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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로마, 바다로 눈 돌리면서 세계사 주역이 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17. 11:17

‘우물 안 개구리’ 로마, 바다로 눈 돌리면서 세계사 주역이 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3]
해양제국 로마의 시작

입력 2023.01.17 03:00 | 수정 2023.01.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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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에서 병사들을 이끈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카르타고군에 승리를 거두고 인질들을 나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16세기 활동한 바티칸의 궁정화가 줄리오 로마노에 이어 18세기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세치가 완성했다. 해상 패권을 놓고 맞선 로마와 카르타고는 전략적 요충지 시칠리아 등을 놓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23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완승을 거둔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고대 로마의 역사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했다. 기원전 6세기경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지방에는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고만고만한 작은 부족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로마는 테베레 강과 바다에 가까우면서 이탈리아 반도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누리는 데다가 7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에 유리했다. 점차 이웃 부족들을 누르고 힘을 키워가기는 했으나, 이 시점에서 보면 장차 유럽 대륙 중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포함하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기원전 510년경,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에트루리아의 지배자를 누르고 공화정을 설립했다. 이후 200년이 넘는 장기간의 정복 과정 끝에 결국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이다.

 

로마가 종내 거대 제국으로 약진하는 결정적 계기는 바다로 팽창해 나간 데 있다. 바다를 지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로마는 단지 이탈리아 반도 내부 세력으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바다로 나간 로마’는 세계사의 주역으로 비약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바다로 나가 경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때가 무르익어 로마 역시 해상 팽창에 나섰을 때 당장 충돌한 상대는 서지중해 지역의 최강자 카르타고였다. 양측은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쟁(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23년간 지속된 1차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 이전 시기에도 로마가 바다와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고, 상당한 정도의 해상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에 로마 공화정은 바다에 ‘판자 하나 띄우지 못한다’는 악평을 받았다. 로마에는 아주 작은 배들만 있고 해안을 떠나 먼바다로는 전혀 항해를 하지 못한다는 식의 주장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해양고고학의 연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해저에서 건져낸 침몰선들을 연구해 보니 로마 공화정은 500~600t급 선박들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코르부스를 장착한 로마군 갤리선을 묘사한 자크 그라세 생 소베르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다만 해상 교역과 해군은 별개의 문제다. 다른 고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는 교역이 먼저 발달했으나 해군은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주변 해상 강국들의 눈치를 보고 동맹국들의 선박에 의존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로마가 처음 전함을 건조한 것은 기원전 311년, 그리고 처음 이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282년으로서 마그나그라이키아(고대 남이탈리아 동해안 연안에 건설된 그리스 식민시들을 통칭하는 말) 해안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이때 로마의 해군력은 너무 미약하여 강대한 해양 세력과 맞대결할 수준은 못 되었다. 카르타고라는 강적과 겨루려면 해군력의 도약이 필수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해양 팽창을 시도한 결정적 계기는 시칠리아 문제다. 지중해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시피, 시칠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지중해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섬은 한편으로 동지중해와 서지중해를 나누는 경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의 유럽과 남쪽의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지중해 패권을 노린다면 반드시 이 섬을 장악해야 한다. 당시 서지중해 최강의 해양 세력인 카르타고 역시 이 섬을 포기할 수 없으니 두 세력 간 충돌은 정해진 이치다. 카르타고는 수 세기 전 지중해 동부 지역의 페니키아인들이 교역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역에 건립한 식민지였는데, 본국은 몰락한 반면 식민지가 오히려 더 융성하여 거대한 해양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해상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무대 삼아 결전을 벌였다.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 – 기원전 241)이 발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시칠리아 내부의 두 세력인 시라쿠사와 메시나 간의 분쟁이었다. 로마는 메시나를 지원하고,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지원하는 형국이다. 로마는 메시나를 압박하는 카르타고군을 몰아내려 했고, 그러려면 이들에게 보급을 제공하는 시칠리아 서부의 카르타고 요새를 제거해야 했고, 또 이를 위해서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막아야 했다. 결국 시칠리아 섬을 둘러싼 해로들의 통제가 관건이다. 장기간 섬 내부에서 육상전이 벌어졌지만, 이 전쟁의 종국적 목표는 해양 패권이고 또 실제로 막판에 승패를 결정지은 것 또한 해전이었다.

 

기원전 262년, 카르타고는 아그리겐툼(Agrigentum, 현재 아그리젠토) 전투에서 로마 육군의 위력을 경험했다. 육상 전투에서 로마를 당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카르타고는 그들이 강점을 누리는 바다에서 대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자 로마의 원로원은 전함 건조를 결정했다. 5단 갤리선(quinqueremes) 100척, 3단 갤리선(triremes) 20척을 건조하려 했으나 조선 경험이 일천한 로마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당국은 나포한 카르타고 선박 한 척을 철저히 분석하여 리버스 엔지니어링(제품을 분해해 기술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복제에 성공했고, 몇 달 만에 3만 명 이상을 태우는 새로운 선단이 만들어졌다. 선박을 건조하는 동안 미리 선발된 선원들은 먼저 육상에서 노 젓는 훈련을 한 후 배에 올랐다.

1차 포에니 전쟁 기간인 기원전 260년 벌어진 밀라조 전투에서 카이오 두일리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에 승리하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 16세기 화가 야코보 리판다가 그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것이 로마의 강점이다. 일단 결정하면 신속하고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더 좋은 선박에 더 유능한 선원들을 보유한 전통의 해양 강국 카르타고의 해군을 이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리파리(Lipari) 제도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이자마자 로마는 16척의 배를 잃었다. 로마 군은 자신들의 강점은 육상 전투이니, 해전을 육상 전투처럼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우리 쪽 배를 적선에 충돌시킨 후 병사들이 적선으로 넘어 들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을 취했다. 로마군은 코르부스(corvus)라는 도구를 개발하여 적선에 뛰어 들어가 칼과 창을 휘두르는 전투를 벌인 결과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14년 동안 양측은 승패를 주고받았다. 최후의 결전은 기원전 241년 에가디(Egadi, 현재 Aegadian Islands) 제도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로마는 카르타고 선단을 공격하여 120척의 배를 빼앗고 1만 명의 포로를 잡으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해전을 육상전투처럼 벌인 로마

 

23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완승으로 끝났다. 카르타고는 ‘바다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상실했고, 서부 지중해의 통제권은 로마에게 돌아갔다. 왜 전통의 해상 강국 카르타고가 승리하지 못했을까? 돌이켜보건대 카르타고는 교역 위주의 국가이고, 군사력은 교역을 지키는 데 필요한 정도로 유지했다. 반면 로마는 애초에 무력 성향이 강한 국가다. 육상에서 공격적 성격을 키워온 로마는 해상에서도 무력 팽창을 시도했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강력한 해군력을 양성한 것이다. 1차 포에니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속주(Provincia)가 되었다. 속주는 로마의 기존 영토 바깥에 위치한 곳으로서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지역이다. 이후 광대한 지역에 속주들이 잇따라 들어서게 된다.

 

아직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다. 카르타고를 완전히 눌러 이기기까지는 아직도 두 차례 더 전쟁(2~3차 포에니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분명 로마는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한 가지 명료한 점이 눈에 띈다. 자기 영역 내에 갇혀 내분에 빠지면 몰락의 길을 가고, 광대한 바깥 세계에 눈뜨고 도전적으로 나아가면 흥한다는 것이다. 재래식 화장실의 구더기들처럼 서로 싸우고 있지 말고 세계를 향해,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찾도록 하자.

 

[해전의 틀을 깬 코르부스]

11m×1.5m 판에 쇠못… 적함과 연결시킨 로마해군의 비밀병기

                                                                                 /게티이미지코리아

 

1차 포에니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코르부스다. 11m×1.5m 크기의 판자 끝에 쇠못들이 달려 있어서 적선 갑판에 단단히 박아 고정시킨 후 이걸 타고 적선으로 넘어가는 장치다. 기원전 260년 밀라이(Mylae)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 장치가 진가를 발휘했다. 그렇지만 코르부스가 늘 유용하지만은 않다. 파도가 거칠게 이는 상황에서는 운용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이런 무거운 장치를 갑판에 장치해 놓으면 무게중심이 높아져 선박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실제로 로마 선단이 재앙에 가까운 침몰 사고를 자주 겪는 원인 중 하나가 코르부스일 수도 있다. 로마 해군이 선박 조종에 익숙해지면서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코르부스 이야기가 사라진다. 로마 해군이 바다에서 육상 전투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격적인 해전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