호등을 가린다는 이유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싹둑싹둑 가지를 잘라내는 풍경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친다.
가로수 가지 잘려나가고 생긴
움푹 파인 옹이에
먹다 만 일회용 커피잔 툭 튀어나와 있다
담배꽁초 비닐 휴지가 숨구멍 막고 있다
버둥거리다 간신히 몰아쉬는 숨이 뜨겁다
- 「나는 재떨이가 아닙니다」1, 2연
나뭇가지가 잘려나간 이유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쓸모가 없는 것은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옹이구멍에 코 푼 휴지를 집어넣고 담배꽁초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 앞에서 언급한 잉여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가면을 쓴다. 모두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쓸모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경구警句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인연
없다
내게 먼저 손 내밀고
수줍게 가슴 여는 너
밥 한 톨에도 의미를 주는
쓸모
있다
- 「쓸모」전문
쓸모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물들 모두가 나름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섣부른 가치판단- 유용성이나 편리성, 장식성 등- 으로 내쳐져야 할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쓸모의 용도를 나름의 기준으로 삼는다. 밥벌이를 위한 임용시험이나 면접에서도 자신들의 조직에 조금 더 쓸모가 있는 사람을 뽑는다. 촘촘한 간격을 지닌 숲은 간벌을 통해 나무들을 벌채한다. 그런데 이 짧은 시에는 놓쳐서는 안될 시인이 감춰놓은 진의가 숨겨져 있다.
‘쓸모’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사람과 사물에게 가치의 유용성을 이입시키기 때문에 ‘쓸모’라는 관념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희망을 권유하는 것이다. 실현이 불가능한 생각일지라도 ‘쓸모’를 잊어버리는 일이 적대적 감정을 무력화시키는 무위無爲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쁘면 기쁘다 슬프면 슬프다 / 화나면 화난다 섭섭하면 섭섭하다 / 담아두지 말고 먼지 털어내듯 / 툭툭’(「툭툭 털고 기대어 서는」)털어내는 일이 쓸모의 이유를 사라지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주장에 힘입어 온유한 시인의 시풍詩風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가 탄생한다. 시인은 문득,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질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가짜를 벗고 진짜를 찾아 /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 오로지 가슴 울림에 집중하고 싶다’(「페르소나」)고백한다.
페르소나persona란 무엇인가? 첫 번째로 연극에서 배역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가면의 의미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로 칼 융C. Jung의 심리학에서는 사회 속에서의 ‘나’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존재이므로, 각 개인에게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있어 상황에 따라 적절히 자신의 페르소나를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희 시인은 그런 페르소나를 거부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머리에 가발을 올리고
진주알을 달았다
속눈썹을 붙이고
립스틱을 바른
거울 속 사람이 궁금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다
날아들지만 들리지 않는 목소리
박수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정해준 예복을 입고
부모의 가면을 쓴 날이다
어울리게 썼는지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 「페르소나2」전문
슬하의 자녀가 혼례를 하는 날의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시를 통해서 평소 검소하고 꾸밈없는 시인의 일상과 대비되는 모습을 어색함으로 느끼는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평소와 다른 화장한 모습을 가면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어색함과 부딪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시인은 정말 모를 일이라고 뭉뚱거리지만, 쓸모를 염려하는 삶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심정을 드러낸 시로 받아들여진다.
가면을 벗은 얼굴은 ‘미움이 먹구름을 만들어 ... 마음에 못난 주름을 만드’는 실체, ‘문밖에서 종일 놀리던 혀의 수고’(「얼굴이 만들어지는 시간」참조)로 계속 변하는 형상으로서 시「페르소나2」의 허상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시인은 쓸모에 집착하는 나로부터, 수많은 가면을 써야하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꿈꾸다
김정희 시인은 이렇게 가면을 던져버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보름달 뒤에서 / 먹구름 뒤에서 // 묵묵히 걸어가는’ (「나는 별이 아니어도」)별이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호박꽃으로 태어나 / 잘 익은 호박덩이 남기고 떠나가’(「 그대 돌아보지 말아요」)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런 언술이 허언이 아닌 까닭은 김정희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검이불루儉而不陋 시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고, 그 시 정신이 그의 삶을 관통하는 신앙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의 시에는 장황한 수식이 없고 허위의 깨달음이 없다. 작은 것,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것과의 묵언의 대화에서 시인은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십분 남짓 걷는 길에서
매일 만나는 얼굴
계절마다 수수한 무대 꾸미는
풀꽃
눈인사 손 인사 나누고
뒤돌아보면
저 멀리서 닿을 듯 보이는 저녁놀
그대로 지켜보며
맨날
내 곁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 「행복 」부분
삶의 고통이나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고난을 어느 사람은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고, 어느 사람은 투쟁으로 이겨내려고 한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대처는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긍정의 에너지로 그 고난을 승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12월 31일 금빛고래」는 저무는 태양을 고래로 비유하면서 마지막 한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오늘을 만나러 / 황금빛 비늘을 / 벗어 던지고 있을 뿐’이라고 환호한다. 시인이 지니고 있는 긍정의 에너지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으로서 하강의 이미지를 상승의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무의식적 익숙함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로 시「폭포」를 들 수 있다. 폭포는 하강의 이미지가 강하다 ‘ 수만 년 하늘을 지키던 / 수천의 백마가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그 하강(추락)이 ‘비로소 하늘을 나는 자유를 / 오롯이 찾아가고 있다’라는 빛나는 상승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 폭포의 물줄기가 하늘로 다시 올라 별이 되는 광경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건
꿈꾸는 네가 있기 때문이지
무리 지어 있어도
혼자 있어도
저 멀리에서 푸르게 빛나며
가까이 가도 아름다운
네가 있어서지
어둠 밝히며 구슬땀 흘리는 청춘이
외롭게 떠다니는 도시의 섬
푸른 신호 보내는 네가 있어서
까만 밤도 별일 없이 흘러가지
- 「별에게」 전문
폭포는 원래 하늘을 나는 백마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마는 추락이 아니라 다시 하늘로 오르는 힘을 지니고 있고, 밤이면 별로 현현하여 길 잃은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자유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무한천공을 질주하는 소리 없는 백마의 말밥굽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는 몇 개의 나뭇잎이 달려 있을까?
이 글은 시집『가방을 메고 아침을 건너간다』가 이전 시집들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또한 이전 시집과는 다른 어떤 변별성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무조건 시를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뚜렷한 자신만이 가진 세계관을 삶에 투영하고, 자신만의 어법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이 한 그루의 나무로 우뚝 서게 하는 노력이 열매 맺을 때 그 때 비로소 시인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김정희 시인의 시작 詩作은 나날이 변화하는 세태속에서 자신의 염결성을 지키려는 분투로부터 시작始作되는 것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으면서 화해로 나아가는 서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정희 시인에게 있어서 서정은 자연 탐미에 기울어지지 않고 모든 생명의 애환을 귀담아들으려는 그 자체에 있다.
나무는 오직 하늘을 향해 기도의 자세로 솟아오르는데 전력을 다한다. 마음은 땅 밑에 숨겨둔 채 직립의 자세를 올곧게 하기 위해 수많은 나뭇잎을 매단다. 시인을 그런 나무에 비유한다면 시인이 생산해내는 시들은 나뭇잎과 같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뭇잎(시)이 부동의 나무를 올곧게 하는데 필요한 것일까?
오늘날의 시론은 ‘사람다움’을 향해 걸어가는 시를 가볍게 여긴다. 요설과 현란함으로 ‘사람다움’의 서정을 멀리 내쫓아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같은 모양을 지닌 나뭇잎들은 오직 자신의 주체인 나무의 성장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오래된 나무는 무성해져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안식을 기원하는 탑이 된다. 김정희 시인의 시편이 더 높고 우람한 나무가 되는데 필요한 나뭇잎, 아니 깃발로 펄럭이는 풍경을 글의 마지막에 내려놓으며 짧은 필력 탓에 주옥같은 서정시를 다루지 못해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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