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마치 경배하듯이…신라 왕 무덤 향해 수그린 소나무들
중앙일보
입력 2021.09.03 13:00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3)
어느 날 신문을 보다 경주 삼릉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사진에 매료되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여름 휴가 중에 그 생각이 떠올라 카메라를 휴대한 채 경주로 향했다. 남산 자락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아늑히 자리 잡은 신라 세 임금의 무덤은 평온하고 운치가 있었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4시간을 달려 경주 요금소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남산이 보인다. 남산은 신라 궁궐인 월성 남쪽에 있는 화강암 바위산으로 경주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왕조의 영산이며 불교의 성지다. 절터를 비롯해 200여 점의 석불과 석탑 같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나무 숲에 둘러쌓여 아늑힌 자리잡은 경주 삼릉. [사진 조남대]
해질녁인데다 소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숲속이라 시원하면서도 적막이 흐른다. 촬영할 시간이 촉박해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앵글로 보이는 장면은 어디를 찍어도 멋진 작품처럼 보인다. 어느덧 어둠이 밀려와 나오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 핸드폰 손전등으로 길을 밝혀 숲속을 벗어났다.
이튿날 새벽 5시 조금 지나 다시 찾았다. 숙소와 삼릉까지는 10분 거리다. 주변이 훤하다. 새벽안개에 둘러싸인 소나무 숲을 촬영하기 위해 일찍 나섰지만, 안개는 흔적조차 없다. 박대성 화백은 멋진 소나무 수묵화를 그리기 위해 수시로 오갈 수 있도록 삼릉 부근에 작업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 보니 아침 햇살이 남산 너머로 스멀스멀 얼굴을 내민다. 주변 농가의 닭 울음소리가 새벽을 알리고, 뻐꾹새의 노래가 정겹게 들려온다.
왕릉 주변에 하늘 높이 치솟은 소나무.
처음 찾아와 박대성 화백 그림과 같은 신비스러운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까지 와서 20년 이상 쏟은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실력과 명성을 얻게 된 것 같다. 사진 촬영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른다.
소나무 숲을 조금 들어가면 세 분의 왕이 누워 계신다. 아래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154∼184), 53대 신덕왕(912∼917)과 54대 경명왕(917∼924)의 능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모두 박 씨의 왕이다. 아름드리 울창한 소나무에 둘러싸인 3기의 왕릉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너무나 평온하다.
아달라왕 이후 박 씨 왕이 끊겼다가 거의 700년이 지난 다음 다시 박씨 성의 두 왕이 선조 곁에 묻혔다. 같은 성씨를 가진 왕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그런지 3기의 왕릉은 10m도 안 되는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있어 서로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누워있는 것 같다. 여느 왕릉과는 달리 조그만 상석만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나 석조물도 없다. 기울어져 가는 신라 말기의 힘 없는 왕의 비애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삼릉 소나무.
기울어진 크다란 소나무가 쇠막대기 지지대로 의지하여 서 있는 모습.
우리의 상식으로는 조상 묘 아래에 후손의 묘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8대 아달라왕릉 위에 한참 후대인 53대와 54대 왕의 무덤을 차례로 만들었다는 것과 경명왕이 세상을 뜨자 화장 후에 유골을 뿌렸다는 설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장묘문화가 요즘과 달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처럼 천 년도 더 지났으니 그때의 사연을 어찌 알 수 있으려나.
능 주변으로 아름드리 도래솔이 군무하듯 조화를 이룬다. 소나무 사이로 내리는 햇빛은 가히 몽환적이라 할만하다. 붉은 홍송도 가끔 보이지만, 대부분은 껍질이 검붉은 색으로 거북등처럼 갈라진 모습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것 같다. 쭉 곧은 소나무는 거의 없고, 구불구불하거나 옆으로 눕기도 하고 서로 엉켜 X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활처럼 휘어 길게 아래로 늘어진 소나무는 쇠막대기 지지대에 의지해 겨우 지탱하고 있기도 하다. 자태가 자유분방해 곧게 뻗은 소나무와 다르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삼릉 솔숲은 형산강 팔경에 선정되어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인가 보다.
강원도나 울진 지역에 있는 소나무는 금강송이라고 하여 겉이 붉은 색깔을 띤 데다 쭉 곧아 궁궐이나 한옥 목재로 베어져 나간다. 그러나 삼릉이나 경주 부근의 소나무는 수백 년이 된 듯이 굵지만, 구부러진 상태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왕릉 주위에 버티고 서서 왕의 영혼의 벗이 되기도 한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 숲에는 껍질이 벗겨져 서서히 고사해 가는 나무도 있고, 큰 나무뿌리 부근에는 싹을 틔워 자라는 아주 작은 묘목도 보인다. 왕릉이 조성된 지 천 년도 더 지났지만,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것은 수명을 다한 소나무가 쓰러져 썩고 그 속에서 또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기를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릉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이 왕을 향해 경배하듯 왕릉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왕릉 가까이 있는 소나무는 능에 누워계신 임금님을 향해 허리를 굽혀 경배하는 것처럼 대부분 능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천 년 이상 대를 이어 시립해 있는 소나무야말로 최고의 충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를 충절이 곧은 나무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여름휴가에 들린 경주 삼릉 소나무 숲은 삼복더위를 잊은 듯 시원하면서도 향기로운 솔 내음으로 최고의 피서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아늑한 숲속에서 천 년 이상을 조용히 누워계신 세분의 왕이 평화스럽게 보였으며, 임금님을 향해 경배하듯 굽어 있는 소나무는 지조의 표상을 보는 듯했다. 껍질이 갈라지고 자유분방한 자태로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사를 보는 것 같았다. 삼릉 솔숲에서 마음껏 셔터를 눌렀던 시간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할 때 다시 한번 찾아가 수묵화 같은 멋진 풍경을 촬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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