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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받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5. 30. 14:51

재조명받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 박수근 작업실, 백남준 생가 … 예술혼 서린 ‘봉제 메카’

[중앙일보] 입력 2015.05.16 01:51 / 수정 2015.05.16 01:56

빈대떡집으로 바뀐 박수근 작업실
50주기 맞아 답사 프로그램 진행

           

서울성곽에서 바라본 종로구 창신동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 안에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가득하다. 사진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창신동은 옷감을 나르는 오토바이와 재봉틀 소리로 가득한 봉제 산업의 메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그만 빈대떡집 앞에 20여 명이 시위하듯 반원을 그리며 섰다. 집 앞 좁은 인도가 꽉 찼다. 일제히 집을 요리조리 바라보며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뭐가 있어요?”

 지난 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마련한 창신동 답사 프로그램 중에 있었던 일화다. DDP에서는 ‘박수근 50주기 기념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다음달 28일까지인데 전시와 연계해 매주 토요일 창신동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DDP와 창신동 그리고 박수근. 한데 어우러지지 않을 것만 같은 세 단어를 이어 붙이면 딱 떨어지는 말이 된다.

‘DDP에서 지척 거리에 있는 창신동 빈대떡집은 박수근의 옛 작업실이다’. DDP가 박수근 50주기 특별전 장소로 낙점된 배경이기도 하고, 전시장 밖 전시 프로그램으로 창신동 답사를 진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 창신동 393-16번지에는 빈대떡집과 공인중개사무소가 들어섰다. 이날 답사에 함께한 큰딸 박인숙(71)씨는 “옛 흔적으로 남은 건 처마 홈통밖에 없다”고 아쉬워했지만 60여 년 전 이 집은 원래 한 채였고 박수근의 다섯 가족이 살았다. 고향이 강원도 양구인 박수근은 6·25 때 서울로 피란 왔다 정착했다. 그림을 팔아 마련한 첫 서울집이 창신동 집이다. 그는 1952년부터 63년까지 창신동에서 살다 전농동으로 이사해 65년 작고했다. 대표작 대다수가 그의 작업실이었던 창신동 집 마루에서 나왔다. 농민 생활을 주로 그린 ‘밀레’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박수근은 주변을 관찰했고 우리네 일상을 그림으로 남겼다. 딸 박씨는 “저녁이면 아버지가 집 마루에 앉아 하모니카로 ‘뻐꾸기 왈츠’를 불면 어머니가 노래하고 삼남매가 손뼉 치던, 행복한 기억이 있는 곳이 창신동 집”이라고 말했다.

 답사의 선두에 선 해설사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였다. ‘유홍준과 함께하는 창신동 인문문화예술 답사’는 DDP에서 출발해 박수근 작업실-백남준 생가 등을 훑어봤다. 다음 답사로 창신·숭인 도시재생지원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 신중진(건축학) 교수의 ‘창신숭인, 장소의 혼과 도시재생’, 예비 사회적 기업 어반하이브리드의 ‘창신동대문 봉제 산업의 과거와 현재’가 기획되어 있다.

① 창신·숭인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반하이브리드 손경주 이사, 성균관대 신중진 교수, 이락 마을연구소 서유림 실장, 정림건축문화재단 김그린 코디네이터(왼쪽부터) ② 박수근의 창신동 옛 작업실 터 ③ 백남준의 옛 생가 터 ④ 앙증맞은 전봇대 ⑤ 옛 채석장 풍경.
 ◆재조명받고 있는 창신동=유 교수는 “20세기 상징적인 두 예술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창신동”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수근 작업실에서 10분 거리의 197번지에는 백남준 생가 터가 있다. 약 9917㎡(3000평) 규모의 아흔아홉 칸 한옥이었는데 지금은 도시 개발로 필지가 다 쪼개졌다. 그 자리에 다가구주택이 들어섰고, 한옥은 한 채만 남았다. 현재 백숙집이다.

 박수근과 백남준을 말하지 않더라도 요즘 건축·디자인계에서 창신동과 옆 동네 숭인동은 소위 ‘핫이슈’다. 도시전문가는 “최고의 연구장소”라며 연구하고, 사회적 기업가는 아예 동네에서 살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 최초의 뉴타운 해제지역, 봉제 산업이라는 도심 속 생산현장을 갖춘 동네, 동대문 패션타운의 기반이자 서울성곽 옆 마을. 이 모두를 꿰어야 창신·숭인동을 그릴 수 있다.

 창신·숭인동에는 2000개의 봉제 공장이 있다. 이 중 절반가량이 창신2동에 몰려 있다. 50년대 광장시장이 의류시장으로 부상하면서 이 일대에 봉제 공장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봉제업은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던 60~70년대 우리 경제의 근간이었다. 신중진 교수는 “당시 시골에서 올라와 미싱사로 일하면 공무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다가구주택 지하부터 옥탑방에 꽃다운 ‘봉순이 언니’들이 모여 천을 재단하고 박고 다림질해 돈을 모았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온라인 마켓의 부상으로 국내 봉제업이 다소 시들해지자 외부 사람들은 창신·숭인동을 재개발해야 할 낡은 동네로만 인식하기 시작했다. 동대문 패션타운의 전초 기지인 창신·숭인동은 2007년 ‘창신·숭인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됐다. 2013년 지정 해제되기까지 주민들은 졸지에 곧 부서질 동네에 사는 사람들로 전락했다. 신 교수는 “뉴타운 개발을 앞두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그냥 대충 산 7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간판과 실제 영업 내용이 다른 곳이 많은 동네”라고 설명했다.

 ◆창신(昌信)에서 창신(創新)으로=뉴타운 해제 이후 창신·숭인동의 화두는 ‘재생’이다. 지금껏 도시 정비사업이 지우고 새로 짓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고치고 살리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창신·숭인동에서는 현재 마을 만들기가 한창이고, 봉제 산업을 재조명하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산업화는 삶과 일터를 분리하면서 도심 공동화를 초래했지만 창신·숭인동은 일과 삶이 단단히 얽혀 있는 동네다. 창신동 주민은 창신동에서 일하고 산다. ‘드르륵-’ 재봉질 소리와 ‘다다다-’ 오토바이로 옷감 나르는 소리가 일상인 사람들이다. 그 덕에 새로운 옷을 빠르면 하루, 늦어도 사흘 이내에 만들어내는 세계적으로 빠른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창신동 토박이인 손경주 어반하이브리드 이사는 “봉제 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그들의 자부심을 끌어올려 부끄럽지 않은 동네로 만드는 게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창신동에 사무실을 둔 문화예술그룹 ‘000간(공공공간)’은 재봉틀을 형상화한 간판을 만들었다. 원하는 공장마다 무상으로 달아줘서 무명(無名) 공장에 잘 디자인된 간판이 내걸리고 있다. 예비 사회적 기업 어반하이브리드는 창신동 지역산업지도를 만들고, 봉제 공장이 가장 밀집한 ‘647 골목’에 봉제거리박물관도 꾸몄다. 창신동라디오방송국 ‘덤’, 아이들과 부모의 커뮤니티 공간 ‘뭐든지 도서관’ 등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동네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창신·숭인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센터들만 20여 군데가 넘는다. 서울시는 지난해 이 지역에 창신숭인도시재생지원센터를 만들고 사회적 기업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창신동의 백미는 길이다. 길 폭이 최대 8m가 넘지 않는 좁은 길이 온 동네에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박수근은 길 위의 장면을 많이 그렸다. 구불구불한 길을 닮은 듯 곧지 않은 나무도 자주 등장한다. 일하는 아낙네도 그림의 단골손님이다. 그림 속 모든 정경이 창신동을 닮았다. 박수근, 길, 창신 그리고 재생. 지금 창신동에서는 또 한번 어울리지 않는 듯한 단어들이 묘하게 맞물리며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S BOX] 100m 표고차 ‘돌산 밑 마을’

창신·숭인동에는 채석장이 세 군데 있다. 일제시대 때 낙산의 질 좋은 화강석을 떼어다가 수많은 건물을 지었다. 경성부가 채석장을 직접 운영하며 당시 경성역(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조선총독부, 경성부청(서울시청) 등을 지었다. 채석한 돌은 전차로 광화문까지 운반했다.

 채석장은 해방 후에도 운영되다 1960년대 후반 폐쇄됐다. 사람들이 채석장 인근에 토막집을 짓고 사는 통에 ‘돌산 밑 동네’라 불리기도 했다. 어반하이브리드의 손경주 이사는 “당시 채석장 개발업체였던 금강채석토건이 채석장 위 무허가 건물을 밀고 필지를 분할해서 택지를 분양했고 그렇게 지어진 집들이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창신·숭인동은 돌산으로 인해 동네 안에서 높이 차이가 100m 가까이 난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옛 채석장) 위 축대를 쌓고 지어진 건물을 보면 아슬아슬하다.

 박수근의 호는 미석(美石)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울퉁불퉁한 화강암 표면 같은 질감을 가졌다. 물감을 불규칙하게 덕지덕지 바르는 기법을 썼다. 박수근은 우리나라 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창신·숭인동의 화강암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을까.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