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마을 소식들

"출연료 안 받아도 이렇게 뿌듯하다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2. 25. 21:42

"출연료 안 받아도 이렇게 뿌듯하다니…"

입력 : 2016.02.24 03:00

- 영화 '귀향' 재능기부한 손숙
"53년째 연극 무대 지킨 배우로서 위안부 실상 알려야 한다고 생각… 수익금 받으면 전액 기부할 것"

배우 손숙(72)은 2년 전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영화감독 조정래"라고 자신을 밝힌 남성은 "시나리오를 댁으로 보냈으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한번 훑어나 보자고 펼쳐든 시나리오를 읽다 말고 손숙은 한참 울었다. 글자만 따라가는 데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며칠 후 한달음에 달려온 조 감독은 "2002년에 대본을 완성해 10년 넘게 만지고 있다"며 손숙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저 이거 꼭 해야 합니다. 투자자는 외면하고 출연도 여러 번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반드시 할 겁니다. 도와주세요."

영화‘귀향’에 무보수로 출연한 배우 손숙은“러닝 개런티를 받으면 전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영화‘귀향’에 무보수로 출연한 배우 손숙은“러닝 개런티를 받으면 전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성형주 기자

 

조 감독이 그토록 만들고 싶다던 영화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출연료는 많이 못 드리지만…"이라며 고개를 숙이는 감독에게 손숙이 먼저 말했다. "출연료는 안 받을게요. 대신 영화가 잘되면 러닝 개런티(흥행 성적에 따라 배분되는 수익금)를 주세요. 제 재능과 개런티를 이번 기회에 위안부 피해자 분들을 위해 기부하고 싶어요."

24일 개봉하는 영화 '귀향'에서 53년차 대배우 손숙은 주인공 영희의 노역(老役)으로 나온다. 영희는 경상북도 상주에 살다 열다섯 살 때 위안소로 끌려간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 나타난 손숙은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제게도 적잖은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저라고 단번에 결정할 수 있었겠어요?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제이고 역할도 부담스럽죠. 그럴수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50년 넘게 무대를 지켰으니 배우로서 사명이랄까, 책임감이 들었어요. 배우가 세상이 나아지도록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겠어요?"

영화 '귀향'의 한장면. 

 

영화 '귀향'의 한장면. /시네드에피 제공

 

손숙이 출연을 승낙하고 여러 배역이 잇따라 정해지고도 영화는 크랭크인까지 여러 번 좌초 위기를 겪었다. 조 감독이 찾아가는 투자사와 기획사마다 손사래를 쳤다. "이런 영화를? 미쳤습니까?"라는 반응은 보통이고 "위안부? 그거 다 지어낸 얘기 아니오?"라는 이도 있었다. 손숙은 "투자비를 모으지 못해 영화가 미뤄지다 보니 조 감독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이 '두 달 있다'였다"고 했다. "선생님 두 달 있다 연락 드릴게요, 두 달 있다, 두 달 있다…. 그러다 1년 반이 갔어요. 엎어지는구나 했는데 1년 전쯤에 '정말 합니다'라고 연락이 왔어요. 어찌나 반갑던지." 투자사가 외면한 제작비는 인터넷과 SNS를 통한 대중 모금(크라우드 펀딩)으로 충당했다. 총 7만5270명이 참여해 12억원이 모였다. 영국에 사는 손숙의 조카도 100만원을 보탰다. 지방에 산다는 주유소 사장님은 10만원을 보냈고, 어느 재일교포는 저금을 탈탈 털어 부쳤다.

촬영 기간 손숙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 객관적인 거리를 둬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어려웠던 촬영은 동사무소 신고 장면이었다. 할머니가 된 영희는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라는 공지를 받고 동사무소에 갔다가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다. "누가 신고하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무심코 하는 말에 영희는 "그래, 내가 미친 ×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분들이 스스로 '미친×'이라고 자조하게 만든 우리의 역사가 촬영 내내 가슴을 후벼 팠다"고 말했다.

'귀향'이 순익을 내고, 손숙이 고대하는 기부를 하게 되려면 최소한 관객 60만명이 들어야 한다. 손숙은 "일본에 책임을 물으려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보고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재미로 보는 영화도 있지만 의미로 봐야 하는 작품도 있는 거 아닌가요. 분통만 터뜨리고 있다고 일본이 저절로 반성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