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 팔아 직원 여행비 댄 김수근, 운니동 한식 즐긴 애주가
[중앙선데이] 입력 2020.06.27 00:02 수정 2020.06.27 00:16
[예술가의 한끼] ‘공간사랑’ 이끈 건축가
한국 현대 건축에 큰 족적을 남긴 김수근. 1966년 창간한 월간 종합예술지 ‘공간’과 73년에 문을 연 ‘공간미술관’, 77년에 개관한 소극장 ‘공간사랑’을 통해 김수근은 한국 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중앙포토]
짧고 굵게 살다 간 사람,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딱 그랬다. 그는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와서 교동초를 거쳐 경기중을 다녔다. 서울대 공대 건축과에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나자 6·25 전쟁이 터졌다.
서울대 건축과 다니다 6·25 때 밀항
도쿄서 이소자키·박용구 등과 인연
60년 귀국 후 건축계 총아 떠올라
월간지 ‘공간’ ‘공간미술관’ 통해
문화 이끄는 ‘서울 로렌초’로 소개
“한식은 여유 있는 식사로서 멋”
커피 티켓, 예술인에게 베풀기도
1951년 전쟁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도쿄의 메구로에 방을 하나 구했는데 밥은 나가서 매식으로 해결했다. 30엔짜리 라멘에는 챠슈 한 장 얹히지 않았다. 국교가 없어 한국에서 일본으로 송금이 불가능했다. 서울의 부잣집 아들 김수근은 끼니를 때우고 학비를 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미국영화의 한국수입 대행을 하는 도쿄의 불이무역에서 시나리오 번역과 자막 처리 일을 했다. 1000편 이상의 영화를 보며 교양이 늘었다.
도쿄에는 비슷한 처지의 한국 젊은이들이 많았다. 일본의 대학들은 전쟁을 피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불법체류자 젊은이들을 모른 체하고 받아 주었다. 이 젊은이들은 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비슷한 처지의 유학생으로 이인영(바리톤·서울대), 지윤태(삼성그룹), 윤수길(일본 통일신문 주필),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등이 있었다. 대선배격으로 수필가 김소운이 있었다. 도쿄 한국 YMCA의 3층 목조건물이 이들의 베이스캠프였다. YMCA 근처의 고전음악 다방 에리카에 모여 청춘의 빛나는 한때를 공유했다.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 당선됐지만 …
김수근은 54년 도쿄예대 건축과에 입학했다. 58년 도쿄대 대학원에 입학해 건축과를 다녔다. 이때 도쿄대 건축과 출신인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1931~)를 사귀었다. 이소자키는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 화가 자스퍼 존스 등과 친교를 맺는 등 음악과 미술에도 활동이 왕성한 통융합형 건축가다. 김수근과 배짱이 맞았다.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2016)는 작곡가 김순남 그리고 무용가 최승희에서 안은미에 이르기까지 한국 공연계의 오랜 역사를 한 몸으로 겪으며 음악, 무용 등 여러 분야에 높은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인물이다. 김수근은 박용구를 그의 정치적 피난처였던 도쿄에서 만났다. 박용구는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공간지의 멤버가 된다.
도쿄대 대학원생일 때 한국인 건축가 선배들과 함께 응모한 서울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됐지만 곧 5·16이 터지면서 건축의 실행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60년에 그는 일본인 아내 야지마 미치코(矢島道子, 한국명 김도자)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건축계의 총아로 각광받으며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잡지 공간 창간호. [중앙포토]
김수근은 66년 창간한 월간 종합예술지 ‘공간’과 73년에 문을 연 ‘공간미술관’, 77년에 개관한 소극장 ‘공간사랑’을 통해 한국의 문화 전반을 이끌어 가는 중심적 인물이 됐다. 77년 타임스지는 김수근을 ‘서울의 로렌초’라고 소개했다. 김수근을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한 예술후원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 비견한 것이다.
공간사랑에서는 공옥진의 병신춤, 이애주의 살풀이춤, 프리재즈 강태환의 색소폰 연주가 열리는가 하면 최종민의 사회로 김소희, 황병기 등 이제는 전설이 된 명인들의 정기적인 국악공연이 열렸다. 김덕수의 사물놀이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한국의 실험음악을 소개하고 연주하는 판뮤직 페스티벌이 열린 곳도 공간사랑이었다. 공간은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를 개최했고 공간국제학생건축상을 운영했다.
공간지가 창간호의 표지에서 내세운 것은 건축, 도시, 예술 이 세 단어였다. 공간지를 통해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정신과 담론이 소통하고, 공간미술관과 공간사랑을 통해 예술인들과 관객들의 신체가 함께 호흡하는 현장이 형성됐다. 공간사옥의 카페에는 늘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한두 사람이 앉아 있기 마련이었다. 헐렁한 셔츠를 걸친 화가 장욱진, 작곡가 강석희, 민속학자 심우성, 마임이스트 유진규, 공연기획자 강준혁 등 수많은 예술가가 공간 카페에서 진을 치며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만나고 있었다. 공간의 직원들은 물론 예술가들에게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티켓이 주어졌다. 김수근은 주변의 예술가들에게 공짜 커피 티켓 인심을 실컷 베풀었다.
현대미술가 김구림은 81년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공간사랑에서 열었다. 공간지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조정권이 시를 낭송하고 김구림은 태연히 손톱을 깎아 가며 신문지 위에 떨어지게 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75년 도쿄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구림은 김수근과 급속히 친해졌다. 호기심 충만의 김수근은 자주 김구림을 불러내어 일본 현대미술의 흐름을 물어보곤 했다. 대화는 항상 짧았다. 김수근은 건축가이자 큰 사업가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호출이 있으면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게 미안했던지 커피 티켓을 가득 김구림의 손에 쥐어다 주었다. 김구림의 소개로 재일교포 화가 곽덕준의 전시에 가서 그림을 한 점 사주기도 했다. 인정의 사나이 김수근이었다.
김수근은 판단이 빠르고 통이 컸다. 70년대 중반, 공간 직원들의 설악산 단체여행계획이 있었다. 공간의 살림이 빠듯했다. 여행을 망설이고 있는 직원들에게 자신의 지프를 내주며 그걸 팔아서 다녀오라고 했다. 공간은 월급이 많지 않았다. 공간지의 원고료도 박한 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카리스마 넘치는 김수근의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려 즐겨 일하고 자랑스럽게 원고를 썼다.
예전의 공간사옥에는 고려석탑이 서 있는 마당과 한옥 별채가 있었다. 공간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리면 마당에서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별채는 100명 가까이 되는 설계팀과 10명가량의 공간지 편집팀이 이용하는 큰 식당이었다. 줄을 서서 식판에다 밥을 담아 먹었다. 외부에서 온 예술인들이 그 줄 가운데에 서 있기도 했다. 가끔 미술평론가 이경성과 김도자 여사가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밤샘을 친 설계팀의 피로를 풀어 주는 새벽의 누룽지는 별미였다.
한옥 별채 식당서 누룽지 별미도
김수근의 공간사옥은 아라리오에 인수됐다. [중앙포토]
공간사옥 앞의 운니동과 창덕궁 앞길인 돈화문로는 조선의 메인 스트리트이자 ‘소리의 길’이다. 이 길의 좌우에는 국악과 관련된 강습소나 악기가게들이 많다. 예전에 국립국악원은 운니동에 있었다. 운니동에는 가야금 병창 국악인 박귀희(1921~93)가 운영하던 운당여관이 있었다. 나른한 풍류의 느린 시간이 흐르는 곳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국악인과 시인묵객이 고단한 몸을 쉬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대한민국 국악의 1번지인 이곳에 공간사랑을 만들어 국악의 매력을 세계보편성의 현대음악과 바로 연결한 것은 김수근의 탁월한 감각과 안목이었다.
운니동 골목에는 삼합 등 한식을 다루는 식당이 많았다. “한국 식사의 경우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 많은 가지 수와 많은 양의 반찬을 여유 있게 밥상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아주 낭비라는 비판도 있지만 여유 있는 식사로서 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근의 한식론에 나오는 식당들이 즐비한 운니동 골목이다. 공간에서 공연이나 전시를 하는 예술가들은 이 골목을 즐겨 찾았다. 지금은 운니동 남쪽인 익선동 골목에 식당이 더 발달해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김수근은 대단한 애주가였다. 결국 간암이 발병했다. 김수근이 맹활약을 하던 시절은 한국예술계의 화양연화였다. 김수근이 가고 나자 김수근이 남긴 흔적들도 많이 변모했다. 김수근의 공간사옥은 아라리오가 인수했으며 미술관과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김수근이 자형인 화가 박고석(1917~2002) 부부를 위해 설계한 명륜동의 집은 얼마 전 팔려 ‘고석공간’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김수근의 훌륭한 안목과 감각이 예술과 무연한 숱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또 깊이 스며들 차례가 왔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인문학에 묻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활 속 쉽고 예쁜 우리말 쓰기 (0) | 2020.07.29 |
---|---|
첨단 기술로 재해석한 '르네 마그리트'展 (0) | 2020.07.17 |
민병헌 사진 작가 (0) | 2020.07.06 |
생각보다 똑똑한 네안데르탈인 (0) | 2020.06.10 |
‘기억 착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유리한 내용만 기억 (0) | 202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