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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바람의 언덕/ 조영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0. 5. 10:13

바람의 언덕

조영심

 

내게도 바람이 닦아놓은 언덕이 있어

넘너리(里) 부는 바람을 안고

당신 속을 돌고 돌아

먼 바람길 오른다

 

오래된 그 언덕엔

해가 일었다가 지도록 달이 차오르다 기울도록

차마 등질 수 없는 세상의 바람들

오롯이 하늘에 닿도록

한 바람이 다른 바람을 다치지 않게

이 바람이 저 바람을 가리지 않게

너른 바람이 소소한 바람을 짓누르지 않게

바람과 바람 사이를 또 드나드는 바람

바람 속을 다시 되작이는

바람뿐이네

 

간곡한 바람의 언덕에

헐린 내 가슴에 꽂힌 작은 십자가

자그작 자그작 자리를 잡는

당신 없인 여기도 저기도

이국의 밤이네

 

바람의 언덕

누구에게나 바람의 언덕이 있다. 세상에 바람(風) 맞으며 그 바람이 닦아놓은 언덕에 오르면 바람(願)의 원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바람(風)이 없으면 바람(願) 또한 없는 것이 삶의 역설이 아니던가. 여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넘너리나 저 먼 나라 리투아니아 샤울리에의 십자가 언덕이나 쓰라린 삶을 한 발짝씩 딛고 선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간절한 눈빛이 살아있었던 것. 정읍사의 달을 향해 두 손을 고이 접었던 여인네의 가슴이 돋아 올라있던 것.

그러나 내가 일으킨 바람(願)이 누구의 마음을 할퀴는 원(怨)이 된다면, 그저 정처 없는 바람(風)이 되고 말 것이기에 내가 오른 언덕은 헐린 가슴이 되고 그 가슴에 꽂히는 십자가로 표징된 절대자의 발자국으로 무거워진다.

‘당신 없인 여기도 저기도/ 이국의 밤’은 이기심을 버린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몸서리치는 고독이 아니던가,

 

시집 『소리의 정원』(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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