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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지현아/ 나호열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 15. 16:57

지현아/ 나호열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

 

새벽이 오면

강은 스스로 나무가 된다

빛깔도 향기도 없는

수만 송이의 꽃을 피우는 나무

어둠을 딛고 아스라이 바라보는

수묵의 너른 품

정갈한 백자를 닮은 얼굴은 기쁨과 슬픔을 곱게 풀어놓은 듯하다

밤을 오래 걸어와

새벽을 응시하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강의

천불천탑 나무들의

수만 송이의 꽃들의

책갈피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면

온몸에 물의 전생을 담은 너를 만난다

 

가보지 않은 고향을 그리워하듯

홀연히 사라지는 나무 속으로

나 또한 깊이 젖는다

새벽이 진다

 

―「새벽 강」 전문

 

근래 지인의 추천으로 재난에 관한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미국의 활동가이자 작가, 지난 초가을 내한한 레베카 솔닛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그것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키워드 중 재난 유토피아라는 말이 있다. 역설처럼 들린다. 자연재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정전 역시 재난에 속한다.

 

정전 사태 혹은 전력공급 중단과 같은 사회 공동체의 재난 안에서 사람들은 문득 자신이 지금 아주 외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별들의 지붕 아래에 있음을 발견했으며 뉴욕시에서는 은하수가 보였다고도 한다. 그것은 오래 전에 사라진 낙원의 영역이었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어둠은 어쩌면 매일같이 찾아오는 재난이겠지만, 그 재난 뒤에는 달빛이라는 낙원이 펼쳐진다. 그 달빛 아래를 걸어와 새벽을 응시하는한 시인이 있다. 시인은 어둠 속 달빛 아래, 나무의 모습을 한 강을 바라본다. “온몸에 물의 전생을 담은나무는 빛깔도 향기도 없는 수만 송이의 꽃을피워낸다.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박진희는 나호열 시인의 시집에 대해 지금 여기를 불화, 불모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말과의 치열한 고투를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듯 「새벽 강」은 밤을 오래 걸어와/ 새벽을 응시하여 수만 송이의 꽃이 피면 불화(不和)는 화()가 되고, “천불천탑 나무들의/ 수만 송이의 꽃들의/ 책갈피 속으로불모(不毛)는 반야(佛母)가 된다.

 

백년 후면 넉넉하게 사막에 닿겠다

망각보다 늦게 당도한 세월이

수축과 팽창을 거듭한 끝에

빅뱅 이전으로 돌아간 심장을 애도하는 동안

수화로 들어야 하는 노래가 있다

떨쳐내지 못하는 전생의 피

증발되지 않는 살의 향기로

꽃핀 악보

사막이란 말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사막을 키우고 있다 사막을 건너가는 꿈이 넉 잠을 자는 동안 바람은 고치에서 풀려나오며 오동나무에 날개를 뉘였다

짧은 생은 촘촘한 기억의 나이테로 현을 묶고 백년쯤 지난 발자국으로 술대를 젓는 늦가을을 기다리는가

, 거문고의 긴 날숨이 텅 빈 오동나무의 가슴을 베고

, 거문고의 깊은 들숨이 나비가 되지 못한 음을 짚어낸 때

나는 다만 첫발을 딛는 꽃잎의 발자국 소리를

사막에 담을 뿐

수화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뿐

―「거문고의 노래 1」 전문

 

* 문학과 창작 좋은 시집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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