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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말하기/ 시: 말의 행방/황정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2. 25. 22:29

말을 말하기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IT 기술의 발전으로 이룩된 현대사회는 정보 과잉의 사회이기도 하다. 널리 보급된 IT 기기들은 우리의 삶에 각종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넘치는 정보들이 대부분 말로 되어있기에 우리의 삶은 말들로부터 시작해서 말들로 끝난다. 눈을 뜨면 시작되는 TV뉴스, 길거리에 널려있는 전단지 그리고 우리의 이 암담한 삶을 금방 풍요롭게 해줄 것 같은 이름난 강사의 인문학 강의까지 모두가 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말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선거는 말들의 전쟁터다. 거기서는 온갖 구호와 정치 선전과 모략과 마타도어가 판을 친다. 그 모두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모두가 말의 힘에 의지하만 그 누구도 말들을 믿지 않는다. 이것이 말이 가진 아이러니한 성격이다. 지난 계절의 시들에서 말에 대한 시들이 특히 눈에 띄는 것도 바로 지금이 이런 말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소문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벙어리의 입과

귀머거리의 귀를 버리고서

잘못 들으면 한 마리로 들리는

무한증식의 말을 갖고 싶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과

길들여지지 않은 그리움으로

오래 달려 온 튼실한 허벅지를 가진

잘못 들으면 한 마디로 들리는

꽃을 가득 품은 시한폭탄이 되고 싶었다

길이 없어도

기어코 길이 아니어도

바람이 끝내 어떻게 한 문장을 남기는지

한 마디면 어떻고

한 마리면 또 어떨까

 

천리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야생의 그 말

 

- 나호열, 「말의 행방」(『문학의식』 2017 봄호), 전문

 

말(言)과 말(馬)의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재밌는 시이다. 힘 있는 말을 갖는다는 것은 잘 다릴리는 말을 가지는 것처럼 충만한 기쁨이다. 그것은 “무한증식”하는 영원한 교훈이 되기도 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그리움” 같은 욕망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때로 “시한폭탄”과 같은 강력한 무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 꿈꾸는 그 말은 “천리 밖에서 /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 시인이 다가갈수록 그 말은 점점 멀어져 사라져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야행의 그 말”이기 때문이다. 길들여 진 말, 세상의 소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은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말들은 이미 이러한 야성을 잃고 있다.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의 삶을 조건 지우는 말들은 나의 힘도 나의 희망도 나의 욕망도 만족시키지 못한 죽은 언어일 뿐이다. 시인은 이렇게 죽은 말들 사이에서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싱싱한 야생의 말을 쫓는 외로운 사냥꾼이다.

- 계간 문학의식 2017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