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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벌거벗은 내면 '적나라한 기쁨'에 꽂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6. 00:24

 

바우하우스 이야기 〈43〉

트럼프의 미국이 아무리 곧 망할 것처럼 보여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미국이 왜 강한가’에 관한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문화심리학자로서의 내 대답은 ‘잡종성’이다. 미국은 이민국가다. 왕과 황제, 귀족들의 국가가 해체되고 ‘민족’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가 세계사의 대세가 되고 있을 때,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이민자들이 창조한 아주 특이한 ‘잡종국가’다.

빈 모더니즘 특징 온몸으로 구현
주류 벗어나 난해·음란한 그림

기존 방식 버리고 인간 내면 주시
평면성·장식성으로 창조적 표현

오늘날 세계 경제를이끄는 창조적 IT기업들의 대부분은 미국 기업들이다. 애플·테슬라·구글 등등. 이들 기업의 구성원은 어느 특별한 문화나 인종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양한 문화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들이 서로 부딪히며 갈등해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

반복해 강조하지만, 창조는 편집이다. 멋진 편집이 되려면 재료가 다양해야 한다. 두 개의 재료만으로 가능한 편집은 단 하나뿐이다. 재료가 다양할수록 다양하게 편집할 수 있다. 미국이 여전히 강한 이유는 바로 이 편집의 재료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잡종성’을 포기하는 순간, 미국의 리더십은 끝난다. 그래서 백인 중심의 아메리카를 주장하는 트럼프가 한심한 거다. 아무리 용을 써도 오늘날의 중국이 미국을 앞설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리더십은 문화적 다원성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구를 무기로 주변국들에 협박이나 일삼는 중국의 태도를 보면, 중국이 가야 할 길은 멀어도 아주 멀다.

세기말 빈, 유대인들의 도시가 되다

1 구스타프 클림트가 빈제체시온의 기관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성스러운 봄)’ 1898년 창간호에 그린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벌거벗은 진실)’. 이 습작품은 이듬해 유화로 그려졌고, 현재 빈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2 클림트가 빈 대학 신관 천장에 그린 ‘철학’ ‘의학’ ‘법학’ 3부작 중 가장 늦게 완성한 ‘법학’(1903). 3 빈 모더니즘의 특징들을 온몸으로 구현한 화가 클림트. 디자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세기말 빈이 혁신적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이유도 바로 이 ‘잡종성’에 있었다. 동유럽과 서유럽 변방의 다양한 인종이 빈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급격한 속도의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비교적 진입이 쉬웠던 자유주의의 중심지였던 덕분이다. 그 결과, 빈은 당시 유럽에서 이민자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특히 유대인의 유입은 특별했다. 1867년, 유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오스트리아인과 동일한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 빈에는 이미 4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901년이 되면 17만 5000명으로 늘어나 빈 전체인구에 8.6%를 차지하게 된다.

그들은 주로 자연과학이나 의료분야에서 활약했다. 역사가 짧고 새롭게 발전하는 분야일수록 진입 장벽이 낮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벨상의 의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 유대인이 유독 많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세기말, 빈의 젊은 유대인들은 은행이나 공장 혹은 교역분야에서 금전적 부유함을 쌓았지만 빈 주류사회에는 진입하지 못한 아버지 세대와는 달랐다. 빈의 공연장, 전람회는 젊은 유대인들로 넘쳐났다. 문화예술계에서도 활약은 눈부셨다. 오늘날의 ‘창조적 유대인 신화’는 바로 이 시대의 유산이다.

유대인이 왜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가에 관해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한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1857~1926)의 설명은 아주 흥미롭다. 그들이 ‘소외된 주변인’이었기 때문이란다. 문화적 잡종성을 매개하는 주변인, 혹은 경계인 특유의 ‘창조적 회의론(creative scepticism)’과 더불어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풍요라는 모순이 ‘탁월한 유대인’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어설픈 ‘유대인 신화’와는 차원이 다른 베블렌의 분석은 ‘근대 유럽에서 유대인의 지적 탁월함’이란 제목으로 1939년 발표되었다.

프로이트, 슈니츨러, 호프만슈탈, 크라우스 같은 유대인이 주도한 새로운 문화적 흐름은 빈의 ‘잡종성’과 맞물리며 ‘빈 모더니즘’을 낳았다.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노벨상을 받은 신경생리학자 에릭 캔들(Eric Kandel·1929~ )은 자신의 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빈 모더니즘’의 내용을 3가지로 요약한다. 우선 인간을 ‘비합리적 존재’로 보는 관점의 등장이다. 겉으로 드러난 합리적 현상의 근저에 깔린 무의식적 갈등, 죽음 본능이나 공격 충동 같은 것들의 발견이다. 이른바 ‘프로이트 혁명’이다. 인간이 ‘비합리적 존재’라는 프로이트 혁명은 ‘코페르니쿠스 혁명’, ‘다윈의 혁명’을 능가한다고 캔들은 평가한다.

두 번째는 ‘자기분석’이다. 외부의 현상이나 타인을 관찰하며 법칙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을 살피며 분석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표현주의는 빈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경쟁했지만 바로 이 방법론에서 뒤졌다. 자기 분석에 치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지식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었다. 의학·미술·건축·디자인·철학·경제학·음악·심리학·생물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지식의 편집이 ‘빈 모더니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빈 제체시온의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은 이 같은 지식 통합의 노력이 만들어낸 첫 번째 가시적 결실이었다.

‘빈 모더니즘’을 빈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하인츠 코후트(Heinz Kohut, 1913~1981)는 ‘자아의 재편집’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했다. 외부의 변화는 내부의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이 ‘잡종의 도시’는 인간 내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창조적으로 재편성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종합예술적 토양을 갖고 있었다. 빈 제체시온을 이끌었던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빈 모더니즘의 3가지 특징을 온몸으로 구현한,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클림트가 빈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회화의 ‘3차원성’을 포기하면서부터다. 조각공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는 건물 내부 벽이나 천정에 그림을 그리는 장식미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링 슈트라세에 새롭게 건축된 부르크극장, 예술사박물관 등의 벽화, 천장화를 그리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그의 화풍은 원근법과 사실주의적 묘사에 충실한 보수적 방식이었다. ‘3차원의 2차원적 재현’에 충실했다는 이야기다. 전통적 미술 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으며 클림트는 승승장구했다. 1894년에는 빈 대학 신관의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빈 대학 신관은 링 슈트라세를 이루는 거대한 건축물들의 완성판이었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

클림트의 창조적 ‘자아의 재편집’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클림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897년, 전통적 빈 미술아카데미에 반기를 든 빈 제체시온의 결성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주류가 되지 못한 이들이 전통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클림트는 주류 아카데미의 촉망을 받는 화가였다. 이 같은 급작스러운 클림트의 변신은 다양한 빈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발견한 ‘내면의 세계’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1900년에 ‘철학’을, 1901년에 ‘의학’을, 1903년에 ‘법학’을 각각 완성했다. 하지만 빈 대학의 교수사회는 그의 낯선 그림에 당황했다. 이전 그림들처럼 계몽주의적 전통에 충실한, 품격(?)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갑자기 난해하고 음란해졌다. 가장 난감한 것은 ‘3차원의 2차원적 재현’의 포기였다. 부분적으로 3차원적 이미지들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꿈꾸는 듯한 이미지들의 원칙 없는 편집이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슈니츨러의 ‘자유연상’이 다양한 이미지들로 삐걱거리며 엉켜져 구현된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결국 숱한 논란 끝에 철거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소실됐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선언한 빈 제체시온은 클림트에게 주류 사회와의 대립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했다. 클림트는 내면을 추구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빈 제체시온의 기관지 ‘베르사크룸(Ver Sacrum·성스러운 봄)’의 1898년 창간호에 그린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벌거벗은 진실)’라는 작은 그림이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성의 2차원적 드로잉은 빈 주류세계가 설정한 이성과 합리성의 경계를 벗어나 벌거벗은 내면 그대로를 들여다보겠다는 선언이다.

1902년의 ‘베토벤 전시회’ 당시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전시된 방 입구 복도에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에는 바그너가 해석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교차양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클림트의 교차양상은 철학적으로나 표현기법에 있어서나클링거의 ‘브람스 판타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통과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순수한 사랑과 최고의 기쁨이 서로 껴안고 있는 벌거벗은 연인들이 합창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이 ‘적나라한 기쁨’은 이후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주류사회로부터의 자발적 고립은 클림트를 더욱 ‘자아의 재편집’으로 몰아넣었다. 클림트는 인간 의식을 두 가지로 집중해 표현했다. 비잔틴 모자이크화에서 영향받은 ‘평면성’과 금박을 동원한 ‘장식성’이다. 이것이 최고로 구현된 작품이 그 유명한 ‘키스’(1907~1908)다. 이 후 클림트 그림의 주제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 차원에 집중된다. 성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