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北村 골목길에 남은 거인의 발자국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4. 친일 귀족들 땅에 조선인촌을 만든 정세권
* 유튜브 https://youtu.be/hHmkIDZmXdA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수께끼의 골목길
서울 북촌한옥마을에 가면 빽빽하게 들어선 한옥 처마들 틈으로 21세기 대도시 서울 전경과 1920년대, 1930년대 풍경이 두루 보인다. 마을에는 8경이 있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인파에 치여 걷기도 쉽지 않은 풍광지가 제5경과 6경이다. 옛 지번으로 가회동 31번지, 도로명주소로 북촌로11길 골목길이다. 남으로는 남산과 빌딩숲이 보이고 북으로는 양옆으로 즐비한 근대 도시한옥들이 가득하다.
그 언덕길을 오르다 길 끝 무렵 왼쪽으로 작은 ‘북촌로11라길’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 안쪽 10미터 정도 되는 공간 옛 주소는 ‘종로구 가회동 33-39′다. 지목은 도로. 면적은 열 평 정도. 등기부등본을 떼보면 이 땅이 현 소유자에게 매매된 때는 1935년 5월 10일이다. 정식 등기가 난 날은 1943년 5월 2일이다. 소유자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갑신정변 4년 뒤인 188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965년에 고성에서 죽은 사람이다. 소유자 주소는 종로구 낙원동 600. 탑골공원과 낙원상가 사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주소다.
이 사내는 누구인가. 왜 그가 죽고 5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도로는 고성 사람 정세권 명의로 남아 있는가.
정세권은 바로 1920년대 이 북촌에 조선인 마을을 건설한 사람이다. 친일 귀족 몇몇이 나눠 가졌던 땅을 개발해 토굴에 살던 조선인들에게 집을 지어 판 사람이다. 오랜 기간 ‘조선왕조 500년 양반의 땅’으로 포장됐던 북촌, 실제로는 나라 팔아먹은 조선귀족들 대저택이 있었던 그리고 정세권이라는 거인(巨人)이 남긴 크고 깊은 발자국 이야기.
북촌 최초의 주인들, 그 귀족들
1890년대 북촌 사진을 보면 지금 한옥마을이 있는 언덕은 텅 비었다. 돌산이다.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회동 골짜기 주변 평지에 사람들은 살았다. 고관대작들이 살았다. 멀리는 현 안국동 사거리 공예박물관 자리 안동별궁까지 평평한 곳에 살았다. 서운관이 있던 고갯길 남쪽에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다. 서운관 고개에 있다고 해서 운현궁(雲峴宮)이었다. 18세기 후반 이 중에서 개혁을 꿈꾸던 박지원과 북학파들이 나왔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서재필도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살던 집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사람 살기 어려운 돌산 능선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대한제국 때였다. 이미 전주 이씨 종친과 순종비 윤씨 가문이 소유한 땅에 이들이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 대토지를 소유했던 고종비 민씨 가문이 저택을 지었다. 민영휘와 그 아들 민대식(가회동 31, 5447평), 완순군 이재완(가회동 30, 1237평)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잠시 피신했던 계동궁(계동 147, 2318평)은 완림군 이재원과 그 아들 이기용이 살았다.(이해란, ‘서울시 북촌의 경관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9, 등)
1922년 총독부가 만든 경성지도에는 이들이 살던 북촌 영역에 이렇게 표기돼 있다. ‘민대식저(閔大植邸)’, ‘이재완저(李載完邸)’. 한 도시를 그린 지도에 집 한 채가 표시될 정도로 거대했다. 이 민대식과 이재완이 소유한 집이 현재 북촌한옥마을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했다. 지도 북서쪽 삼청동 쪽을 보면 삼청동 146번지는 송병준 집이다. 3967평이다. 송병준 땅과 붙어 있는 145번지는 이완용 형 이윤용 집이다. 3241평이었다. 두 집 대지를 합치면 지금 대한민국 국무총리 관저와 얼추 겹친다.
그리고 그 지도에 ‘한창수저(韓昌洙邸)’와 ‘한상룡저(韓相龍邸)’가 보인다.
이왕직 장관 한창수는 북촌 가회동 10번지와 26번지에 각각 3163평, 2708평을 가지고 있었다. 가회동 93번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한상룡이 살았다. 988평이다. 이 집은 훗날 백인제 가문이 인수해 백인제 가옥이라 불린다. 한상룡은 1928년 이 집을 팔고 길 건너 가회동 178번지 591평 땅을 사서 또 저택을 지었다. 이 집은 지금 ‘가회동한씨가옥(嘉會洞韓氏家屋)’으로 불린다.
이 글에 소환된 민영휘, 민대식, 이재완, 이기용, 한창수, 한상룡 이름들에는 공통된 꼬리표가 있다. ‘조선귀족(朝鮮貴族)’이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두 달 뒤 총독관저에서 총독부로부터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다. 작위는 물론 거액 은사금도 받았다.
북촌은 그러했다. 봉건시대에 받거나 그 권력으로 취득한 대토지를, 새로 취득한 권력과 금력으로 유지하고 확장한 친일지주들이 북촌에 살았다. 1917년 당시 운현궁 주인이던 흥선대원군 장손 이준용이 죽고, 운현궁 땅과 왕실 후손인 공족으로서 ‘전하’ 호칭은 그 후손 이우(李鍝)가 세습했다. 그래서 1922년 지도에는 ‘운현궁’이 아니라 ‘우공저(鍝公邸)’로 표기돼 있다. 귀족들이 살았던 저택들 가운데 남아 있는 집들은 이런 역사를 담고 대한민국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꼭 알고 가야 할 역사다.
거인의 등장, 정세권
남산을 중심으로 살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너머 북촌으로 향한 때는 1920년대 후반이었다. 대형 북촌 임야를 가지고 있던 식민 귀족들은 경성으로 몰려드는 일본인, 조선인 수요에 맞춰 자기네 땅을 작은 필지로 나눠 팔았다.
‘건양사’라는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하던 정세권은 이 가회동 지역 개발로 돈을 벌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면장을 하다가 상경한 사람이다. 가회동 30번지와 31번지는 그때 정세권이 만든 대규모 주택단지다. 시골과 달리 좁은 땅에 방과 마당과 상하수도를 갖춘 도시형 한옥으로 구성한, 조선인을 위한 단지였다. 주택 설계는 조선일보와 표준모델을 공모해 대량 개발이 가능했다. 분양 후 개발이 아닌, 선개발 후분양이라는 소비자 지향형 판매 방식도 독특했다.
정세권은 이미 좌우 합작 조직인 신간회 서울지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이 난관에 빠지자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주도했다. 등기부상 ‘가회동 33-39 소유주 정세권’ 주소 낙원동 600번지는 물산장려회 후신 ‘장산사’ 사무실 주소다(옛 기록에는 300번지로 돼 있다). 한용운은 이런 활동을 하는 정세권에 대해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하는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고 장산사 기관지 ‘장산’에 기고했다. 정세권은 또 화동 129번지에 2층 양옥을 지어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1935년 7월 13일 ‘조선일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을 때 정세권은 학자들 감형을 조건으로 건축 면허를 반납하고 재산 상당 부분은 압류됐다. 사업을 잃고 땅을 잃은 정세권은 몰락했다. 정세권은 그가 개발했던 왕십리에서 6·25전쟁을 맞아 크게 다쳤다. 이후 정세권은 고향 고성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1965년이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극적으로 몰락한 거인 덕분에 식민 조선 사람들은 번듯한 마당과 수돗물과 하수구가 있는 한옥에 살게 됐고 학자들은 한글을 연구할 수 있었으며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 흔적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긴 시간 이 북촌을 서울시에서는 ‘조선왕조 500년 향기가 흐르는 땅’이라고 홍보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북촌은 친일 귀족들 악취를 씻어내며 한 거인이 뿌린 땀내가 가득한 땅이 아닌가. 서울시는 작년 봄에야 북촌이 기실 정세권이라는 거인이 만든 땅임을 떳떳하게 자백하는 한옥역사관을 만들었다. 주소는 계동4길3이다. 그 역사를 자세히 보고 이제 북촌로11라길로 간다. 그 작은 골목길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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