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이비단모래 시집 『꽃잠』: 슬픔의 밥으로 피워낸 꽃, 詩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7. 16:03

 

 

슬픔의 밥으로 피워낸 꽃,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면서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그러니까 2020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시집비단모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시집을 통독하고 난 후 사랑이라는 신전을 향한 기도의 시로 그 시집의 얼개를 조감했고, 그 끝에 시인 이비단모래를 일러 망망한 사랑이라는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로 내 멋대로 명명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시집꽃잠을 읽는 내내 시집비단모래의 여러 풍경이 남긴 잔영이 겹쳐지면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과연 또 다른 세계란 무엇일까?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독창성과 일관성이라는, 서로 길항拮抗하는 요소를 얼마만큼 융합시키느냐에 따라 그 성취가 가늠되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그 누구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창조력을 지향하는 한 극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력을 받쳐주는 뼈대- 일관된 세계관이나 자아의식- 가 서로 상충하지 않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비단모래 시인의 첫 시집아이야, 우리 별 따러 가자부터꽃잠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형성해온 세계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 될 것이고, 그 양상에 따라 그만이 찾아낸 이 세계의 비의를 따라가는 것이 온당한 일이 될 것이다.

 

조심스러운 의견이지만 이비단모래가 염원하는 세계는 참으로 따뜻하고 순리順理대로 살아가는 생명체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러나 그 염원만큼 세상은 밝지도, 아름답지 않으며 예기치 않은 슬픔이 수시로 찾아오는 난국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이 꿈꾸는 세계를 강박하는 힘들이 거세어질수록 오히려 꿈꾸는 세계가 현현하는 것에 대한 열망은 이비단모래 시인의 생애에 그대사랑이라는 세 개의 화두를 붙잡게 하는 일관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본다. 시집꽃잠은 이 화두에 천착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시법詩法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꽃이라는 화두

 

엄밀히 말하면 꽃은 식물의 생식기이다. 꽃 한 몸에 암술과 수술이 있는가하면 암술과 수술이 따로 있어 바람이나, 벌이나 나비와 같은 곤충의 힘을 빌려 번식을 하거나 동백처럼 동박새와 같은 조류鳥類에 의탁하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에게 꽃은 여성성’,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완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기쁜 일과 슬픈 일에 바치는 정감의 징표- 화환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비단모래 시인은 이번 시집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시집에서 꽃을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로 활용하면서 시의 밀도를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 자신이, 시인이 차용한 화자話者가 마주하는 대상으로, 더 나아가서 꽃 스스로가 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범인凡人들의 삶을 꾸짖는 성인의 포즈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갈래의 꽃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꽃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에 주목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한 송이 한 송이

시로 핀다

 

복수초 생강꽃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벚꽃 제비꽃 매발톱

 

자고 나면 시를 열고

자고 나면 시가 피는

 

마침표 없는 시를 피우는

위대한 시인

 

-「봄」 전문

 

이 시는 봄에 피는 여러 꽃들이 줄지어 피어나는 모습을 통해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있음을 토로한다. 서로서로 다투지 않고 봄뿐만 아니라 계절 따라 피는 모든 꽃들을 위대한 시인이라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슬그머니 이비단모래 시인이 정의하는 시의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꽃이 그러하듯이 시는 오직 생명의 잉태를 꿈꾸는 상징, 그 생명잉태 그 이상의 욕구를 지니지 않은 순수의 결정체라고 인식할 때 시인의 시작詩作은 염결을 향한 구도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하기에 시는 ‘바람에 얹고 싶은 문장’(「장미 오월」)이 되어 ‘찬바람 스치지 않고 / 피는 꽃이 없’(「상처에도 꽃이 핀다」)는 것이며, ‘세상 곳곳에서 / 꽃은 / 젖으며 신음하며/ 피어나’(「목련의 아침」)는 인내의 외침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이 마주치는 모든 현상이나 대상은 꽃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는 절망도 꽃이고 그 절망을 이기기 위해 안간 힘 쓰는 희망도 꽃이다. 다섯 편의 「호박처럼」연작시를 읽고 이제는 그러하니 꽃을 영탄의 울타리에 가두지 말자!

흔히 일상에서 호박은 ‘못 생김’, ‘ 바로 서지 못하는 의지 없음’, ‘끈질김’, 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호박꽃’은 또 어떠한가. 시인은 이런 눈길 가지 않는 호박의 생태에 관심을 두면서 ‘달팽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꽃에 이르고’(「호박처럼 1」), ‘슬픔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아 / 심장 아래 가둬놓고/ 아닌 척 하고 싶’(「호박처럼 2」)은 자신의 모습으로 되비추면서 ‘노랑’ 이 환기하는 희망을, 끝내 이렇게 자신을 상승의 존재로 띄어올린다.

 

침묵이 지나간 계절

그 자리를 채우며

점점 떠오르는 보름달

 

사랑이야

 

- 호박처럼3 전문

 

그대라는 희망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꽃’은 이비단모래 시인에게 있어서 지난한 삶을 좀 더 고양시키는 촉매제로 가늠된다. 우리 모두의 삶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의 총량이 크다.

 

불안한 풍선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어딘가 닿기만 하고

찔리기만 하면

터져 가득한 눈물 강 흐르는

 

산 넘으면 터널

터널 넘으면 산

이마 부딪히고 안개 천길 나락 쏟아지는

 

뒤돌아보니 내 나이 수백 번 곱한 만큼

터널 지나며 알았다

터널에도 비상구 있다는 것을

무지개도 뜬다는 것을

  - 「견뎌보니」 전문

 

 

시인은 견뎌보았다고 말한다. 어차피 삶은 견딤의 진행형인데 시인은 과거완료형으로 단언한다. 이 시집의 몇 편은 시인이 겪었던 고통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과거의 어떤 상황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생의 인사권자」,「어떤 헛」,「진단명,로봇수술등등의 시는 가족의 병환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고통과 불안을 직설적 어법으로 풀어낸 시들이다. 그 아픈 사람은 폭포처럼 한결 같고, 가끔 허공에 무지개 띄어 놓을 줄도 알고, 모든 하루를 생살처럼 솟아나는 사람이다(폭포 같은 사람참조). 그러한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의 외로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노을이 되겠다는 노래는 소리죽인 울음보다 얼마나 깊은 곡조인가!

 

하루가 아팠고

하루가 힘들었어도

그대 있기에

 

내게 단 하나의 이름

단 한 편의 사랑

단 한 줄 시가 되는

그대 있기에

하루를 접고

그대에게 가서

 

가서

고요히 깃 내리고

그대 가슴 내 둥지에

노을처럼 닿으리

 

노을처럼 닿아

남은 그 한 마디

노래 부르리

- 「노을처럼 그대에게 가리」전문

 

그러나 ‘그대’는 단지 한 사람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집에서는 보다 확장된 존재로 구현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시집 『특히, 그대』(2022)를 읽어 주시기 바란다. – 시편 곳곳에 등장하는 ‘그대’는 ‘이제 꽃으로 허물어질 그대와 나 / 아슬아슬한 경계 흐드러지고 / 천지사방 그대 웃음으로 / 그득’(「봄 주파수,」)할 시간이기도 하고, ‘그대여 / 한번 돌아다보라 / 거기 / 꽃처럼 내가 서 있’(「꽃처럼」)어야 할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기도 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망 속에 /비로소 보이는/ 마음속 사람’ (「까망」)처럼 이미 세상을 떠나 별이 된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름을 버리고, 세상 살면서 자의반타의반으로 붙여진 명칭을 버리고 오직, ‘그대’라고 부를 때, 아니 ‘특히, 그대’라고 부를 때 옛 시인이 노래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보다 더 강열하게 전인적 존재로서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불현듯 다가오는 것이다.

 

죄라면

그대 하나만

목마르게 바라보다 죽은 것

 

죄라면

그대 하나만 생각하다

죽어

이 염천에

꽃으로

핀 것

 

  - 상사화」전문

 

 사랑, 그거

 

 대전 버스 정류장에「사랑, 그거」시가 걸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집 『비단모래』에 실린 시인데 다시 한 번 읽어 보기로 한다.

 

참 부질없기도 하지만

 

캄캄한 길도 걷게 하고

시큰거리는

무릎도 일으켜 세우는 명약

 

마음 그득히

해 뜨고

해 지고

바람 부는 일

그대에게 향하는 길 되는

 

참 부질없기도 하지만

없으면 안되는

그대와 내 심장사랑 그거

 

- 「사랑, 그거」 전문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은 못 믿어 하는데 / 기계는 지문을 대니 / 나라는 것을 알아보’(「무인 민원 발급기 앞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끊어진 채 불신이 팽배한 세태와 저 남쪽 먼 나라 사탕수수밭 물소처럼 맹목적 부귀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부당한 노동에 매몰되게 만드는 – 「사탕수수밭 물소」 참조- 아수라 속에 허우적거리며, 마스크로 입을 가린 침묵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고 있다.

 

시에 나타난 대로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 관점에서 공허하게 나누는 부질없는 헛소리일지라도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고, 평등하지 않고 권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온갖 이름 대신 ‘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사랑합니다!’ 이 말은 가식적인 응대의 차원을 넘어서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여는 참다운 인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시집『꽃잠』은 개인사個人史를 바탕으로 하면서 함께 사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서로에게 꽃이 되자고, 서로의 그대가 되자고 그리하여 사랑이 슬픔의 밥이 피워내는 꽃이 되어야 한다고 가만히 행복해야만 하는 우리 곁에 다가온다.

 

네가 내 심장 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므로

내가 네 심장 속에서 지워졌다 해도

 

네가 심어준 나무 한 그루

내 기억 속에서 무성무성 자라고 있으므로

네 기억 속 내가 한때 스친 바람이라 해도

 

내가 오로지

너만 바라보며 별을 세고 있으므로

그 별 떨어져 다른 풀섶에 앉더라도

 

내가 영원이라 생각하는

계절은 다시 올 테고

네가 한때라고 생각하는

계절은 떠날 것이므로

 

명징하게 빛나는

꽃이 되는 이름 있으므로

 

- 행복」전문

 

나가면서

 

시집『꽃잠』우리에게 익숙한 서정시의 아름다움을 전해 주면서 이전의 시집과는 다른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로 그 어느 시집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하면서 시중유화 詩中有畵의 여운을 ‘꽃’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미지로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작금의 우리 현대시가 지향하고 있는 난해함을 벗어나면서, 산문화하고 있는 시가 아닌, 운율을 살린 짧은 시로 낭송하기 쉽고, 생활에서 음미하기 적당한 시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한 시인의 시업을 평가함에 있어 독창성과 일관성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시집『꽃잠』이 우리 시단의 새로운 시류詩類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 될 것이라는 기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쉬지 않고 시를 쓰고 있는 이비단모래시인께 격려와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