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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열정 - 나호열의 『촉도(蜀道)』/박진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9. 27. 22:34

현실의 상처를 건너가는 두 가지 경로

박 진 희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을 단선적인 몇 가지 요인으로 밝힐 수는 없을 것이나 그것이 대체로 충족이 아닌 결핍에서, 행복이 아닌 불화와 상처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의 상처이든 시대적 혹은 존재론적 차원의 그것이든, 이에 대한 사유와 통찰, 치유를 향한 탐구 과정이 시의 존재 방식 중 하나인 것이다.

 

나호열의 『촉도』와 김용화의 『루루를 위한 세레나데』를 관류하는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찾아진다. 나호열의 시에서 인식되는 세계는 살고자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촉도」)이며 김용화의 시에서 그것은 “평생 밥 찾아 떠돌다 밥이 되어 죽는”(「밥 앞에서의 명상」) 존재들의 실존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들 시에서 상처는 존재론적이고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시적인 부드러움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사유하고, 사소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존재의 의미를 통찰하고 있는 것 또한 두 시인의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통찰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물질 인간과 동물 등, 인간과 존재와의 관계를 성찰하게 되고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가 폐기해버리거나 잃어버린 가치와 마주하게 된다.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열정 - 나호열의 『촉도(蜀道)』

 

‘껌’, ‘틀니’, ‘담쟁이’, ‘지렁이’, ‘지하철’ 등 나호열 시의 시적 대상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로, 시인은 이들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대 사회의 익명성이나 물질성, 그로 인해 발생되는 존재의 소외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나호열의 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에 경도되어 있다기보다는 존재론적인 탐구와 성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눈길 닿지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보자기의 꿈」) 주변적 존재에 대한 따듯한 시선 또한 보여주고 있다.

 

안산행 지하철 지금 막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오후 2시에서 3시를 향하여/지팡이로 더듬거리며 한 사나이 마지막 칸을 향하여/걸음을 옮기고 있다/어두운 물방울들이 합쳐지지 않은 채 굉음을 내며/지난 신문을 읽거나 졸고 있다/마지막 칸까지 갔던 사나이가 빈 동전 바구니를 흔들면서/오후 2시와 3시 사이를/혜화역과 동대문 역 사이를/머리와 꼬리 사이를 지팡이로 내리치면서 지나간다/동굴은 철갑으로 둘러싸인 물방울들이/서로 부딪칠 때마다 내는 날카로운 비명 때문에 더욱 어두워진다/내려야 할 곳을 잊지 않으려면 눈이 좋거나 귀가 밝아야 하는데/굉음이며 비명인 물방울들은 눈이 멀었다/빨리 이 생을 지나치고 싶은 어떤 날/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치고 싶은 어떤 날

-「어디로 가고 있나」전문

 

위 시는 “오후 2시와 3시 사이”, “혜화역과 동대문역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안산행 지하철” 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하철 승객들은 “신문을 읽거나 졸고 있”고 구걸을 하는 ‘사나이’가 지하철 칸칸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다니고 있는 등 흔한 일상의 광경 중 하나가 시의 소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승객은 “어두운 물방울”로 표상되고 있다. 이 ‘물방울’들은 “철갑으로 둘러싸”여 결코 “합쳐지지 않”으며 “서로 부딪칠 때마다” 비명과 굉음을 내기도 한다. 이들은 눈까지 멀어있어 결국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가게 될 것이다.

승객이 현대인에 대한 메타포라면 익숙한 지하철 안 풍경은 현대사회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관계와 그로인한 상처, 소외 등을 ‘비명’과 ‘굉음’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보다 근원적인 것에 놓여 있는데,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이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해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적 자아 또한 “철갑으로 둘러 싸”여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는 존재들과 같은 현실에 처해있는 공동운명체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동천 눈물주머니를 꿰뚫었는지/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시인들은 역으로 나가 시를 읊었다//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길고 길었다//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매운 눈물이 된다//아, 불타는 시

-「불타는 시詩」 전문

 

 

인용한 시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실에 있어서 시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 포스티노(Il Postino)’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이 영화에도 소개된 바 있는 작품 「시」에서 스스로가 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는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어떤 길거리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자신을 불렀다고 했다. 시가 그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 모든 것이 ‘아닐’ 수도, 역으로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목소리’이기도 하면서, ‘말’이기도 하고, 그리고 ‘침묵’이기도 한 것이 시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인용시의 소재들인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 ‘역’, ‘촛불’, ‘노숙자’ 등등은 우리 사회를 표상하는 대표적 상관물들이라 할 수 있다. “동천 눈물주머니를 꿰뚫었”다는 표현에서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에 대한 연민과 슬픔, 분노 등이 느껴진다. 이러한 정서의 발현은 자연스럽게 ‘역’, ‘촛불’ 등의 시적 대상에서 시위나 시민 문화제의 현장을 유추하게 한다. “시인들이 역으로 나가 시를 읊”는 행위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할 때 시는 그 어떤 구호보다도 가슴에 울림을 주는 우렁찬 ‘목소리’가 되며 공감과 연대를 이끄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은 ‘노숙자’와의 연계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수 없는 ‘노숙자’의 전생이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은 아니었을까. 이들에게 시는 ‘목소리’나 ‘말’로 매개될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딱딱한 베개”, 혹은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나 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할 때 시는 ‘침묵’이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는 “발밑에 짓이겨지”고 지상에서 불타고 있는 ‘침묵의 시’는 “가벼운 재로 승천”하여 종국에는 “매운 눈물”이 되고 만다.

위 시는 시가 어떻게 삶 속에 스며들 수 있는가를 묘파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복되는 삶들이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고 시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시인의 사유 때문이다. 인용시는 시가 ‘현실 너머의 무엇’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을 때, 혹은 ‘시’라는 권위를 내려놓을 때, 삶 속으로 성큼 들어설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촉도’라는, 파편화된 세계 상처의 세계를 건너가는 시인의 전략은 무엇일까. 그는 두 가지의 길을 예비해 두고 있다. 그 하나가 능동적으로 ‘주변인’, ‘외톨이’로 되는 일이다.

 

천형은 아니었다/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뿔 달린 머리도/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바늘구멍 같은 몸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보다/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허물을 벗을 일도/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온몸을 밀어 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온몸을 꿈틀거리며 긴 일획을 남기며 가고 있다

-「지렁이」전문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이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낼 뿐, 결코 채워지지 않는 현대인의 허황된 욕망을 표상한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에 매달려 “뿔 달린 머리”를 “함부로 내밀”거나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않기 위하여 ‘천형’이 아니라 스스로 “지하생활자”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쏜살같이 달려가”봤자 “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임을 아는 까닭이다.

 

시인은 ‘촉도’를 건너가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며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하는 태도, ‘주변인’, ‘외톨이’로 불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온몸을 꿈틀거”려서라도 기꺼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런 자세는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모두 드러나 있는 ‘밝음’이 아니라 드러나 있지 않은 진실, ‘아니’고 ‘모르’는 “어둠의 세상”을 향한 사유를 지향함으로써 추동되는 것이다.

이처럼 능동적으로 ‘주변인’, ‘외톨이’가 되는 것이 ‘촉도’를 건너는 하나의 태도라면 또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가 발전을 담보로 끊임없이 포기해 온 가치들에 대한 추구로 드러난다.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어두운 생각 무거워/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그 말씀들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화로 같은 가슴에 모으기 위해/기꺼이 빗자루를 든다//누군가 물었다/성자가 된 청소부는 누구이며/청소부로 살다 성자 된 이는 또 누구인가//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리라/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돋아 오르는 새싹을/그 숨결을/당신은 비질하겠는가/아니면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 들겠는가

-「성자와 청소부」 전문

 

‘하늘’과 ‘지상’, ‘성자’와 ‘청소부’, ‘말씀’과 ‘쓰레기’ 등 위 시는 제목에서부터 전체에 걸쳐 성(聖)/속(俗), 혹은 귀(貴)/천(賤)이라는, 의미의 이항대립적인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구도는 표층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 대립의 경계는 끊임없이 무화되고 있다. “지상에서의 쓰레기”는 곧 “하늘의 말씀”이고 ‘청소’는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으기 위해”서이며 “성자가 된 청소부”나 “청소부로 살다 성자 된 이”는 궁극적으로 등가로 의미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관계나 개념은 지금 여기의 질서 체계, 곧 일상의 현실을 대변한다. 반면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이나 ‘구름’의 “어두운 생각”, “돋아 오르는 새싹”의 ‘숨결’ 등은 여기에 포섭되지 않는 의미항들이다. 시인은 이를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것들”로 사유한다. 즉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이들과 같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은 지극히 쓸모가 없는, 따라서 ‘버려야’ 하는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비질하겠는가 아니면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 들겠는가”라는 물음은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지향을 상기토록 한다. 나아가 이는 또한 시인의 인간본성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망설이지 않고” 물을 수 있는 시적 자아의 태도에서 어떤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을 선택하든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이 시에서 ‘비질’은 “화로 같은 가슴”에 ‘말씀’들을 “모으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자가 된 청소부”의 겸허한 행위이자 ‘청소부’에서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싹의 숨결’을 ‘비질’하는 것과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 드는 것은 동일한 의미망에 속하는 행위들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하늘을 우러르는 맑고 그윽한 일”(「바람의 전언」)과 같은.

결국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쓸모없는 것들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는 시인이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촉도』에서 이러한 시의식과 주제를 발현하고 있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봇대에 기대어 하루 종일 개점휴업인/사내의 머리 위에 떨어질 듯 위태롭게 펄럭이는//칼 가세요//지나가는 바람이 심심한 듯 칼을/갈로 가는 동안//시퍼렇게 벼리고자 했던 몸이/스르르 한 세상 공중제비를 돌면서/이윽고 한 자루의 칼이/어떻게 가을이 되는지/저 홀로 부끄러워 낯 붉어지는/한 사내의 꿈

-「칼 가는 사내」전문

 

입시 전쟁, 취업 전쟁 등등 우리 사회가 각종 전쟁의 장이 되어온 지도 오래다. 칼을 갈아야만 살 수 있는 세계라는 점에서 “칼 가세요”라는 “사내의 머리 위에 떨어질 듯 위태롭게 펄럭이는” 호객 문구는 현대인의 삶을 추동하는 슬로건으로까지 의미가 확장된다. “전봇대에 기대어 하루 종일 개점휴업인 사내”의 ‘꿈’은 바로 ‘칼’을 많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내의 꿈’이 “부끄러워 낯 붉어”진다는 대목에서 “시퍼렇게 벼린” 날들은 결국 서로를 베는 흉기가 될 것임을 간취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칼’은 ‘갈’로, ‘갈’에서 다시 ‘가을’로 의미론적 변이를 거치게 된다. 시인의 탁월한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 ‘펄럭임’에 의해 ‘칼’자가 ‘갈’자로 보이는 순간을 시인은 “지나가는 바람이 칼을 갈로 간” 것으로 언어를 조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 “한 자루의 칼”이 “가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바람”은 바로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것에 속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 ‘칼’이 ‘가을’이 되는 과정은 쓸모없는 것들이 인간을 구원하는 그것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이 ‘쓸모없는 것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그락거리는 내 몸이 배운 단어들을/한 마디로 축약하면 별이다/모래시계 속에서 낙하하는 별들을/또 한 마디로 더 줄이면 바람이다/바람 속에 숨어있는 둥지 안에는/아직 내가 배우지 못한 단어가/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나는 낡아가고/그 알은 익어가고/단어장에 마지막으로 배운 그 말/푸른 잉크에 묻혀 나올 때/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먹물같은 그림자를 남긴다․//사랑이라는 말

-「낡아가고…… 익어가고」 전문

 

“몸이 배운 단어들”이란 바로 시적 자아의 삶 자체이다. 이를 축약하면 ‘별’이고 더 줄이면 ‘바람’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이들의 삶은 자연에서 비롯하여 자연으로 스며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시적 자아가 “아직 배우지 못한 단어”, “마지막으로” 배우게 될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육신이 “낡아가”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리적인 것들은 낡아갈 수밖에 없지만 ‘사랑’과 같은 초월적인 것들은 “무한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화되기를 기다리”며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화’된다고 해서 지닐 수 있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배우는 순간, 그것은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자유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또 한편으로는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전쟁을 치르고서야 전쟁 아닌 시간에 대해서 뉘우치는 것”(「생각하는 사람」)과 같이 진정한 사랑의 가치는 그것을 잃은 후에야 알게 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이 남기게 되는 “먹물같은 그림자”란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거역할 수 없는 슬픔”(「가슴이 운다」)인지도 모른다.

나호열은 그의 시에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것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실 그 너머의 것을 사유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쓸모없는 것들’이 그의 시세계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중심에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인’으로서의 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열정이 나호열 시의 요체라 할 수 있겠다.

*박진희

2009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저서 유치환 문힉과 아나키즘, 문화와 존재의 지평 등 대전대학교 강의전담교수

* 계간 『시와 정신』 201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