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철조여래좌상'보다 '앉아있는 철 부처님' 어때요
조선일보 입력 2020.07.29 05:00
[생활 속 쉽고 예쁜 우리말 쓰기] [1] 남원 실상사 문화재 안내판
실상사 석등 앞에서 한 시민이 전문가(왼쪽)와 중학생이 쓴 안내판을 비교하며 읽고 있다. /김영근 기자
한자어로 뒤덮인 문화재 안내판, 암호 같은 법률 용어, 영어로 범벅이 된 표지판…. 정체불명 외국어가 난무한다. 중앙부처 보도자료에는 '태스크포스' 같은 외국어가 자주 쓰이고, 공공기관 정책에도 알쏭달쏭한 말들이 나온다. 본지는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기획의 일환으로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와 함께 '쉽고 예쁜 우리말 쓰기'를 연재한다.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조성하였으며 맨 아래 지대석에서 지붕돌까지….'
27일 오후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 고찰 실상사. 보물 제33호 '수철화상탑' 안내판을 읽다가 한숨이 나왔다. 실상사에서 수도하다 입적한 통일신라 수철 스님(817~893)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전문가가 쓴 이 안내판엔 '탑 몸체의 각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고 지붕돌에서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구현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지대석' '사천왕상' '막새기와' 같은 한자어·전문용어도 어지러운데,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구현했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바로 옆에 놓인 또 다른 안내판. 이름부터 '수철스님의 탑'이다. '몸 부분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수철 스님의 사리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탑의 윗부분인 지붕은 기와집의 지붕처럼 생겨서 포근한 느낌이 난다'…. 어려운 용어는 풀어 썼고, 문장도 쉽고 간결해 이해가 쏙쏙 된다. 인근 인월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쓴 안내판이다. "읽는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아이들이 쓴 안내문이 전문가 설명보다 훨씬 쉽고 재밌고 알차잖아요."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실상사에 갈 때마다 두 안내판을 비교해가며 읽는다"며 "문화재 안내판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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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 인월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쓴 안내판. 이름부터 ‘앉아있는 철 부처님’이라고 풀어 쓰고, 내용도 쉽고 간결하다. /김영근 기자
실상사 곳곳에선 나란히 놓인 안내판 두 개를 만날 수 있다. 왼쪽은 전문가, 오른쪽은 중학생이 썼다. 비례가 아름다운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을 비롯해 '석등'(보물 제35호),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 등 경내에 있는 보물만 7점이다. 아이들은 어려운 이름부터 풀어 썼다. '철조여래좌상' 대신 '앉아있는 철 부처님' 하는 식이다. '높이는 2.69m로 초등학생 4학년 평균 키의 두 배이다. (중략) 이 부처님은 크고 멋져서 국보로 지정되면 좋겠다.' '삼층석탑'에 대해선 '이 탑의 아쉬운 점은 점점 기울고 있다는 것'이라는 느낌을 적었고,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동종'에는 '스님이 기도할 때 울리는 종이다. 종을 쳐서 많이 닳아 안쓰럽게 보인다'는 감상을 덧붙였다.
2018년 전통 산사(山寺)문화재 활용 사업으로 안내판 작업을 진행한 조창숙씨는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지침을 준 게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게 문화재를 설명한 후 충분한 토의와 해석을 거쳐 아이들 스스로의 느낌대로 쓴 것"이라며 "주지스님을 비롯해 사찰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문화재를 더 쉽게 이해하게 됐다며 좋아한다"고 했다.
문화재청도 전국의 사찰·건축·성곽·천연기념물 등 문화재를 대상으로 안내판 개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풍성한 정보를 넣되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쓰고, 지역 고유의 역사나 문화 이야기를 넣어 '읽히는 안내판'을 만들자는 취지다. 예를 들어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 안내판은 '돋을새김으로 부처를 새긴 마애불' 대신 '커다란 바위벽에 새긴… 바위 앞면을 깎아서 튀어나오게 조각'으로 풀어 썼다. ' 머리의 큼직한 육계는 이례적으로 2단으로 하였고, 소발은 둥글며 아담하게 표현했다. 수인은 악마를 항복시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같은 난해한 문장도 '불상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없으며,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다'고 고치고, 육계(肉髻·인도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올려 묶던 상투에서 유래했으며 부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함)의 설명을 따로 적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9/20200729001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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