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 빨래판으로 전락한 청나라 황제 푸이의 휘호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6. 친일 귀족 윤덕영의 경기도 구리 별장터 비석의 비밀
* 유튜브 https://youtu.be/v59PbWyWROc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11년 봄 중국 베이징에 있는 차이나 가디언 경매회사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가 쓴 서예 작품 한 점이 출품됐다. 가로 54cm, 세로 105cm짜리 비단 3폭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한 폭에는 ‘允執厥中(윤집궐중)’ 넉 자가 적혀 있었다. 서경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왕위에 올라 정사에 임할 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그 중심을 잡아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논어에는 ‘允執其中(윤집기중)’으로 나온다. 또 한 폭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다른 한 폭에는 북송대 철학자 장횡거의 말이 적혀 있다. ‘세상을 위해 마음을 세우고(爲天地立心·위천지입심) 백성을 위해 도를 세우며(爲生民立道·위생민입도), 지나간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爲去聖繼絶學·위거성계절학) 후세를 위하여 태평한 세상을 연다(爲萬世開太平·위만세개태평)’는 뜻이다. 60만위안에서 시작한 입찰은 97만7500위안까지 올라가 낙찰됐다. 2022년 환율로 한국 돈 1억9376만원이다. 출품자도 낙찰자도 정체나 국적은 모른다.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청 뒤편 산기슭에 있는 한 민가 빨래판에도 같은 글, 같은 글씨를 새긴 비석이 누워 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원본 왼쪽에는 ‘大淸宣統皇帝(대청선통황제)’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경성 인왕산록 승우원 천성정에 사는 윤덕영에게 특별히 써준다(爲朝鮮京城仁王山麓承佑園天成亭尹悳榮特書之·위조선경성인왕산록승우원천성정윤덕영특서지)’. 그러니까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조선 대표 매국 부호 윤덕영에게 써줬다는 말이다. 구리시 산속 빨래판에는 이 ‘준 사람’과 ‘받는 사람’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경매 출품작 세 폭 내용이 합쳐서 새겨져 있다. 비석을 뒤집으면 원본에 있는 푸이, 윤덕영 이름이 새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하여, 하도 희한해서 알아보았다. 나라가 식민지로 추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조선 귀족 자작(子爵) 윤덕영과 자기 황민에 의해 타도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와 경기도 구리에 있는 야산은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조선귀족과 윤덕영
조선귀족은 조선 식민지화에 ‘당초에 대훈로(大勳勞·큰 공과 노력)가 있는 사람을 더 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신설된 신분이다.(1915년 1월 21일 ‘매일신보’. 이용창,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3권43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재인용)
이들은 후백자남(侯伯子男) 순으로 네 등급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76명이었다. 종친과 고관대작이라는 신분을 기준 삼아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귀족 작위를 준 사람도 있었다.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반납한 사람도 있었다. 은사금만 받은 현실주의자도 있었다.
1910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조선 총독 관저에서 ‘조선귀족’ 수작식이 열렸다. 작위를 수여하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앞에 대한제국 고관대작과 전주이씨 종친이 모였다. 혹자는 조선 전통 대례복, 혹자는 대한제국 군복 정장으로 복장은 별의별 게 다 있었으나 ‘각자 날리는 희열(喜悅)은 일장 가관이었다.’(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잡보)
후작 작위를 받은 종친 이해승은 10월 11일 경기도 양주에 있는 선조 묘소에서 작위를 받았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서작 봉고식을 거행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자결한 조병세 사위 이용직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용직 또한 중부 수진동에 봉안한 선조 묘에 참배했다. 선조는 목은 이색이다.(1910년 10월 12일 ‘경성신보’, 1910년 10월 20일 ‘매일신보’. 이용창, 앞 논문, 재인용) 이용직은 3·1운동에 동조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작위 수여식 직후 조선귀족 대표가 마차를 타고 덕수궁에 가서 이태왕 고종에게 작위 수여 사실을 보고했다. 그가 광무제 고종 비서실장 격인 전 대한제국 시종원경 윤덕영이다.(1910년 10월 11일 ‘매일신보’) 윤덕영은 자작, 동생이자 순종 비 윤씨 친부인 택영은 제일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윤덕영이 받은 은사금은 5만엔이었다. 동생 택영 은사금은 50만4000엔으로 76명 가운데 최고액이었다.
‘신랄·냉혹·끈질긴’ 식민귀족 윤덕영
윤덕영 집안은 부유했다. 그런데 1904년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양아버지 윤용선이 죽고 순식간에 낭비벽으로 몰락했다. 황실 종친 이해승 집에 얹혀살던 윤덕영은 1906년 조카딸 윤씨가 순종 계비로 간택되면서 활짝 팔자를 고쳐버렸다. 사돈이 된 황제 고종은 벽동(이건희미술관(가칭) 예정 부지인 송현동) 일부를 윤씨 형제 땅으로 하사했다.(1926년 5월 31일 ‘조선일보’)
비서실장 격인 시종원경까지 발돋움했던 윤덕영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며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왕직 일본인 관리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윤덕영은 ‘왕실 존엄과 영광을 영원히 보존할 길은 병합뿐이라고 설득해 고종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 황실비사’(1926), 이마고, 2007, pp.107, 108)
병합조약 조인을 앞두고 조카딸인 순종비 윤씨가 황제 어새를 감추자 강압으로 어새를 빼앗아 날인했다는 말도 있다. 1926년 5월 31일 ‘조선일보’는 ‘어새를 따로 보관한 덕분에 은사금을 46만엔 받았다’고 보도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출판한 ‘한일관계자료집’과 정교의 ‘대한계년사’도 ‘황후가 보관한 어새를 윤덕영이 빼앗아 이완용에게 넘겨줬다’라고 기록했다.(윤대원, ‘순종실기의 고종시대 인식과 을사늑약의 외부대신 직인 강탈 문제’, 규장각 4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실제로 그가 받은 은사금은 세간에 알려진 40만엔이 아니라 5만엔이었으니 예외적인 거액은 아니었다.(‘조선귀족 약력’(1929). 심재욱, ‘1910년대 조선귀족의 실태’, 사학연구 76호, 한국사학회, 2004, 재인용) 대신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병합 2년 뒤 윤덕영은 순종을 도쿄로 보내 천황을 알현하게 하려는 총독 하세가와 계획을 성사시켜 총독부 환심을 완벽하게 얻었다. 윤덕영은 매일 낮부터 새벽까지 ‘신랄하고 냉혹하고 끈질기게’ 덕수궁 고종 앞에 서서 심신에 피로를 안겨줘 순종 알현 허락을 받아냈다. 고종은 “조선 500년 동안 본 적 없는 간악한 자”라고 그를 비난했다.(곤도 시로스케, 앞 책, p177)
1910년 윤덕영은 옥인동 47번지 땅을 구입했다. 땅은 눈덩이처럼 넓어져 1927년 현재 땅 면적은 1만9467평으로 옥인동 전체 3만6361평의 절반에 달했다.(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서울학연구 62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땅에다가 윤덕영은 집을 지었다. 망국 전 프랑스공사 민영찬이 가져온 귀족 별장 설계도를 입수해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은 ‘벽수산장’이라고 지었다. 하도 크고 화려해 사람들은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1913년 시작된 공사는 1926년에도 미결 상태였다. 이 집에서 벌어진 어마어마한 일들은 다음에 이야기하자.
황제의 휘호, 산중의 빨래판
이제 식민 대표 주자 윤덕영과 황제 휘호 관계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은 멸망했다. 이듬해 중화민국 공화국이 탄생했지만 황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정부는 옛 황실과 ‘청실우대조건(淸室優待條件)’을 맺고 황제 명칭은 존속시키고 해마다 세비 400만냥을 지급하고 종묘와 능침 또한 유지시키기로 결정했다.(1912년 2월 13일 중화민국 ‘임시공보(臨時公報)’) 조선총독부가 고종 황실에 대해 ‘신분 보장 및 세비 지급’을 약속한 관계와 유사하다. 1924년 이 우대 조건이 수정될 때까지 옛 황제는 선통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는 비석 휘호는 그가 등극한 1906년부터 1924년까지 어느 시점에 쓴 글씨다. 식민 귀족 윤덕영이 권세와 금력이 하늘을 찌르고 강물을 덮던 시기다. 그때 동생 윤택영은 그 많은 가산을 탕진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베이징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그 어느 시점에 황제 호칭을 유지하던 푸이로부터 인왕산에 거거대대하게 지어놓은 집에 대한 헌사를 받아온 것이다.
그리고 문중 사람이 집성촌을 이룬 경기도 구리에 또 별장을 지은 것이다. 고종과 민비릉이 있는 금곡 땅을 봐준 지관 서규석에게 입지를 골라 집을 짓고 이를 강루정(降樓亭)이라고 했다.(윤평섭, ‘윤덕영의 별장 강루정’, 한국전통조경학회지 5권1호, 한국전통조경학회, 1986) 구리시청 뒤편 산을 차지한 강루정에는 연못과 분수와 각종 석물이 가득했다. 동생이 받아온 휘호 3폭을 모아 비신 가득 새겨넣은 뒤 강루정 사랑채 앞에 세워놓았다.
1935년 윤택영이 베이징에서 객사했다. 장남 홍섭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10월 18일 사치를 누리던 윤덕영이 죽었다. 신장염, 당뇨병 합병으로 한 달 동안 경성대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1940년 10월 20일 ‘매일신보’) ‘일한합병의 공로자로 유일한 생존자 고 윤덕영 자작의 장례식이 엄숙히 진행됐다.(중략) 영구는 양주군 구리면 등룡동 묘지로 떠나 세시에 하관하였다.’(1940년 10월 26일 ‘매일신보’) 교문동이 된 그 등룡동에는 윤덕영 가족묘지가 있었다. 윤덕영은 가족묘 옆에 별장을 짓고 살다가 그리로 돌아갔다. 묘들은 전후 1960년대 들어 하나둘 이장되고 텅 비었다. 별장도 그리 되었다.
그 비석이 지금 옛 별장 자리에 들어선 가정집에 자빠져서 훌륭한 빨래판 역할을 하고 있다. 별장은 대문 기둥 하나, 석물 서너개와 연못 자리 정도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어 다 사라지고, 악평밖에 없다 보니 민간은 물론 구리시청에서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며 일신영달을 추구하던 한 악인(惡人) 흔적이 이 모양이다. 이 비석이 빨래질에 닳아서 없어지면 그 악인을 기억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어찌할까. 구리 향토사학자 한철수(구지옛생활연구소장)가 말한다. “똑바로 세워서, 남 눈 두려워하며 살다 간 그 윤덕영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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