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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 옆 봉은사에 벌어진 조선불교 대참사와 승려 백곡처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0. 13. 13:53

성리학 관료들에 의해 사라질 뻔했던 강남 봉은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8. 선정릉 옆 봉은사에 벌어진 조선불교 대참사와 승려 백곡처능

 

입력 2022.10.12 03:00
 
 
 
 
 
성종 부부가 묻힌 선릉과 중종이 묻힌 정릉을 합쳐서 선정릉이라고 한다. 사진은 정릉이다. 봉은사(奉恩寺)는 성종릉인 선릉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다.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했던 일반 선비와 달리 조선 왕실은 불교를 믿었다. 원래 견성사라 불렸던 봉은사는 명종 때 고양에 있던 중종릉을 선릉 옆으로 옮기면서 지금 위치로 옮겨 중창됐다. 그러자 조선팔도 유생들이 일어나 선종 사찰인 봉은사, 교종 사찰인 봉선사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폐불 운동이 극에 달했던 효종과 현종 때, 성리학을 공부했던 승려 백곡 처능이 한자 8000자가 넘는 장문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논리 싸움에 참패한 성리학 세력은 대찰 철폐에 실패했고, 2022년 여름날 불교를 지켜낸 백곡처능 비석이 봉은사에 섰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g8lKVDH25_w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서울 삼성동 봉은사 부도밭 한쪽에 큼직한 비석이 제막됐다. 비석 앞면 비표는 이렇다. ‘호법성사 대각등계 백곡처능대선사 비명((護法聖師大覺登階 白谷處能大禪師 碑銘)’. 비표는 한국국학진흥원장 정종섭이, 뒷면 음기는 서예가 정도준이 썼다. 내용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이 썼다. 앞면 글자들은 하나하나가 최고 존엄을 뜻한다. ‘호법’은 불법을 수호했다는 뜻이다. 성사는 존경을 넘어 성스러운 스승이며 ‘대각등계’는 열반한 승려에게 올리는 최고 존호다.

그런데 백곡처능대선사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길래 ‘국학진흥원’이라는 대한민국 유학진흥기관 수장이 비표를 썼을까. 오로지 성리학을 앞세워 다른 이들 신념과 종교 말살을 기도한 조선 유생들에 맞서 불교를 지켜낸 사람이다. 불타 사라질 뻔했던 봉은사를 살린 사람이다. 500년 동안 불교를 탄압한 조선 성리학 교조주의 세력과 이에 저항해 신념을 지켜낸 흔적이 바로 이 비석이다. 비석이 들려주는 광기 서린 독선과 이에 맞선 사람 이야기.

 

죽어서도 휘둘린 중종

폭군 연산군에게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역(李懌)이었다. ‘역(懌)’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다’는 뜻이다. 형이 왕이 되고 5년이 지난 1499년, 나이 열한 살에 궁을 떠난 이역은 진성대군 군호를 받고 왕족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7년 뒤 느닷없이 왕이 된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자정 무렵 느닷없이 죽동 집으로 들이닥친 반정세력에 의해 진성대군은 왕으로 추대되고 연산군은 타도됐다. 이복형이 자기를 죽이러 왔다고 생각한 동생이 자결하려고 하자 아내 신씨가 이리 말했다. “말 머리가 집을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으리.” 부부가 사람을 시켜 바깥을 보니 과연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왕비 신씨(愼氏)의 폐위와 복위의 본말)

 

자살을 막아주고, 왕이 되도록 이끈 이 슬기로운 아내 신씨는 반정세력이 철퇴로 죽인 연산군 측근 신수근의 딸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반정세력은 일주일 뒤 중종과 왕비의 이혼을 요구했다. 새 왕은 “조강지처인데” 하고 잠시 머뭇댔지만 이들 제안에 그 자리에서 군말 없이 이혼했다.(1506년 9월 9일 ‘중종실록’)

 

38년 재위 기간 전부는 아니었지만, 중종은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사림세력에게 끌려다녔다. 반정세력에게 끌려다녔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이 중용한 과격파 조광조에게도 끌려다녔다.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왕비 신씨와 이혼한 뒤 반정 가문 윤씨와 재혼한 뒤 윤씨 장경왕후가 죽고 또 다른 윤씨와 결혼했다. 이 윤씨가 문정왕후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묻힌 경기도 서삼릉 희릉(禧陵) 옆에 묻혔는데, 이를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가만두지 않았다.

중종 첫 왕비 신씨 단경왕후가 묻힌 온릉. 경기도 양주에 있다. 사림들에 등 떼밀려 왕이 된 중종은 즉위 일주일 뒤 왕비와 강제 이혼했다. 요절한 계비 장경왕후에 이어 훗날 새 왕비가 된 파평 윤씨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있던 중종을 봉은사 옆으로 천장했다. 본인은 태릉에 묻혔다. 그래서 왕과 세 왕비는 지금 각각 따로 잠들어 있다. /박종인 기자

 

중종의 천릉과 봉은사 비극의 시작

 

요절한 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독실한 불교 신도였다. 어머니 문정왕후도 그랬다. 두 가지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열여섯 살이던 명종 뒤에서 섭정 중이던 문정왕후는 “무자격 승려들이 많아서 군역이 모자란다”며 선종과 교종 불교 부활을 선언했다. 이미 중종 때 사림 세력은 왕을 채근해 ‘경국대전’에서 승려 자격을 뜻하는 ‘도승(度僧)’ 규정을 삭제했었다.(1516년 12월 16일 ‘중종실록’) 서대문 부근에 있다가 현 탑골공원으로 이전한 교종 본산 흥덕사(연산군에 의해 원각사로 개칭)와 선종 본산 흥천사(현 덕수궁 자리)는 각각 연산군과 중종 때 유생들에 의해 사라진 터였다. 불교도인 문정왕후는 군역 보충을 명분으로 봉은사와 광릉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 본산으로 지정하고 승려 제도를 부활시켰다.(1550년 12월 15일 ‘명종실록’) 승과(僧科) 또한 부활시켜 불교를 법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12년 뒤인 1562년 문정왕후는 성종 부부릉인 선릉의 원찰 봉은사를 현재 위치로 이건시키고 첫 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묻혀 있던 남편 중종을 봉은사 터로 천장했다. 봉은사는 이제 성종과 중종을 함께 수호하는 왕실 사찰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반(反)불교 성리학자인 듯한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장경왕후와 같은 경내에서 중종 무덤을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를 주도한 자들은) 중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자전(慈殿)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人皆醜之·인개추지).’(1562년 9월 4일 ‘명종실록’) 사관이 더럽게 여겼다고 한 대상은 기실은 자전 본인이었고 자전이 애틋하게 여기는 그 중들이 아니었겠는가.

 

불교를 향한 치졸한 상소들

 

왜 제목이 ‘치졸한’인지, ‘중종실록’과 ‘명종실록’ 기록만 본다. ‘석가의 도가 우리의 도를 압승할 조짐이다. 신들 모두 울분이 북받쳐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지경이다. 반드시 봉은사와 봉선사부터 헐어버리고 서적도 태워야 한다.’(1538년 9월 19일 ‘중종실록’) ‘중들의 뿌리는 봉선사와 봉은사다. 뿌리를 근절시킨다면 간사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다시는 요사를 부릴 수 없게 될 것.’(1539년 6월 3일 ‘중종실록’) ‘봉은, 봉선사를 없애라는 상소를 중종이 거부하자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워버렸다.’(1539년 6월 9일 ‘중종실록’)

 

‘경국대전에 유생이 절에 못 가도록 규정돼 있지만 사대부 치고 절에서 책 안 읽는 사람 없다. 벌하지 말라.’(1549년 9월 8일 ‘명종실록’) ‘불경은 이단의 뿌리이고 유생들은 오도가 깃들어 있는 존재다. 황언징이 봉은사에서 불경을 훔쳐왔지만 황언징은 엄연한 선비다. 절도를 고발한 요사스러운 중 목을 베라.’(1549년 9월 20일 ‘명종실록’)

 

법 규정이 뭐가 됐든 승려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찰은 이단의 통로이므로 유생들 독서실로 사용하다가 없애버려야 한다는 일관된 적의(敵意)가 실록 곳곳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오직 성리학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와 정의였다. 유생들은 이를 ‘오도(吾道)’, 곧 ‘나의 법’이라고 불렀다.

백곡처능을 기리는 비석. 봉은사 부도밭에 서 있다. 비문은 대한민국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짓고 앞면 글씨는 대한민국 유학 진흥 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장 정종섭이 썼다. /박종인 기자

 

초강력 불교 탄압과 백곡처능

 

병자호란 후 강력한 교조 집단인 서인이 권력을 잡았다. 효종에 이어 현종은 즉위 1년 뒤 왕실에 속한 절 원당(願堂)들을 철폐해버렸다.(1660년 4월 3일 ‘효종실록’) 이는 예전에 송시열이 제안했다가 유야무야됐던 사안이었다. 그해 12월 19일 조선 팔도 승려들을 전원 환속시켰고(같은 해 12월 19일 ‘현종실록’), 이듬해 정월 비구니 사찰인 인수원과 자수원을 철거하고 소속 비구니들은 강제 환속시켰다.(1661년 1월 5일 ‘현종실록’) 철거된 절 건물은 분해돼 성균관 학사 건물과 병자 요양원 공사 따위에 투입됐다.(1665년 윤6월 14일 ‘현종개수실록’) 바야흐로 성리학을 제외한 철학과 학문과 신앙은 물리적으로 말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타깃은 선교 양종 본산인 봉은사와 봉선사였다.

 

그때 백곡처능이 현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제목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석가의 가르침을 없애는 데 대해 간함이다.

 

‘첫째, 석가가 오랑캐라서 탄압하는가. 그렇다면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요 문왕은 서쪽 오랑캐다. 둘째, 왜 개국 때부터 받들어온 원당을 없애는가. 셋째, 살상을 하기로는 폭군 걸만 하겠으며 권세를 탐하기로는 진시황만 하겠는가. 불교는 그런 일 않는다.(중략) 인도의 법이라 탄압하는가. 그렇다면 공자는 노나라 바깥을 나가지 못했을 것이고 맹자는 추나라에서만 간직됐을 것이다. 세상은 비와 이슬을 같이 받아야 한다.’(백곡처능, ‘간폐석교소(1661)’. 오경후, ‘조선후기 불교정책과 대응론’, 역사민속학 31호, 역사민속학회, 2009, 재인용 정리)

 

논리 없이 뒤죽박죽 주장만 있는 교조주의자들은 성리학 경전을 두루 인용한 이 상소에 입을 다물었고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했다. 눈물과 감성이 아니라 논리와 실증으로 세계관과 종교의 공존을 역설한 백곡처능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불교 탄압사는 끝나지 않았다. 법외 인간으로 추락한 승려들은 1895년 갑오개혁 와중에 “외국 승려처럼 조선 승려도 한성에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의 청원이 있을 때까지 조선 수도 한성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김윤식, ‘속음청사’ 1895년 4월 11일 등) 그리고 또 100년이 훨씬 더 지난 여름날, 간신히 소멸을 면한 봉은사에 백곡처능의 비석이 선 것이다. 불교의 승리가 아니라 학문과 신앙과 철학의 자유가 지켜진 연유를 그제야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비문은 대한민국 큰 스님이 지었고 글씨는 대한민국 국학 진흥 수장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