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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활의 경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5. 00:42

자연과 생활의 경계

함종호

 

한때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의 감각은 온통 자연을 향해 열려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자연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자연이요, 맛이나 향기 등도 모두 자연을 경험하는 것에 바쳐졌다.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지닌 사람들은 자연물에 적극적인 반을을 보였으며 그 결과 감각적인 인상의 세계를 시적으로 새롭게 창조해내곤 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 시인들이 시로 읊었던 자연은 인간세계와 조화를 이뤄 하나의 일체된 세계를 구성했다. 바라보는 주체도, 보이는 대상도 하나로 혼융된 세계였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고, 인간의 삶과 생활의 터전 또한 자연이었다.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 균열이 가해진 것은 비단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자연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 비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대한 균열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급기야 이제는 자연의 괴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놓여 있다. 이제 자연과 인간 간의 조화와 융합의 모습은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이에 발맞춰 자연은 인간세계에 종속된 채 그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인간)와 보이는 대상(자연)간의 뚜렷한 구별이 이루어졌고, 보이는 대상은 인간의 사고와 인식 결과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해졌다. 이는 시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의 시인들은 자연물로써의 대상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몸으로 느끼고 체화했다. 그러나 자연세계와 인간세계가 철저히 구분되고 분리된 현시대에서 자연물은 시인의 사유를 따라 관념의 한 끝자락을 잡고 의미의 표면을 미끄러지며 부유한다.

 

 나호열의 시집 『촉도』에 등장하는 자연물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편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연물은 어디까지나 보조관념으로써 주어져 있으며, 이는 시인의 사유와 인식을 가져오는 매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통적인 상징성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 때 집이었고

기둥이었던 폐기물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둔탁한 광물의 알 속에서

밤새 얼룩진 기도를 마친

순례자처럼

붉은 눈물의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다

누구는 스모그라 하고

누구는 먼지라고 호명하는

새들의 뒤를

몇 점 구름이 수호자가 되어

뒤따르고 있다

버려진 폐기물들은 다시 한 번

더 버려진다

 

구름의 집이라는 낭만의 집

그러나 구름은 집이 없다

몸통은 없고

날개만 퍼덕이는

하루살이처럼

 

- 「구름의 집」 전문

 

 자연적인 대상에 천착한 시들은 그것 안에 고유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의 상징적인 의미란, 대개 전통과 관습에 기반을 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나호열의 경우, 자연물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의 현장을 대변하는 보조적인 수단에 해당하며, 생활세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한다. 가령 위의 시 구름의 집에서 자연물인 ‘새’는 ‘폐기물’ 더미 위를 날아가고, 그런 ‘새’를 뒤따르는 ‘구름’은 그 실체가 ‘스모그’ 또는 ‘먼지’인 것이다. 전통과 관습의 차원에서 ‘새’와 ‘구름’ 등은 자연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에의 관조 내지는 자연과의 합일을 그리는 주요 소재로 흔히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묘사된 시편의 경우 흔히 자연물과 시적 화자 간의 물리적인 거리는 어느덧 상쇄되고 동일화가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위 시의 경우 이들은 자연세계와 대척점에 선 산업사회와 같은 인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이나 들과 같은 자연적 배경이 아닌, 폐기물 더미 위를 날아가는 새의 모습에서 부조화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새를 뒤따르는 것이 ‘스모그’와 ‘먼지’ 등 산업화된 생활세계의 잔재들인 것으로 보아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의 관습적 상징의 체계 안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낭만’의 요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산업화된 생활세계를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새는 비극적인 정서를 극대화 시킨다.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글어져 사라져도

용케 살아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주고

비바람 막아주며 죽은 듯

삼백년 벼락 맞고도 살아 있더니

이 편한 세상에

한 그루 정원수로 팔려 왔다

 

푸르기는 하나 완강한 철책에 둘러싸여

손길 닿지 않는 그 만큼의 거리

저 불편한 세상과

이 편한 세상 사이에서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침묵의 우두커니

 

새 한 마리 깃들지 않은 이 곳

집과 무덤 사이의 어디쯤이다

 

- 「이사」 전문

 

나호열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이 비극적인 정서를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연물이 자연세계에 놓여 있지 않고 인간의 인위적인 생활세계와 직접 관계하기 때문이다. 구름의 집에서의 자연물 ‘새’가 ‘버려진 폐기물’을 배경으로 날아오를 때, 그것은 ‘스모그’와 ‘먼지’들과 관계한다. 이 과정에서 비극적 정서가 야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사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저 불편한 세계’로 대표되는 자연세계로부터 ‘ 이 편한 세상’- 이는 획일화된 인간의 주거공간(아파트)의 특정 브랜드를 연상시킨다 - 으로 대표되는 인간세계로 나무 한 그루가 ‘이사’를 왔다. 이사 오기 전 그 나무는 “마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줄 정도로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능동적인 소통을 꾀했던 것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 이 편한 세상’으로 이사온 후로는 ‘완강한 철책’에 가로막혀 “눈이 멀고”, “귀가 막히”는 등 소통이 원칙으로 차단되었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감시, 그리고 편안함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등이 ‘ 이 편한 세상’으로 이사 온 나무에게 놓인 상황인 것이다. 「이사」에서의 이와 같은 시적 정황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회의를 갖도록 만든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감시, 그리고 편안함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등은 우리네 삶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향일성의 빈 손 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치장스러운 몇 겁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 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 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

온 몸을 꿈틀거리며 긴 일획을 남기며 가고 있다.

 

- 「지렁이」 전문

 

앞서 소개한 시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호열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은 더 이상 아름답거나 자족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천하고 비루한 것에 더 가깝다. 여기서 시적 대상에 내재된 비천함과 비루함은 자연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연세계와 인간세계 간의 명확한 분리와 구분, 그리고 그러한 경계 짓기의 철저함 속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마치 “허물을 벗”거나 , “탈을 뒤집어 쓰”는 일 없이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는 ‘지하생활자’로서의 ‘천형’을 살아가는 ‘지렁이’처럼, 이때의 비천함과 비루함은 숙명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지렁이’에게서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와 같은 존재의 심연으로 끊임없이 빠져든다. 그것은 적어도 부끄러운 삶은 살아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약속’인 것이다.

 

사그락거리는 내 몸이 배운 단어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별이다

모래시계 속에서 낙하하는 별들을

또 한 마디로 더 줄이면 바람이다

바람 속에 숨어있는 둥지 안에는

아직 내가 배우지 못한 단어가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낡아가고

그 알은 익어가고

단어장에 마지막으로 배운 그 말

푸른 잉크에 묻혀 나올 때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

먹물 같은 그림자를 남긴다․

 

사랑이라는 말

 

- 「낡아가고... 익어가고」 전문

이 시 「낡아가고... 익어가고」에서 부끄러운 삶을 경계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별’,‘바람’,‘새’등의 자연물과 관계 맺으며 변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지치지 않고 영원히 경주되며, 자신이 몸으로 배운 한 마디의 단어인 ‘사랑’을 지향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품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지향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이는 그 말이 “푸른 잉크에 묻혀 나올 때”, “먹물 같은 그림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왜 하필 ‘푸른 잉크’이고, ‘먹물 같은 그림자’일까. 시적 화자가 관조하는 ‘새’ 그리고 ‘새’로 대표되는 자연물로써의 시적 대상은 아직 자연세계와 인간이 생활세계가 철저히 분리되고 구분된 세계의 경계선에 서서 이 두 세계 사이를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함종호

문학박사. 서울시립대학교 강의전담교수. 저서 『시․ 영화 ․이미지』, 『글쓰기 차별화 전략』(공저)가 있음.

- 계간 『시와 산문』 201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