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긴 일획을 남길 수 있을까? - 지렁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6. 14:37

긴 일획을 남길 수 있을까?

신경숙(시인)

 

작년 10월의 마지막 밤 이후, 담아두는 일은 밀어놓고 살았다. 책을 펼쳤다가 한 줄을 제대로 마음판에 새기지 못하고 덮어두길 반복한다. 수 년의 밤을 새우고 만들었을 문우들의 소중한 시집을 곱게 모셔두고 정성들여 물질할 날을 정하고 있다.

첫 시집 출간 후 십여 년을 방황하다 두 번째 시집을 만들었다. 그 병이 도졌나보다. 신나게 비워내지도 못했는데 벌서 한 해가 지났다. 이젠 여백과 마주치기가 두렵다.

 

나호열 시인의 지렁이를 만난 건 지난 6월의 모친상 장례식장에서였다. 아마 그 때는 신종 바이러스 '메리스' 때문에 사람이 모인 장소에는 가지 않는 풍조였다. 하지만, 시인이 여러 해, 모친을 향한 효심과 성품을 잘 알기에 문우와 함께 가기를 자청했다. 문상 후 출간한 『촉도』에 친필로 '恒心 詩心!' 을 적어 주셨는데 늘 마음에 남는다.

 

지렁이의 몸은 반지같은 체철 體節이 여러 개로 이루어져 체절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피부가 자갈과 모래와 흙을 다 받아내며 꿈틀거리며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주변인 같고 외톨이 같이 느껴진다. 유행하는 스타일의 폼나는 옷을 입지 않았지만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겹의 복근을 자랑하는 유연한 몸으로 굴을 파고 토양에 공기를 유통시키며, 배수를 촉진하고, 유기물질을 굴에 넣어 영양이 풍부한 물질을 식물에게 제공하는 맨살의 지렁이. 비갠 후 몸을 접어 긴 일획을 남기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도, 빛과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사는, 천형이라 생각 안 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모습이다. 이 땅의 머리로 살아가는 이들이 남긴 분비물이 국세를 낭비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로, 광화문 광장을 시위현장으로 만든다. 이런저런 일로 심난한 이 때, 나호열 시인의 「지렁이」를 펼쳐보며 내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살핀다.

 

긴 일획을 남가지 못해도 주변인에게 공기를 제공하고 배수를 돕는 항심恒心을 잃지 않기를, 또한 오랫동안 비운 마음에 시심 詩心이 채워지기를 기원한다.

 

계간 『시와 산문』 2015년 겨울호

 

지렁이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 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향일성의 빈 손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치장스러운 몇 겁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 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 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

온 몸을 꿈틀거리며 긴 일획을 남기며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