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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다에 노래가 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1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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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다에 노래가 있다

채종인



샤워를 끝내고 알몸으로 돌아온 아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다카마스 야스오라는 그 남자, 참 대단하네요.

막 물기를 걷어낸 아내의 살갗은 차고 매끄러웠다. 나는 손바닥으로 아내의 어깨를 쓸어안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방은 어두웠다. 그리 넓지 않은 정육면체 공간 속으로 짙은 어둠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숨이 막혔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내는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 기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밥상을 물린 아내와 나는 식탁 위에 신문을 던져두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지금쯤 아내는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테지요.

아내는 작은 숨을 새근거리며 어둠 속으로 나를 저어기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차가운 바다 속에 아내가 있는데 그냥 놔둘 수가 있겠어?

이때쯤 나도 한 마디 해야할 것 같아 입을 열긴 했지만 금세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뱉은 말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도 아내는 고마웠는지, 조금 따스해진 손바닥을 내 가슴 위에 올려놓으며 촉촉한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정말?

오늘 아침 우리 부부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건 한 일간지에 발표된 일본 특파원의 기사였다. 특파원은 3년이 다 되어가는 3·11 동일본 대지진 현장이었던 미야기宮城현을 찾아 한 중년 남자의 애절한 사연을 전하고 있었다. 기사 제목은 <찬 바다에 아내가 있다>였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미야기현 오나가와女川에 사는 50대 후반의 남자 다카마쓰 야스오高松康雄 씨는 3·11 동일본 대지진 때 아내를 잃었다. 당시 47세였던 아내는 해안가에서 100m 떨어진 은행에서 시간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발생한 지진의 진원지는 바다 속이었다. 미야기현에서 동남쪽으로 130km 떨어진 바다에서 리히터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동북지방의 대부분 해안은 엄청난 쓰나미에 잠겨야 했다.

 

다카마쓰 야스오 씨의 아내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은행 건물 옥상으로 대피했지만 높이 20m의 쓰나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13명 중 1명만 살아남고 모두 실종되고 말았다. 사고 며칠 후 아내의 휴대전화가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물살에 휩쓸려가기 전, 남편에게 보낸 문자가 발견되었다. ‘쓰나미가 엄청나요. 괜찮아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남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항공자위대를 정년퇴직하고 오나가와에서 버스 운전기사로 제2의 인생을 출발하려던 자신을 누구보다 격려하고 기뻐하던 아내였다. 그는 아내의 은행 유니폼이 떠오를까봐 은행도 멀리하고 살았다. 아내의 사망신고서도 보류했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아서였다. 대신 미야기현 해상보안청에 부탁해 은행 동료의 시체가 발견된 곳을 중심으로 바다 속을 세 차례나 수색했다. 하지만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는 내 스스로 찾아야겠다.

다카마쓰 야스오 씨는 스쿠버다이빙 점포를 운영하는 지인의 지도를 받아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쓰나미 잔해 제거나 수색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잠수사 국가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잠수사 국가자격을 얻어냈다.

‘내 손으로 아내를 집에 데리고 돌아간다.

검은 잠수복에 15kg에 달하는 산소통을 멘 그는 차디찬 오나가와의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다. 기술도 익히고 할 겸 여름을 기다리는 게 어떠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루라도 빨리 아내를 찾기 위해 차디찬 겨울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차가운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채로 있을 아내가 너무 불쌍하다. 나에게 문자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으니 반드시 내 손으로 아내를 찾아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희생된 사람이 몇 명이었지요?

아내는 어둠 속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본 신문 기사를 떠올리며 어림잡아 얘기했다.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하면 대충 이만 명 가까이 될 걸 아마.

“휴, 그렇게나 많이…….

아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으로 자살한 사람 수가 3천 명에 달한다는 기사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대체 그런 슬픔을 속으로 삼키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연 아내의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돌아누우며 바다를 생각했다. 그러자 어두운 벽 저 너머로 바닷물이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친구 석범 씨 말이에요…….

아내가 어둠 속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덕분에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숨소리를 죽여야 했다.

“아직껏 시신을 못 찾았으니, 그 부인은 얼마나 가슴이…… .

아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어쩔 수없이 돌아누우며 한 손으로 아내의 조그마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내의 동그란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망망대해에서 실종된 대학교 때 친구 석범을 찾아 내가 제주 바다를 찾은 것이 지난 가을이었다. 나는 회사에 월차를 내고 1 2일로 서울을 떠났다. 이른 시간에 제주 공항에 도착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섬의 서북쪽에 있는 한림항으로 향했다. 한림항은 친구가 실종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최적의 항구였다.

아침 바다는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철없는 여자의 속살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하루는 또 얼마나 많은 핏빛 비늘을 떨쳐내고 어둠 속으로 저물어갈 것인가. 나는 어선들이 군무群舞를 이루는 창밖을 내다보며 늦은 아침밥을 사먹었다.

항구의 끝에 ‘해양경찰서 한림파출소’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실종된 친구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서너 명의 젊은 해경들이 머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를 해왔다. 벌써 2년 반이 지난 일이었지만 그들의 뇌리 속에는 아직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조그만 어선 한 척만 섭외해 주시오. 그놈을 타고 친구가 실종된 바다로 들어가고 싶소.

나는 그들에게 간절하게 부탁했고, 그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데리고 항구로 나아갔다. 항구 한 쪽에 조그만 어선이 대기해 있었다. 나는 미리 수퍼에서 사온 술과 안주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어선에 올랐다.

“어서 오시오!

어부가 주름살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예순줄에 접어들었을 성싶은 어부의 구릿빛 얼굴은 브론즈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굵고 깊은 주름 속으로 가을 햇살이 잦아들고 있었다.

“한림읍 서쪽 백삼십일 킬로미터 해상으로 나가주시오.

나는 신문기사의 숫자를 외며 어부에게 다그쳤다. 마치 실종된 친구의 시신을 건져 올리기라도 하듯이.

“알겠소.

어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그만 어선은 달달 몸을 떨며 먼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돌려놓고 있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초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바다의 한 기슭에 두 다리를 뻗어놓고 앉아있었다. 팽팽하게 긴장한 바다의 속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낡은 어선 갑판에 몸을 맡겨놓고, 눈꺼풀 위로 붉게 내려앉는 아침 햇살을 하릴없이 맞고 있었다. 그때였다. 초록 망토를 걸친 어린 왕자가 느닷없이 갑판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석범아!

나는 심봉사처럼 번쩍 눈을 뜨며 애절하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엔 늙은 어부의 낯선 등짝만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왔을 긴 검劍은 굵은 바다 낚싯대로 변해 갑판 한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대학교 때 별명은 어린 왕자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는 광명에 사는 형님댁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늘 형님과 형수님께 미안하다며 주말과 방학 때면 명동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흰 모자에 앞치마를 두르고 주문을 받다말고 내가 가면, 그는 갸름한 얼굴에 볼그스름한 미소를 띠며 수줍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는 점장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소곤거리고는 햄버거와 감자칩, 콜라를 쟁반 가득 담아왔다. 나는 녀석이 잡아주는 구석 자리에 앉아 배가 터지도록 햄버거를 먹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주문 받는 손님의 어깨 너머로 나를 힐끔거리며 순진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친구의 별명이 어린 왕자가 된 것은 그의 순진한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소설 창작 시간에 발표한 그의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 담배를 배우지 않은 그는 늘 해맑은 얼굴이었고 부지런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그는 먼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탓에 걸음이 빨랐다. 그리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도 발랐다. 그런 그가 소설을 쓴다는 것이 그만 동화가 되어버린 탓에 친구들은 이참에 그를 어린 왕자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친구의 별명이 어린 왕자에서 생텍쥐페리로 바뀐 것은 이십대 후반의 일이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그는 느닷없이 육군삼사관학교로 편입을 했고, 졸업 후에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육군 항공대에서 헬기 조종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작가를 꿈꾸던 문학도가 하늘을 나는 헬기 조종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헐레벌떡 얼굴을 내미는 그를 일러 우리는 생텍쥐페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늘을 날면서 가끔씩 동화를 쓰곤 하지. 머릿속으로만 말이야. 하지만 언젠간 퇴고할 날이 올 거야.

친구는 그렇게 술자리에서 말하곤 했지만, 그가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을 하거나 동화책을 내는 일은 없었다.

육군 항공대에서 대위로 예편한 그는 해양경찰에 특채되어 구조 헬기를 몰았다. 그가 여수와 목포, 인천으로 옮겨 다니며 하늘을 비행하는 동안 우리들은 하나 둘,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극작가가 되었다. 그런 어느 겨울 날, 우리는 오랜만에 송년회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는 몇 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홍대 앞이었다. 열댓 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잊지 않았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드라마 작가 다 있지만 아직 동화 작가는 없군 그래. 내 자리 비워둬서 고마워. 곧 와서 앉을게.

술 한 잔 마시지 않는 그였지만, 그날따라 유쾌해 보였고, 2차는 자신이 한턱낸다며 호프집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생텍쥐페리는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가을 바다는 물빛이 고왔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낡은 어선의 선수에 속살을 내주면서도 가을 바다는 웃고 있었다. 그 무지렁이 같은 웃음 속으로 날치 몇 마리가 비늘을 번쩍이며 뛰어올랐다.

“얼마나 왔지요?

나는 선미에서 키를 잡고 있는 늙은 어부에게 물었다.

“이제 백 킬로 좀 넘을 거요. 삼십일 킬로를 더 가자면 한 시간은 족히 잡아야 할 거요.

어부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한림읍 서쪽 백삼십일 킬로미터! 정확히 거기로 가야 해요.

그날 친구가 송년회에 참석한 건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인천에서 근무하던 그가 갑자기 제주도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로 가면 아무래도 모임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며 일부러 바쁜 시간을 쪼개어 홍대 입구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의 영원한 작별 인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새 근무지인 제주 해양경찰청에서 일한 지 두 달쯤 되던 어느 날, 친구는 제주시 한림읍 서쪽 131km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제주해경 1502함으로부터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구는 구조 헬기 AW-139를 몰고 급히 제주공항을 이륙했다. 그리고 밤 8 20분께 1502함 상공에 도착한 헬기는 상공에서 정지한 상태로 환자를 구조바스켓으로 끌어올려 태우는데 성공했다. 이어 8 25분께 ‘제주대학교 병원으로 출발하겠다’는 교신을 제주항공대 상황실에 전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상황실 근무자는 헬기와 여러 차례 교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더 이상 친구의 헬기는 레이더에도 안 잡히고 무전에도 안 잡혔다. 해경 관계자들은 헬기의 추락 시점을 밤 8 25에서 8 30분 사이로 잡고 있었다. 출발 5분 만에 추락했을 거라는 추정이었다.

친구의 비행시간은 무려 4420여 시간이었다. 우리의 생텍쥐페리가 하늘을 난 시간을 날 수로 계산해 보면 184, 이것을 다시 달로 계산하면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된다. 여섯 달 동안 계속해서 하늘을 난다고 생각해보자. 어마어마한 비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해경에서도 조종사의 조종 미숙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었다. 사고 당시의 날씨 또한 양호한 상태여서 기상악화에 따른 추락 가능성도 낮다고 보았다. 헬기 정비도 매일 해왔기 때문에 기체 결함에 의한 추락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했다. 따라서 사고 원인은 블랙박스 회수와 헬기 인양이 이뤄진 뒤에야 밝혀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헬기가 추락한지 3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게 없었다. 헬기에 타고 있던 환자의 시신만 사고 며칠 뒤에 발견되었을 뿐, 그 외에 함께 탑승했던 부기장과 정비사 두 명의 생사는 여태껏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또한 블랙박스는 고사하고 헬기의 동체나 잔해 하나 발견된 것이 없었다.

그동안 친구와 실종자들은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 합동영결식이 거행됐고, 이들은 결국 대전 현충원에 시신 없이 안장되고 말았다. 친구는 실종 당시 마흔아홉 살이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대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가을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섬이나 육지라곤 눈에 띄지 않는 망망대해. 어디서 날아왔을까. 티끌 같은 고추잠자리 떼가 투명한 날개에 햇볕을 잔뜩 묻혀서는 또 하나의 바다 같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 있었다. 생텍쥐페리가 내려 보낸 문장들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생텍쥐페리는 죽어서 잠자리의 날개를 펜 삼아 짙푸른 창공에 글을 쓰는가, 동화를 쓰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정확히 한림읍 서쪽 백삼십일 킬로미터 되는 지점입니다!

늙은 어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팽팽하던 어선의 모터소리가 힘없이 풀어지며 어선의 선수가 속력을 잃고 한쪽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엔진을 아예 끄시죠. 여기서 밤이 될 때까지 놀다 갈 테니까요.

말을 해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어선 한 척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다는 죽음 그 자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한 가운데 서면 이런 기분일까.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비정함을 느끼며 나는 준비해온 일회용 컵에 소주를 부어서는 바다에 뿌렸다.

“여기가 친구의 무덤이죠. 하늘을 날다가 이 물 속에, 천길 바다 속에 묻혔어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나왔다. 나는 소주잔에 술을 가득 따라 어부에게 건넸다.

“몇 해 전에 해경 헬기 한 대가 한림항 앞바다에 떨어진 적이 있긴 있었지요. 혹시 그때…….

“맞습니다. 벌써 이년 하고도 반이 지난 일이죠.

친구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바다 속일까, 하늘 속일까? 얼마 되지 않는 친구의 살점은 바닷고기들을 조금이나마 배부르게 했을 것이고, 그의 때묻지 않은 영혼은 별빛을 타고 올라가 은하수 어디쯤에 메어있을 것인가.

“아, 이거 안되겠시다!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안주라도 해야지 이거…….

늙은 어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몇 번 힐끔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뱃전에 기대어 놓았던 낚싯대를 받쳐 들었다. 나는 어부에게서 등을 돌려 하릴없이 먼 바다로 눈길을 던져놓았다.

초가을 푸른 바다는 어선을 중심으로 접시처럼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수평선은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하늘은 바다보다 조금 맑고 투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결국 바다와 하늘은 하나처럼 보였다. 바다가 하늘같고 하늘이 바다 같았다. 가끔씩 전투기 조종사들을 착시현상으로 빠트린다는 함정이 거기에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고도를 높이다가 가공할만한 속력으로 물속에 처박히고 마는 끔찍한 비행. 나는 차라리 친구의 사고를 그렇게 단정짓고 싶었다. 가당찮은 얘기지만 그렇다면 친구는 지금도 푸른 바다 속 어딘가를 비행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바닷가 어디엔가 생텍쥐페리의 비행기가 날고 있기를 바라듯이.

나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벌써 세 잔째였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친구였지만, 옛 친구가 건네는 지극한 정성을 마다하지는 않을 거라 여기며 채운 잔을 높이 들어 바다에 뿌렸다.

대학교 졸업을 몇 달 남겨놓지 않은 어느 초겨울, 나는 술에 몹시 취해 있었다. 그날은 종강파티가 열리는 날이었고, 우리는 명동역 근처 한 중국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나는 그때 스물한 살이었고 다소 초조해 있었다. 몇 달 뒤면 졸업식이 있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군에 입대를 하거나 취직을 해야 할 것이었다. 졸업 전에 하고 싶었던 문단 등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정쩡한 11월의 날씨처럼 내 마음도 온통 회색빛 투성이었다. 그런 어느 날, 우리는 종강파티를 열었고 나는 어느 때보다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중국집 2층의 둥그런 테이블 저쪽 편에 소설가 박동기 교수가 앉아있었다. 나는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박동기 교수를 향해 무어라 큰소리로 내뱉었다. 동시에 삿대질을 하며 엉거주춤 일어서는 나를 옆에 있던 생텍쥐페리가 말렸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자고나니 뚝섬 경마장 옆 삼촌댁 옥탑방이었다. 내가 이태동안 머물던 방이었다. 생텍쥐페리도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그를 평생 내 분신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목숨을 건져준 은인이었다. 그날 파티 장에서 끌려나오다시피 한 나는 생텍쥐페리의 손에 이끌려 택시를 잡고 있었다. 한 손에 자신의 가방과 내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겨우 내 겨드랑이를 껴안고 있던 그는 달려오는 버스 앞으로 갑자기 돌진하는 나를 제어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4차선 도로 저만큼 뛰쳐나가 있었고, 버스는 급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순간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치고 쏜살처럼 달려와 내 등을 덮쳤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지르던 버스는 우리들 키만큼 더 미끄러져 나가서는 겨우 멎었다. 다행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나동그라진 우리는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나중에 박동기 샘한테 정중하게 사과해야겠다 너!

“……왜?

“하하 참…… 야, 박동기! 그랬다니까.

그때 TV문학관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 박동기 교수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됐었다. 원래 제목이 「눈과 까마귀」란 중편소설이었는데,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 제목은 <아이들, 산상에 서다>였다. 여기에 내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라마로 재탄생되어 대중들에게 어필되는 건 좋은데, 작품 제목까지 방송국 측에서 임의대로 손을 봐서야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더구나 작품을 쓴 작가로서 그쪽 맘대로 알아서 하라고 했다니. 원작료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날 파티 장에서 박동기 교수한테 대든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으론 잘했단 생각도 들고…….

“뭐가?

“때론 저돌적인 행위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달려오는 버스에 뛰어든 건 또 뭐니?

“……건 나도 몰라.

그날 이후 나는 생텍쥐페리를 내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그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나는 라면에 계란을 잔뜩 풀어 냄비째 그에게 바쳤다. 그리고 몇 달 뒤 우리는 졸업식을 치렀고, 그는 육군삼사관학교 편입생이 되어 영천으로 떠났다. 그가 사관생도가 되고 한 달 뒤 나는 해군에 자원입대해 군함을 탔다. 내가 군함 승조원이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 동안, 그는 육군 항공대원이 되어 헬기를 몰았다. 나는 바다에서, 그는 하늘에서 그렇게 세월을 색칠하고 있었다.

“바다에 빠져죽을 놈은 나였는데…… 네가…… 바다에 묻히다니.

정작 내가 해군 하사관에 자원입대한 것은 바다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2년제 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내가 좋은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일 테고, 그럴 바에야 군대부터 갔다 오고 보자는 계산에서 자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육군이나 공군보다는 해군이 근무하기가 편할 것 같다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육상근무를 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었다. 하지만 진해 신병훈련소를 거쳐 해군 종합기술학교에서 직별 교육을 마친 내가 발령받은 곳은 ‘비봉함’이라는 상륙 수송함이었다. 세계 2차대전 때 미국에서 건조한 군함을 우리 해군이 인수해 온 것인데, 월남 파병 때 많은 병역과 장비를 수송했던 군함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암호전문 해독을 담당하는 암호사로서 1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광주함’이라는 구축함으로 옮겨 탔다. 전투함인 구축함에서도 나는 암호사로 근무했고, 제대 말년에는 ‘진양함’이라는 유조함의 승조원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결국 편하자고 자원입대한 나는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3년 가까운 세월을 바다에서 보내게 된 것이었다.

군함을 타면서 가장 가슴 졸인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야간 당직이 끝나고 침실로 내려와 침대에 몸을 묶고 잠을 청할 때면, 정신은 오히려 말똥말똥 되살아났다. 내가 누워있는 침실은 바다 속이었고, 거대한 파도가 선체를 때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무거웠다. 억지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 주위를 둘러보면, 고래 뱃속 같은 둥근 침실은 좌우로 흔들리며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리라,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입안이 바싹 마르고 똥구멍이 타들어가는 듯 확확 거렸다. 거칠고 어두운 밤바다 수천 길 아래로 군함 한 척 가라앉는다 해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침을 맞을 것이었다. 가라앉은 군함 속의 나는 티끌 하나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리라. ,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정작 바다에 빠져죽을 놈은 나였는데 하늘을 날던 네가 바다에 묻히다니…….

한번은 죽음의 사자가 나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제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암호실에서 당직을 서다가 바람이라도 쐴겸 갑판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바다는 태풍 때문에 물결이 거세었고, 내가 탄 군함은 서해 먼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던 나는 불현듯 라이프라인을 붙들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집채만 한 파도가 갑판 위를 휩쓸고 지나갔던 것이다. 군함 우현을 때린 파도는 갑판 위를 물바다로 만들며 좌현으로 넘어갔다. 순식간이었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갔어도 나는 그 파도에 휩쓸려 칠흑 같은 밤바다로 쓸려가고 말았을 것이었다.

바다에 저녁이 들면서 산들산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는 곳에 놀이 일면서 고추잠자리 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하루종일 친구의 무덤 위에 배를 띄어놓고 늙은 어부가 낚시질한 바다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친구의 살점으로 배를 불렸을 지도 모를 바다고기를 먹는다는 게 께름칙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숙명은 아닐까, 하고 자위하면서 나는 어지간히도 술을 마셔댔다. 그러나 아직 돌아갈 마음은 아니었다. 바다에 밤이 찾아오고, 파란 은하수가 어린 왕자를 데려와 친구 잃은 나를 위로해 준다면 그때서야 낡은 어선에 시동을 걸어 육지로 돌아가리라.

“자, 선장님도 한잔 드시지요!

나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늙은 어부에게 잔을 건넸다. 하루종일 나를 주인처럼 모시던 그도 이제 술이 거나해졌는지, 얼굴 주름살을 있는 대로 늘어뜨린 채 내 코앞으로 눈을 바짝 들이댔다.

“선생님, 이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에 덩치가 제일 큰 물고기가 뭔지 아시겠소?

나는 향유고래, 북극고래, 혹등고래 하다가 결국엔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왕고래지요. 무게가 자그마치 백이십 톤이나 나가는…….

그러면서 늙은 어부는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서는 내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이놈은 심장 크기가 자동차만 하고, 울음소리는 어찌나 큰지 제트기가 이륙할 때 나는 소리만큼이나 시끄럽다고 하네요. 나도 바다에서 평생을 산 놈이라 주워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영물은 영물이지요.

우리는 또 술잔을 비웠다. 바다는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런데 말이지요, 선생님. 서러워할 거 없습니다. 아쉬워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 대왕고래에 비하면 돌아가신 선생님의 친구 분께서는 새 발의 피도 못되는 존재이니까요.

바다에서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는 죽어서까지 그 품위를 잃지 않는다고 늙은 어부는 말했다. 몸길이가 자그마치 이십칠 미터나 되는 대왕고래는 넓디넓은 해저 평원에 조용히 드러누운 채 마치 기도라도 하듯 두 눈을 감고 있다고 했다. 수만 마리 바다 생명체는 대왕고래 주검을 뜯어먹으며 최소한 10년 이상을 깊은 포만감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거라고 늙은 어부는 말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고, 오래 전에 이웃의 늙은 어부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선생님, 이렇듯 우리 인간은 하찮은 존재입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생텍쥐페린가 생태찌갠가 하는 선생님 친구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별 도움 안 됩니다. 바다 생명체들에게는 하루 식사 꺼리도 안 되지요. 그러니 더 이상 서러워하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시라 이 말씀입니다.

나는 늙은 어부로부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술이 확 깨고 말았다.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워 다시 한 번 그에게 뭐라구요? 하고 되물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물고기들에게 선생님 친구 분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이 말씀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친구가 죽은 지 이태 하고도 반이 지나도록 그의 무덤이나 유족 한번 찾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나름대로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마음먹고 사고 해역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의 육체와 영혼을 앗아간 바다 위에 배를 띄워 놓고, 한때나마 나의 분신이었던 그를 생각하며 마음껏 울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늙은 어부의 그 생뚱맞은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무엇엔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엔 생각지도 않게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바다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술에 몹시 취해 늙은 어부의 낡은 어선에 쓰러진 채 쏟아지는 밤별을 바라보며 뭍으로 돌아왔다. 항구 근처 조그만 모텔에 몸을 던진 나는 이튿날 점심 때가 돼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항구로 어슬렁거리며 나갔다가 전날의 늙은 어부를 다시 만났다. 우연이었다. 어부는 늦은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비행기 타고 돌아갈 겁니다. 갈 때까지 이 항구에 좀 더 머물려고요.

나는 그가 묻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늙은 어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물을 배에 싣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어쩌면 친구 분께서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이것도 오래전에 들은 얘깁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바다였고, 친구 분께서 머물고 계실 저 바다가 뭍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친구 분께서는 거친 바다 속에 있는 우리를 걱정할 게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친구 분을 생각하듯 말입니다.

그날 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나는 친구 생각에 내내 골몰해 있었다. 평소 가정적이었고, 특히 아내 사랑이 깊었던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늙은 어부의 말대로 그는 어쩌면 바다 아닌 바다에 사는 이쪽 사람들을 걱정하느라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 그를 불쌍하게 여기듯, 그는 모진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승 사람들을 한없이 가엾어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정이 많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그였기에 그럴 가능성은 더했다. 그는 죽어서도 아내와 자식 생각에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몇 해 전에 울산 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에 놀러갔다가 엄청난 광경을 본 일이 있었다. 태어난 지 사흘된 새끼 돌고래 한 마리가 급성폐렴에 걸려 죽은 적이 있었다. 폐에 물이 차는 바람에 호흡곤란을 일으켜 죽은 것이다. 죽은 새끼가 수족관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자 어미는 주둥이로 새끼의 사체를 밀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 밖으로 밀어내면 새끼가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듯했다. 결국 죽은 새끼는 직원들의 뜰채에 의해 건져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어미는 자그마치 4시간 동안이나 뜰채를 주둥이로 밀어내며 새끼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석범 씨 가족들은 이사도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마 나 같아도 평생 그 집에…….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아내가 정적을 깨트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내의 고운 목소리는 인어의 울음소리처럼 아련하게 바다 속으로 퍼져나갔다.

“……왜?

나는 아내의 손을 끌어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내의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석범 씨 영혼이 불쌍하잖아요. 그 집 주위를 맴돌며 가족을 지켜주고 있을 텐데.

나는 조용히 아내를 끌어안았다. 아내의 매끈한 몸은 물고기처럼 차가웠다. 우리가 섹스를 하는 동안 바닷물은 적당한 수온으로 찰랑거리며 우리의 알몸을 애무해주었다.

“어쩌면 우리가 누워있는 여기가 바다였을지도 몰라요. 아주 아주 옛적엔.

평소 같았으면 일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뒷물을 했을 아내가 오늘따라 꼼짝도 않고 누워 인어처럼 종알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식어가는 몸을 끌어안고는 문득 오래 전에 죽어갔을 이름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들이, 나무들이 바다 속으로 묻혀갔을까. 그들의 영혼은 오래도록 떠나지 않고 살아남아 오늘 밤 인어의 노래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을빛이 물드는 바닷가에서…….

아내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비단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희고 고운 아내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울먹이는 가슴을 물에 던지며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다가…….

아내의 노랫소리는 젖어 있었다. 나는 문득 아침에 읽은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다카마쓰 야스오 씨. 그리고 실종된 그의 아내. 남편은 찬 바다에 가라앉아 있을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뭍에서 노래하고, 아내는 뭍에서 살아갈 남편이 걱정돼 바다 속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내는 그들을 대신해 노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없이 고요하고 슬픈 목소리로.

“인어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

나도 어느새 아내처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채종인 / 196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단편 『사랑의 사막』, 장편 『아버지, 이순신』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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