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It
오늘도 그가 왔다
굳은 표정과 말 없는 침묵으로
말을 거는 그에게
오히려 나는 할 말이 없다
낯이 익은 탓인지
온갖 비밀로 가득 찼던 몸을
기꺼이 내게 열어주지만
그는 언제나 나에게는 삼인칭의 이름
찬란했던 봄이 가고 딱딱한
눈물이 남는 나무처럼
부드러운 나의 손길에도
깊은 나이테를 보여주지 않는다
잘 가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이니
나는 다시 또 다른 그를 기다릴 뿐
슬퍼할 겨를이 없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
장의 葬儀의 나날들
계간 시와 소금 2017 가을호
이 계절에 좋은 시 읽기 / 구재기
I (Ego, 自我) 는 일상생활에서 여러 방식으로 끊임없이 주변의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에 반응하면서 행동하고 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의 행위와 관련하여 평가하고 계획해주는 가운데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데 항상 ‘ 굳은 표정과 열쇠가 없는 침묵으로 /말을 거는 그’가 있다. 곧 ‘It’라는 Id(本能)이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나 구조나 이성으로서조차 해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 I'와 자주 충돌하게 된다. 때로는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한다. 그래도 ’낯이 익은 탓인지/ 온갖 비밀로 가득 찼던 몸을/ 기꺼이 내게 열어주지만/ 그는 얹제나 나에게는 삼인칭의 이름‘일 뿐이다. ‘It’는 결코 ‘ 깊은 나이테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 I’는 새로운 실행을 위하여 타협을 시도한다. 비록 ‘찬란했던 봄이 가’더라도 ‘ 딱딱한 눈물이 남는 나무처럼’ ‘부드러운 나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 잘 가라/ 다시 만날 일을 없을 터’라고 확인하다가도 타협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나는 다시 또 다른 그를 기다릴 뿐/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한다. 이는 곧 외부세계에 대한 반응이 덜한 편이며 주변상황과 관계없이 일정한 기준을 유지하는 경향(〓superego 超自我)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 / 장의葬儀의 나날들’을 재확인하게 된다.
현대 사회는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복귀할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성숙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긍정과 부정의 카테고리
(category)속에서 가지는 현대인의 갈증이 생활과 실천을 통하여 어떤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계간 시와 소금 2017 겨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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