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공간>
도시화의 그늘과 귀향의식
- 경기도 양주 楊州
나호열
1.
오래 전 양주는 경기 북부의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른바 경기 京畿 - 수도 首都를 둘러싼 경제, 국방의 요충지 - 의 역할을 부여받은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역 경계는 도시화의 잣대로 확정되는 추세이다. 이에 따라 양주의 권역이었던 의정부와 남양주, 동두천은 시市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서울의 도봉, 노원, 강북, 중랑구도 양주에 속했던 바, 이른바 도시화의 세계적인 추세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구의 90%가 도시에 거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대문명의 특징을 한 마디로 축약한다면 도시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한 걸음에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에 접근할 수 있는 원스톱 one stop의 블랙홀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이제 자연스럽게 고향의 의미는 퇴색되고 공동화 空洞化되는 농어촌엔 아이들 웃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 되었다. 이른바 유목민의 시대정신은 더 이상 정주定住의 삶을 용납하지 않을 기세이다. 중앙과 지방이라는 공간의 분할은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지역 地域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평준화된 개념으로 정리된 상태이다. 각 지역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환상은 태어나고 성장하여 한 생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기억의 보고를 파괴시켰다. 획일적으로 균질화된 도시로의 이행 移行은 지역이라는 공간의 역사성을 단절시키므로서 결국에는 개별화된 예술적 영감과 향토의 질감을 감소시켜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한다. 도대체 고향이란 어떤 의미인가? 단지 태어났다고 하는 장소성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인가? 비록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그곳이 고향이 아닌가? 더 나아가서 고향이란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음악이나 서책 書冊이 될 수는 없는가? 이런저런 의문은 양주라는 공간에서 활동하는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일별하면서 마주친 난제로 남겨진다. 단지 한 지역에 쉼터를 두었다는 사실로 그를 그 지역의 예술가(시인)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2.
양주는 서울의 절반에 가까운 넓은 면적을 가졌으나 인구는 20만을 조금 넘는 도농 都農 복합도시이다. 대대손손 농사를 가업으로 삼는 사람들, 단지 집이 필요하여 이주한 사람들, 대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고는 싶으나 도시의 편의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보살피기 위한 관공서와 작은 공장들이 여러 부도심으로 분산되어 있는 풍경은 대도시에서 보기 힘든 느린 삶과 여유를 누리는 자유로움이 설핏 느껴지기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소놀이굿(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 회암사지(사적 제128호), 온릉(사적 제210호), 양주대모산성(사적 제526호) 등의 농경문화와 경기 京畿의 위세가 정신적 유산으로 남은 양주의 시인들은 누가 있을까? 방랑시인 김삿갓의 별칭으로 더 친숙한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탄생지가 양주의 회암동이며 - 이는 학술적인 논구가 더 필요한 사항이다 - 시인은 아니지만 소설가 윤승한(尹昇漢, 1909년 ~ 1950년)이 양주 출신이다. 《장희빈》(1952, 일성당), 《김유신》(1941, 야담사), 《대원군》(1954, 삼중당), 《만향》(1957, 보성서관), 《월광부》(1949, 삼중당), 《조양홍》, 《석양홍》 등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발표한 윤승한은 양주 은현면 상패리 소재의 은현초등학교 상패분교장을 지내면서 직접 역사 과목의 책을 만들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에 피살되었다(위키백과 참조). 그의 여식인 윤준경도 양주 은현면 용암리에서 태어나 1994년 《한맥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다리 위에서의 짧은 명상』, 『새의 습성』등의 시집을 발간하는 한편 우이시 동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가 새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가 나무를 받아들인다/방금 저 멧새가/ 아무도 찾지 않는/ 대추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을 보아라/대추나무는 비로소 집이 되는 것이다- 시 「새의 습성」마지막 부분 -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인간과 자연,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간의 관계성의 애련 愛憐 을 포착하는데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밖에 이 자리에 소개할 시인들은 양주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현재 양주에 거주하고 있지도 않은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어찌 양주에 태를 묻고 양주의 정신을 고양하려는 향토시인이 없겠느냐마는 바로 그 향토성이라는 독특한 기질이 문학적 변별력을 가지지 못할 때에는 논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나병춘, 임영희, 임재정, 이진욱은 한국작가회의 소속의 시인들이다. 이들은 1990년대에서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들로서 그들이 속한 문학단체의 강령 綱領 - 지금도 이런 용어가 통용될 지 모르겠다 - 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사회를 지키는 등대의 역할에서부터 개인적 존재의 탐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체의 계발에도 소홀하지 않은 신예 新銳의 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는 시인들로 기억된다.
안영희는 광주 출생으로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를 시작으로 『내 마음의 습지』, 『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물빛 창』, 『그늘을 사는 법』,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등의 지속적인 시업에 몰두하는 한편 도예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어 【흙과 불로 빚은 詩】(2005년)도예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세기만의 가뭄이라는
이 여름 참외를 자주 깍았네
누릇누릇 누룽지 무늬로 구워진 등
단맛에 감탄 감탄하며
깁스로 내 발목 감금한 의사는
겨드랑 밑에 고이라, 쇠다리 두 개를 준 대신
내 팔다리 넷을 몽땅 차압했네
아카시 첫 향기 터지던 날부터
덩굴장미, 밤꽃들마저 미치게 살다 가버리는 동안
바닥을 기고 나동그라지는 둥치
유리창 안에서 짐승의 분노 어쩌다 잦아드는 시간이면
생각났네 가방 한 번 들어준 일 없는
목발의 옛 친구며 앉은뱅이로 살다 가신
말년의 시어머니......
상형문자, 그 오랜 절벽문장들이
줄줄줄 불현듯 핏빛으로 읽혔네
대지가 목이 타 비명으로 갈라지는 동안
속속드리 참외를 익힌 그 힘이
날 익히고 있었네
- 시 「상형문자를 해독하다」 전문
남다른 유년의 상처와 고립, 외로운 어린 날의 자연과의 교감이 뒤늦게나마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필연의 이유가 되어주었다고 술회한 시인의 시세계를 홍희표는 역사와 시간 속에서 불멸 不滅과 필멸 必滅이 개체의 소멸 뒤에도 명백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에스프리로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전남 장성 출생의 나병춘(1956- )은 공주사범대학교 외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94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린왕자의 기억들》,《하루》, 《새가 되는 연습》등이 있으며, 중등교사를 역임하고 이후 현재 우리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연휴양림에서 산림치유사로 활동 중이다.
나비는 날개를 가졌어요
하늘을 접었다 폈다 마음대로 하는
두 개 부채를 가졌어요
한 번 부치면 천둥번개가 치고
남태평양이 춤추며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는 귀를 가졌어요
하늘 소리와 땅의 소리 골고루 듣고
꽃들의 한숨소리 향내도 듣는
가끔가다 손뼉이라도 치면
꽃들이 환호하며 무도회를 벌이는
나비는 두 잎새를 가졌어요
이른 봄 만물이 고요할 때
새싹 애벌레 꿈속에서 불러내는
희한한 두 개의 톱날을 가졌어요
고치에서의 긴 동면을 끝내고
은근슬쩍 흥부네 박을 타듯
완강한 문을 썰어내는
아무도 모르는 이빨을 가졌어요
-시 「나비에 대하여」 전문
나병춘은 등단 이후 일관되게 인간을 둘러싼 자연과의 교감을 추구하되, 그 교감이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인간이 겪고 있는 상처나 슬픔이 광활한 자연의 매커니즘 속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무화 無化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도봉산 회룡사 건너
깊은 산길에 들어서니
나무다리 입구에
‘근양 간다’란 낙서가 휘갈겨 있다
‘그냥 간다’를 ‘근양 간다’라 잘못 쓴 걸까
세심교나 해탈교를 건널 때 보던
화두처럼 번쩍 눈에 뜨인다
.
...중략 ...
벼랑 끝에 앉아 허공을 내다보는
황조롱이 한 마리 햇볕 속에 찬란하다
근양이 이곳이구나
아무 까닭 없이 까탈 없이
그냥, 근양 간다
-시 「근양 간다」부분
위의 인용시를 일별하면서 알 수 있듯이 나병춘은 단순한 자연탐미나 섣부른 성찰이 아니라 상식적 일상에서 부단히 문학의 본연의 임무인 새로움의 발견에 몸을 부딪는 성실함을 보여준다. 백원기(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의 평은 나병춘의 시작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주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문학은 끊임없는 창신(創新)과 낯설게 하기를 요구한다. 발견은 마음이 시의 눈을 틔워 새로운 의미관계를 읽는 순간이다. 또한 발견은 기존의 대상관계를 해체시키면서 새로운 대상관계를 명명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발견은 새로운 의미 읽기이다. 늘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전혀 낯설게 만드는 것, 기호학적으로 말하여 낡은 코드의 틀을 깨고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냥’과 ‘근양’ 사이에서 의미 표현의 지점으로 이입해 들어감으로써 시적 발견자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데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진욱과 임재정은 늦깎이 시인이다. 2012년 계간『시산맥』 으로 등단한 이진욱은 전남 고흥출생으로 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임재정은 충남 연기 출생으로 2009년 【진주가을문예】에서 대상을 받은 후 2011년 서울문화재단‘문학창작활성화-작가창작지원기금’을 받는 등 시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다층사람들> 동인으로 새로운 시 정신을 부각시키려 노력하는 시인으로 보여진다. 이 두 명의 시인은 신예에 속하는 시인이기에 앞으로 그들이 걸어갈 시 세계를 예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 詩作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시 정신을 벼리고 그들의 삶을 시에 아로새기기 위해 분투해 왔다는 사실은 많지 않은 시 들 속에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진욱은 도시의 그늘에 매몰되어 버리고 시간 속에 휘발되어버린 농촌 공동체 삶을 오늘의 거울로 반영하면서 일상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에 분노하고 반항하는 정신은 흘러간 시간의 회고를 통해 스르르 정화되는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소반에 서리태를 쏟고 쭉정이를 고릅니다
뙤약볕에 타들어 간 콩
벌레에게 먹힌 콩
딱새에게 쪼여 반만 남은 콩
채 자라지 못하고 말라버린 콩
못난 콩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고
침침해진 손으로 뒤집을 때마다 실한 콩은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콩을 고르다 문득,
며칠째 아랫목을 지키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콩꽃 같은 모습은 간데없고
호미에 이끌려 타버린 아내가
쭉정이처럼 누워있습니다
물이 들지 않을 만큼 단단하던 저 몸속으로 나는 차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손댈 수 없을 만큼 푸석해져 버린 아내
내 손에 까만 물이 들도록 콩을 고릅니다
쭉정이라고 생각했던 콩도 함부로 버릴 수 없습니다
눈물이 까매지도록 고르고 또 고릅니다
- 이진욱의 시 「검은 콩」 전문
임재정은 세상과 불화를 겪는 개인의 내면을 정밀하게 묘사하려는 시작법을 구사한다. 이진욱이 개인이 겪은 과거사의 음미를 통해 핍진한 오늘의 삶을 위로하고 긍정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몸짓을 보여준다면 임재정은 오늘의 삶의 부조리를 들추어내고 그 부조리들이 어떻게 삶의 내면에 상처의 흔적을 남기는지를 기록하므로서 존재의 허무를 허물어뜨리려는 분투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시의 틀은 정형을 벗어나 자유자재의 의식의 흐름을 잡기에 충족하는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1.
둘을 손 내밀게 한 것은 난로였어요. 불꽃이 빈 방을 부풀렸죠. 내가 당신을 땔감으로 쓰는 동안, 빈 방엔 누군가 머물렀던 적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기적처럼.
2.
들끓는 난로.
중언부언 하는 불꽃을 손질합니다. 불꽃은 건너편을 일으켜 세우고 당신을 마주 앉힙니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주전자는 난로만큼이나 지속적 관심을 요구하죠. 뭐가 다르겠어요? 온기가 번지는 곳까지 집이라면, 우린 늘 유목 중이었을 겁니다. 미래를 점치는 일은 대문 밖의 문제, 오늘과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연도에 엉긴 그을음이 아니기를 바랄 뿐.
3.
엉덩이에 검댕이 묻힌 아이가 끓고 있어요. 당신은 실어증을 앓죠. 내 얼굴과 당신의 혀를 가진 아이는 만능열쇠가 아니에요. 아이 이마를 짚으며 우린 계획적으로 어긋납니다.
뭐 그냥, 그런데 왜요? 오늘은 당신에게 존칭을 씁니다. 예의는 거리유지에 적당한 장치. 서로의 연료라던 생각이 끝내 얼룩으로 앉았어요.
우린 쓰죠 그을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각기 얼굴을 붉히고 그리곤 등 돌렸던가요
식어버린 주전자가 난로 위에 멈춰있어요 찻잔을 깬 것이
딱히 나빴던 건 아니었습니다
마시려던 것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죠
4.
난로를 삼키고 빈 방도 온기를 쬐던 여섯 개의 손도 삼킨다. 가끔은 전화를 걸고. 여보세요? 사이사이 식은 재 너머 저쪽을 엿보면서, 시무룩이 아이 목소리를 기다리기도 한다. 우린 앞으로 퇴보하는 생을 견딜 것이다.
뭉텅, 천 년이 뒤로 흐른다.
- 시 「내연기관들」 전문
3.
다시 상기 해 본다. “단지 한 지역에 쉼터를 두었다는 사실로 그를 그 역의 예술가(시인)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양주의 시인들을 살펴보면서 이미 우리는 지역이라는 경계의 부질없음과 문명에 항복해버린 균질화된 인간 존재의 허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에 거주하면서 시인들이 항거하고자 하는 지점은 보편적인 삶, 타인의 삶을 좆아가려고 하는 무의식의 탈출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의 다양성과 더불어 향토의 무궁무진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인의 출현을 기다린다. 시의 공간!
계간 『시와 산문』 2014년 겨울호 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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