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화백과의 인연은 그가 신문사에 있던 1960년대 시작됐다. "우연한 자리에서 알게 됐는데 제가 입이 무겁다고 생각하셨던지 그 뒤로 사소한 고민도 얘기하곤 하셨지요. 미국 가시기 전에도 종종 광화문 '신원' 같은 일식집에서 점심 하며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며 그에겐 아무도 모르는 천 화백의 비밀이 쌓여 갔다. 김 화백은 "천 선생은 그 누구보다 자기 그림을 아껴 친한 화랑은 물론이고 친구한테도 그림을 거의 주지 않았다"며 "그것 때문에 '미인도' 사건이 그렇게 흘렀을지 모른다"고 했다.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이 터졌을 때 천 선생이 일이 이상하게 됐다며 하소연하셨어요. 사건 얼마 전에 한 화랑 주인이 (팔) 그림 좀 달라면서 고급 크리스털 잔 세트를 가지고 왔대요. 아무리 친한 사람한테도 그림을 잘 안 주는 천 선생이 이때도 못 주겠다며 크리스털 잔도 돌려보냈답니다. 화랑 주인이 그 자리에서 울더랍니다. 바로 그이가 나중에 미인도 사건 때 감정평가단에 포함됐어요." 당시 천 화백은 "내가 낳은 자식을 모르겠느냐"며 위작이라 했지만 감정평가단은 "진짜"라고 했다. "그때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셨어요. 그래서 말년이 그리된 거지요."
고위층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천 선생 장남이 모 대기업에 들어가서 선생이 아들 잘 봐달라고 풍경화를 회장에게 선물했어요. 그랬더니 그 회장이 '난 풍경보단 여자가 좋다'고 했대요. 선생이 어쩌겠냐 투덜대시며 여인 그림을 다시 그려 줬지요. 회장이 말한 여자란 게 그림이었는지 진짜 여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그는 천 화백이 "까칠한 구석은 있었지만 법 없어도 살 사람이어서 당하기도 여러 차례였다"고 했다. "한번은 화랑 통해 그림 샀단 사람이 선생 그림 정말 비싸더라며 가격을 얘기해줬대요. 그런데 그 가격이 화랑에서 자기한테 팔았다고 말한 금액과는 너무 차이가 큰 거라. 노발대발했더니 그 화랑 주인하고 남편이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더구려."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천 화백이 그림을 기증할 때 주선한 것도 그였다. 연회장에서 우연히 고건 당시 서울시장 옆에 앉았는데 옛 대법원 건물을 고쳐 미술관을 지을 건데 예산 부족으로 채울 게 없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 길로 절친했던 천 화백과 서울시에 다리를 놓았고 기증이 이뤄졌다.
"목숨처럼 아끼던 그림을 대중을 위해 내놓기로 결심한 거죠.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작업실에서 기증할 그림을 고르는데 선생이 그림 하나하나 끌어안고 얼마나 우시던지…."
그림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면 바로 절교 선언하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천 화백은 어김없이 술 한잔을 기울였다.
"강해 보여도 바스러질 듯 마음은 참 약하셨는데. 천 선생, 이제 그렇게 괴롭히는 인간들 없을 테니 편히 눈 감으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