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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추억의 이벤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0. 10. 21:58
 
     
 
 

 

비상구, 추억의 이벤트

 

백종선  

 

        1.

 

하필이면 이사 가기 하루 전날, 사고가 날게 뭐람. 17, 청명 아파트, 안방과 거실에 이삿짐 꾸러미가 옹골차게 들어앉아서 발 디딜 틈이 없다. 간신히 이삿짐을 피해 아슬아슬한 발걸음을 내딛어 주방으로 다가간다.

 

나는 임신 7개월의 불룩한 배를 뒤뚱거리며 냉장고 문을 연다. 텅텅 비었다. 후텁지근하다. 며칠 째 열대아가 장난이 아니다. 숨이 탁 막힌다. 어느새 코드까지 빼놓은 거야? 알차게도 정리했네. 내일 아침에 코드 빼면 누가 잡아가나. 오렌지 주스가 하나 남아있었는데 말이야. 갈증이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남편은 어제 밤새도록 이 많은 짐들을 혼자 꾸려놓고 이른 아침에 출근했다.

 

이불, 옷가지들, 주방용품, 화장품, 공구들, , 신발, 액자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솜씨가 보통 야무진 게 아니다. 오전근무만 하고 늦어도 2시까지는 온다던 남편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짐은 이미 남편이 야무지게 분류하여 다 포장해 놓았으니 이사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이사걱정 사라지니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아니. 정말 그 촌구석에 집을 계약했단 말이야? 제정신이야? 정말 못살겠다. 그 정도의 안목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참 갑갑하다. 투자가치는 고사하고 교통편도, 아이들 학교문제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면서 남편은 심란해했다.

 

운동 삼아 20분정도 걸으면 전철역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람.

 

무심한 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편은 머리 나쁘면 3대가 고생이라면서 씩씩거렸다. 계약을 파하자니 계약금 2배로 물어줄 돈이 아까워 못하겠고 벌판이나 다름없는 촌구석에서 서울 시내까지 출근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배는 점점 불러올 텐데, 그냥 두 다리 쭉 뻗고 2년마다 전세금 걱정 안 해도 되는 집은 내게 천국이나 다름없어. 애들도 도시보다는 흙을 밟고 자라면 자연 친화력도 생기고 면역력도 강해질 거야. 약삭빠른 도시인보다는 순박하게 자랄 테니까. 애써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다독이고 있으려니 소변이 마렵다. 몸 움직이기 귀찮아 여태 참고 있었다.

 

‘소변 참지 마. 요산이 축적되면 병이 돼!

 

남편의 잔소리가 생각난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인테리어, 집기들이 다 빠져나간 화장실은 썰렁하다. 화장실 휴지걸이 밑, 장식꽂이에 낡은 책 한 권이 꽂혀있는 게 눈에 띈다. 책을 끄집어낸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다. 이 책이 언제 여기 와 있었지? 구세주다. 더부룩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니. 백년 내내 고독하다는 뜻인가? 처녀 시절 한번 읽은 기억이 나는데도 내용은 가물가물, 도표로 그려진 어마어마한 족보만 떠오를 뿐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나는 차츰 소설의 비밀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세 시간 남짓, 소설에 빠져 날이 저무는지도 몰랐다. 뒷베란다 창 너머 베이지빛 땅거미가 질 무렵 소란스럽게 현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을 접고 문을 열었다. 아래층 사는 아들의 친구 진호다. 진호의 숨이 턱에 차올랐다.

 

“큰일 났어요. 승연이가 놀이터 농구 골대에서 떨어졌어요. 머리에서 피가 막나요. 빨리요 빨리!

 

“뭐, , 뭐라고! 승연이가 뭐 어째? 어디서 떨어졌다구?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냥 두루마리 화장지를 통째로 들고 숨이 턱에 매달려 계단을 내려와 놀이터로 뛰었다. 달리기 선수라도 그렇게 빨리 달릴 수는 없으리라.

 

아들은 농구골대에서 떨어져 골대를 둘러치고 있는 사각 철근모서리에 부딪쳐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다. 끔직해서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그냥 숨이 멎을 거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 피가 나는 거야! 나는 어느 쪽에서 흘러내리는지 모르는 피를 막기 위하여 이쪽 저쪽 마구 휴지뭉치를 갖다대며 주변을 두려운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경비아저씨한테 알려달라고 숨찬 목소리로 진호한테 소리치는데 마침 경비가 나타났다.

 

“이런! 어쩌다 이렇게 다쳤지? 피가 많이 나는데 우선 병원으로 갑시다. 제가 안고 갈 테니 휴지를 머리에 대고 따라 와요. 

 

택시를 잡으려고 허둥대는데 아파트 뒷문으로 나가면 첫째 골목에 작지만 외과병원이 하나 있다고, 택시 기다리는 것보다 더 빠를 거라고 했다.

 

“승연아! 승연아! 조금만 참아! 피나는 건 괜찮아. 피가 안 나야 더 무섭지. 병원에 가서 꿰매면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들은 수술실에 들어가 여덟 바늘을 꿰매고 나서 포도당 주사도 맞고 여전히 경비의 팔에 안겨 아파트로 돌아왔다. 다행히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어둑해질 무렵 술에 잔뜩 취해 눈에 핏발을 매단 채 집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남편은 사나운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도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야? 자식이 중요하지 백년 동안의 고독은 무슨 얼어 죽을 고독이야!  당신이 고독이 뭔지 알기나 해! 

 

남편은 내게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어던졌다. 책은 내 손목뼈를 맞고 나동그라졌다. 현기증이 난다. 온 몸이 뒤틀리는 듯 통증이 몰려온다. 나는 눈 앞이 노래지며 이내 거실 이삿짐꾸러미에 엎어졌다. 소란스러움에 제 방에서 나온 아들은 엄마의 등을 만지면서 시무룩한 표정이다. 머리에 꿰맨 상처가 아직 아플 텐데 아들은 오히려 “엄마 배 아픈 거야? 괜찮아?” 한다.

 

“괜찮아. 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래. 걱정 말고 방에 가서 일찍 자라. 내일 아침 일찍 이사하려면 힘들 거야. 상처 덧나면 큰일 나.

 

아들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더니 “아빠 미워!”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남편의 이마에 그늘이 진다. 남편은 나를 부축해서 아들 방으로 옮긴 다음 요를 깔고 눕혔다. 약상자에서 물파스를 찾아내 내 손목 주위에 발라주고는 발치에 앉아 말없이 내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나는 눈물을 참는다. 밤이 깊어간다. 마음속 독이 뱃속의 아가한테 옮겨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새벽녘이야 겨우 잠이 들었다. 남편의 한숨짓는 소리가 들린다. 담뱃불 부쳐 밖으로 나가는 기척 느낄 만큼 자는 둥 마는 둥 악몽 같은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짐을 싣고 익스프레스 기사 옆자리에 앉아서 서울 근교 연립주택으로 갔다. 나는 아들과 새로운 둥지를 향해 모처럼 택시를 타는 행운을 누렸다. 

 

“엄마! 머리에 흉터 생기면 어떻게 해?

 

“흉터 좀 생기면 어때? 잊지 못할 추억 하나 생겼으니 흉터에 감사해야지!

 

나는 아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마주보고 웃었다. 웃음은 암세포도 치료한다더니. 아들과 웃음으로 교감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차창 밖으로 연녹색 느티나무 잎사귀가 하늘거렸다. 이사갈 집이 가까워 올수록 공기가 맑고 한적한 풍경이 평온하고 정겹게 스친다. 사이클 타고 언덕을 내달리는 청년들의 몸짓이 경쾌하다. 어느 나뭇가지에선가 새들이 우리 가족을 환영하듯 노래하고 있다.

 

짐을 연립주택 마당에 하나 둘 부리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슬며시 일어난다. 어젯밤 사건으로 가슴에 돌덩이 하나 매단 듯하다.

 

남편은 이삿짐을 대강 정리하고 가스 기사를 불러 가스통을 연결하고 전기 기사를 불러 전화를 연결했다.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가 알아서 다 정리할 테니 당신은 집주변이나 돌아보라며 시침 뚝 뗀 표정이다. 나는 아직 남편한테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디귿 자 형태의 연립주택 마당은 꽤 넓었다. 일층 화단에는 백일홍, 칸나,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옆집 앞 베란다에는 상추와 고추 깻잎이 하얀 직사각형의 화분에 심어져있고 일층 담벼락 뒤 텃밭에는 호박넝쿨 사이로 호박도 달려 있었다.

 

텃밭 너머 보리밭도 보이고 옥수수 잎사귀도 물이 잔뜩 올랐다. 옥수수 밭 너머 온통 녹색의 들판도 보인다. 들판 너머 하늘과 땅을 반반씩 품은 산을 바라보며 마음 속 감정의 앙금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그만 살까?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들어선 생명이 무슨 죄라고. 그럼 일단 애를 낳고 난 다음 이혼할까? 터무니없는 꿈일까? 자식 둘 데리고 남편 없이 워킹맘 할 수 있을까? 근데 이혼사유가 가능할까? 백년 동안의 고독이 내 손목뼈를 맞지 않고 배를 겨냥했다면 아마도 유산이 될 가능성이 짙었는데.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랬던건 아닐까? 살면서 때로 소통불가로 가치관의 차이로 이혼에 대한 꿈을 키운 적이 있었다.

 

결혼을 할 수 있듯이 이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남편 없이 살 수 있을 거 같다.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독립된 상태다.

 

그 정도의 사소한 일로 결혼이라는 약속을 깬다면 넌 이기적 유전자로 똘똘 뭉쳐진 거야. 정말 그럴까? 그게 사소한 일이란 말이야? 생명을 품고 있는 아내를 향해 폭력을 행사했는데. 엄마로서 아들을 돌보지 않은 죄목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가슴 바짝 조이고 있는데 그 마음 헤아려주지는 못하는 거야? 두 가지 마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뇌파를 건드리고 심장을 들락거린다. 아랫배가 뭉치는 바람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난다.   

 

남편의 이마에는 여전히 세로주름이 패여 있다. 인상을 쓴 채로 힘들면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다독이며 일어선다. 아들의 손을 잡고 마을회관에 들러 인사하고 동사무소에 민원 처리를 하고 마을 어린이집에 들러 아들의 입회원서를 냈다. 어린이집을 나오는데 하늘이 낮게 가라앉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와아~ 이사하고 비 오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어.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부자가 그렇게 좋아? 부자가 여기 있는데, 무슨 부자가 또 필요해? 하긴 전세금 천만 원 올려줄 돈 없어 이렇게 밀려 내려오긴 했지만, 잃어버린 만큼 얻는 게 있을 테니까.

 

아들의 귀 뒷머리 상처에 붙여진 하얀 반창고를 유심히 바라보던 남편은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듯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들은 머리를 슬쩍 빼낸다.   

 

“이제 말이지만 당신도 시골에서 대추나무에 매달린 그네 타다가 떨어져 뒷머리에 주먹만 한 혹이 생겼다면서? 부전자전이네 뭐.

 

 

 

햇살이 유독 따가웠던 날,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우리 고기 잡으러 가자. 플라스틱 통발로 잡을 수 있어. 미끼로 쓸 떡밥도 있어. 엄마가 준 용돈 안 쓰고 모아서 샀어. 

 

마을 회관 뒤 산으로 오르기 전에 냇가가 하나 있었다. 어느새 또래 아이들이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아들은 냇가로 들어가 미끼가 든 플라스틱 통발을 냇물 깊숙이 한가운데 두고 언덕 위로 올라와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물수제비를 뜨던 까무잡잡한 촌아이들이 통발 근처로 모여들었다. 정겨운 그림이다. 아들은 30여 분쯤 지난 후에 통발을 끄집어내왔다. 통발을 들고 입이 찢어져라 웃는 모습을 폰에 담았다. 피라미, 버들치 열댓 마리를 잡고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다.

 

남편은 허허벌판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하느라 늘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주일 내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던 남편은 주말이면 잠자기에 바빴다. 짐이 된다고 소파를 버리고 왔더니 아쉬웠다. 남편은 마루 벽에 커다란 반달 모양의 긴 베개를 등에 받치고 자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들이 앞마당이 보이는 마루, 앉은뱅이책상에서 숙제로 그림일기를 쓰고 있었다. 이사 오기 무섭게 아래층 병호네 엄마가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다며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렸다. 차임벨 소리에 나가보니 병호 엄마다. 어둡고 녹녹치 않은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이라는 운전기사가 있으면 아들의 세상 여행이 안전하고도 즐거울 거 같아 나는 교회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이혼을 하고 싶다는 불안정한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뱃속의 아이한테도 축복이 될 터였다.

 

나는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있던 남편을 깨워 교회에 가서 성경말씀을 들어보자고 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일어난 남편은 대뜸 거부했다.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키우면 된다면서 확실하지 않은 관념을 아이한테 주입시키지 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자리에 다시 누워버렸다.

 

이사 오기 전 날 사건으로 아들이 아빠한테 거리감을 두는 거 같아서 뭔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시도였지만, 오래 살 부비고 살아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란 언제나처럼 어렵다.

 

남편의 얼굴에서 다시 신문을 걷어냈다.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튄다. 

 

“회사일만 신경 쓰기에도 힘들어. 회사는 전쟁터나 다름없다는 거 몰라? 집안일과 애들 일은 당신이 좀 알아서 해. 그게 내조지 별게 내조냐. 피곤해 죽겠어. 잠 좀 자게 내버려 둬!

 

자연의 숲에서 아물어가던 상처는 다시 고개를 내민다. 마음에 가시를 박은 채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걷는 게 상책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고 냇가를 지나고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언덕 양편으로 잎이 무성한 녹색나무와 눈맞춤을 한다. 손을 내밀자 초록의 층층나무 이파리가 내 손 안으로 주저없이 들어온다. 그러자 나무의 수액이 내 팔뚝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늑하고 촉촉해진다. 층층나무에 기대서 생각한다. 층층나무야 말해주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남녀가 한 지붕 밑에 산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내가 만약 너라면, 네가 만약 나라면, 입장을 바꾸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

 

녹색 숲은 최음제나 다름없었다. 로맨틱한 느낌에 젖어들자 남편을 운명처럼 만나던 날이 떠오른다.

 

 

 

        2.

 

인희는 처녀시절, H주류회사 홍보과 직원이었다. 기획실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특별 영업 전략으로 제주 올레길 이벤트 사업을 추진한다는 기획안이었다. 전국적으로 신청자를 모아 제비뽑기로 스무 명을 채택하여 2 3, 교통비 및 숙박을 무료로 제주 올레 길을 여행할 수 있는 행운을 주는 이벤트였다.

 

민기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2 3일 무료 제주 올레길 여행이 탐나서 신청을 하고 행운권 추첨을 하는 날, H주류회사 리셉션 실에 도착했다.

 

기획실장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고 홍보실장의 우스갯말이 무료여행자의 꿈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냈다. 

 

홍보실장은 ‘나는 인생에게 몇 번이나 술을 사주었지만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더라’는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인생과 술잔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제주 올레길 행운 이벤트에 당첨되시면 술 한 잔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제주 올레길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확 트일 것입니다. 술을 권하는 사회, 술을 강요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죠. 긴 노동 끝에 떠나는 여행, 즐겁죠. 여행지에서 즐거움으로 마시는 감로수 같은 술은 보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부터 행운권 추첨을 하겠습니다. 추첨을 해주실 분, 우리 회사 홍보실 대리, 박인희 씨를 소개합니다.

 

박수소리 요란했다. 인희는 168센티미터,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듯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2백 명 가까이 모여들었다.

 

인희는 추첨함 앞에 서서 보조개가 파인 귀여운 얼굴을 방긋거리며 말했다.

 

“술은 거울입니다. 거짓말을 못하죠. 이번 행운권 당첨하시는 분들은 술의 참맛을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갈증을 위해서 한 잔, 소통을 위해서 두 잔, 사랑을 위해서 석 잔이죠. 행운의 주인공들께서는 이번 여행길에 로망도 더불어 꿈꾸시기 바랍니다.

 

행운권 넘버가 불려질 때마다 환호가 터져나왔다. 19명까지 불렀을 때  바로 인희 앞에서 양 겨드랑이에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던 민기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하도 간절하여 어떻게든 행운을 선물하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의 용모가 너무 수려해서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인희는 일하는 재미에 나이테 굵어지는 것도 몰랐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가버렸다. 연애의 재미란 할 일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고 있던 터라서 민기가 인희의 눈에 들어온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민기의 이마는 환하고 눈썹은 짙고 콧날은 우뚝하고 눈매는 예리하게 빛났으며 입술은 야무지게 닫혀있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지막 호명에 민기가 주먹 쥔 팔을 들어 올리며 대박!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제주시 S동 오로라 팬션에 여장을 풀었다.

 

첫날은 점심식사를 간단히 하고 제1코스인 오름과 바다 올레길을 걷기로 되어 있었다. 푸른 들판을 지나고 검은 돌담 밭길이 끝나고 말미오름에 오르자 피톤치드 향이 온몸의 노폐물을 빠지게 한 탓인지 구름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듯 가볍고 상쾌했다. 부드러운 능선의 알 오름을 올랐을 때는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색색의 천을 곱게 기워 붙인 조각보처럼 환상적이었다. 종달리 소금밭을 지나 억새밭 앞에서 인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고 뭐라고 하지 마라. 다 제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려니. 일행은 수마포 해변 가 식당에서 광어 매운탕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밤에는 로맨틱한 펜션 앞 가든에서 음악의 밤이 열렸다. 매력적인 아티스트가 ‘러브 미 텐더’를 연주했다. 연주가 무르익을 무렵 남녀가 하나 둘 나와 가슴 속에 성냥불 감추어둔 듯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박인희 대리님도 한번 신명나게 흔들어 보세요. 늘씬한 몸매 한 춤 하실 거 같은데요.

 

누군가 인희를 공연장 한가운데로 잡아끌었다. 좀 망설이기는 했지만 이벤트 담당자가 분위기를 깬다면 끝장이다, 현대의 매력적인 여성이란 다소곳이 얌전빼는 내숭형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맞게 반응하는 여자다. 인희는 민기와 댄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가슴이 부풀어있었다. 기대처럼 민기는 부응하지 않았고 뜻밖에도 볼품없이 배가 나온 뜻밖의 남자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희 앞으로 다가왔다.

 

말미오름을 올라 수마포 해변을 거닐도록 인희는 민기와 별다른 감정 없이 이벤트 담당자와 신청자로서 가끔 마주치면 호의적인 눈길만 주고받는 정도였다. 별빛이 쏟아져내리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막상 일행 중의 뚱뚱한 남자와 인희가 손을 맞잡고 리듬에 맞춰 춤추는 동안 민기는 양손을 겨드랑이에 낀 채 생전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눈길로 바라보았다. 못마땅한 표정에 질투도 약간 섞인 듯한 얼굴로 탁자위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민기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천지연 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타고 민기가 마지막으로 타는 걸 확인하고 인희가 탔다. 남자가 뒷자리에 앉자 인희는 시침 뚝 떼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차창 너머 4월이 헤픈 몸짓을 하고 있었다. 시인은 4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거지? 죽은 땅에서 꽃을 피워 올리는 강인함을 독하다고 그렇게 표현한 건가? 승합차 차창 너머 길가에는 겨울을 이겨낸 봄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었다.

 

“어제 말미오름길 걷는 거 즐거웠나요?

 

인희가 어색함을 깨려고 물었다. 남자는 말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차창 너머 벚꽃을 바라보고 있으니 팝콘 먹으며 로맨틱한 영화를 같이 보는 연인들의 터질 듯한 농밀함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상쩍은 감정이었다. 꽃비처럼 떨어져내린 벚꽃 바라보기만 해도 대책 없이 좋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민기가 불쑥 내뱉는다.

 

“벚꽃은 왜 저렇게 방만한 거죠? 다른 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킬 기세네요. 벚꽃은 일본 국환데 말이죠.   

 

허리에 찬 작은 손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키며 민기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요? 제주도가 원래 벚꽃 태생지에요. 일본인들이 슬쩍 훔쳐가 우습게도 그 나라 국화가 돼버리고 말았지만요. 그냥 꽃으로 봐주세요.

 

민기가 얼굴을 붉히는 바람에 인희는 딴전을 부렸다.

 

앞좌석에 앉은 일행들이 슬쩍 뒤돌아 씩 웃으며 뒷자리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진 민기와 인희는 천지연 폭포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일행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 중이라는 거 잊었어요? 이벤트사업 나온거지 연애사업 하라고 보낸 거 아닙니다. 명심하기 바랍니다.

 

홍보실장이 눈치를 주자 인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희는 미니 손가방에서 고글 선글라스를 꺼냈다. 봄볕에 그을리면 임도 못 알아본다고 했던가.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임도 없는 주제에 무슨 걱정이람. 입가에 웃음을 깨물며 선글라스를 낀다. 손거울을 들여다보자 왠지 은밀한 유혹 같은 게 기다려지기도 했다. 인희는 일부러 남자와 떨어져 다른 일행 곁으로 다가갔다. 자유시간이 한 시간 정도 주어졌다. 인희는 민기와 데이트하고 싶었지만 일행은 폭포에서 벗어나 산으로 오르는 길 쪽으로 난, 유채꽃밭을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유채꽃을 배경으로 선글라스를 그냥 끼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는 사진이란 투명한 느낌이 없어 꽃밭 깊숙이 들어가 선글라스를 머리에 헤어밴드처럼 올리고 몇 군데에서 사진을 더 찍었다.

 

찰칵 셔터 누르는 순간, 시간이 정지되는 소리가 들렸다. 가두어두고 싶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터였다. 인희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아쉬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추억하기 위하여 찰칵 소리가 날 때마다 인희는 내내 민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일행이 유채밭에서 나와 다시 천지연 폭포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돌하루방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걸 보고  돌하루방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돌하루방에 남기고 바로 옆 풀밭에 잠시 앉아 쉬면서 일행은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내려가면서 머리에 밴드로 걸었던 선글라스가 없어진 걸 알았다.

 

“어머나! 이걸 어째! 딱 한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건데.  

 

마침 식당 창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민기와 딱 마주쳤다.

 

“재미 좋았습니까?

 

“재미는 무슨, 왠지 가기 싫더라니, 선글라스 잃어버리려고 그랬나 봐요. 그거 아주 비싼 선글라슨데.

 

“어디서 잃어버렸는데요?

 

“몰라요. 유채꽃밭에서 흘렸는지 거기서 나와 폭포로 오는 길 중간쯤 돌하루방 옆 풀밭에서 잠시 쉬었는데.

 

“잘 잃어버렸어요. 그 선글라스 박인희 씨한테 어울리지 않았어요. 안경이 주인을 잘못 찾아갔으니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겠는가 말이지.

 

민기는 약올리 듯 내뱉으며 카운터에서 이쑤시개를 빼가지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인희는 속이 부글거렸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적당히 솔직해야지 너무 솔직하면 야만이라는 거 모르나! 인희는 무안한 마음 어쩌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민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안경 탓인지 입맛도 떨어졌다. 아침식사는 간단히 토스트 한쪽에 커피 한 잔을 놓고 홍보실장과 마주앉아 있었다.

 

“안경 잃어버렸다면서요? 그러니 왜 정신 줄 놓고 있습니까? 공과 사는 좀 구별합시다.

 

“그까짓 안경 나 싫다고 도망간 거. 어울리는 주인 찾아가라 그래요. 다시 맞추면 되죠 뭐. 덕분에 안경점 주인 매상 올리니 그 사람한테는 좋은 소식이잖아요. 

 

홍보실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품하듯 웃었다. 이제 2박의 일정을 끝내고 1시간 정도 자유시간 후에 식물원으로 이동하여 관람한 후 제주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면 끝이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인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승말뚝이 박혀진 둑길을 봄비 맞으며 걷고 있었다.  

 

“왜 이렇게 덤벙거려요? 자칫하다 언덕에서 구르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그리고 요즈음 비는 산성비라서 함부로 맞으면 곤란해요. 아무리 낭만도 좋지만.

 

낯익은 목소리에 인희는 너무 놀라 빗길에 넘어질 뻔했다. 발이 접질러졌는지 발목이 시큰거렸다. 누가 따라오는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터라 가슴이 벌렁거렸다. 봄비 내리는 소리만 촉촉이 인희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박인희 대리님, 남자친구는 피곤하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 할 테니 말입니다. 천방지축에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단 말입니다.

 

“단면만 보니까 그렇죠. 사람이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 아니거든요. 슬퍼도 웃을 때가 있고, 우울해도 농담 하고, 빈틈없이 문을 닫아걸 때도 있고, 터무니없이 문을 열고 싶은 날도 있고. 사람이 참 복잡 미묘한 동물이거든요. 단정은 금물. 그리고 나 싫다고 떠난 선글라스 따위 이제 미련 없어요.  

 

민기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글 선글라스를 인희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앗! 선글라스가 어떻게 민기 씨 손에?

 

“어제 저녁 식사 후에 유채꽃밭을 샅샅이 뒤졌어요. 내 허리 지금 수난 중이라는 거 명심해요. 미니 플래시 들고 한 시간을 뒤져도 없더니 돌하루방 옆 풀밭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발을 다친 모양인데 그냥 걸으면 힘들어져요.

 

민기는 인희 앞에 단단한 등을 보이며 무릎을 접고 앉았다.

 

“업혀요. 우리 스케줄에 지장 생길까 봐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업히란말입니다.

 

인희는 못이기는 척 민기의 등에 업혔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남자의 등. 넓고 단단한 등은 포근하고 편안했다. 이제부터 신세계를 탐험해야겠다. 어찌 이런 진국을 놓칠까 보냐, 놓치면 정말 바보지. 인희는 식물원 관람하면서 문자로 망설임 없이 민기한테 사랑을 고백했다.

 

돌 하나도 사랑이 되고 풀 하나도 사랑이 된다는 제주, 올레길 이벤트에서 맺은 인연으로 민기와 인희는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제주 올레길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신랑 신부는 연애 333일 만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 환상의 커플입니다. 신부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네요. 성격이 운명을 만드는 거 증명한 셈이죠. 신부의 적극적이고 여유로운 성격이 이처럼 믿음직하고 멋진 남자를 평생 동반자로 맞이하게 된 겁니다.

 

 

        3.

 

결혼식장에서 들었던 주례사가 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간다.

 

지난 추억에 잠겨있는 동안 불룩한 배가 갑자기 심하게 요동을 친다. 어떤 인물이 나오려고 이렇게 심하게 발길질이야. 또 아들인가? 딸이면 좋겠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막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는 중이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았다. 남편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실은 이번 차장 진급에서 누락될 거 같아.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열심히 했는데 말이야. 이사 오기 전 날, 승연이 다치던 날 말이야. 인사부장하고 술 한 잔 나누다가 알게 됐어. 분명히 내가 승진할 거라고 암시를 준 적이 있는데 갑자기 상황이 달라져서 말이야. 낙하산 인사라는 거 때문에 내가 밀려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 그 날, 너무 예민해져서 그런 거니 당신이 이해해줘! 이번에 승진하면 둘째 낳고 나서 제주도 올레길 여행이나 다녀올까 했었는데. 당신한테 내가 잘못 했어.

 

“텔레파시가 통했나 봐. 나도 우리 처음 만나던 제주 올레길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어. 승진이야 뭐 그리 신경쓸 일인가? 빨리빨리 진급하면 빨리 명퇴당할 일밖에 더 있어? 느긋하게 월급 받아가며 그냥 우리 즐겁게 살면 그게 대박이지.

 

살다가 목마를 때 가끔 끄집어내어 목을 축이라고 추억은 존재하는 거란다. 

 

이혼은 무슨 이혼이야. 이혼한다고 무슨 별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 뱃속 아이가 또 힘껏 발길질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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