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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형을 찾아가는 탐색의 기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15. 14:44

삶의 원형을 찾아가는 탐색의 기록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이천종의 시집 『천년바위』의 키워드는 고향,자연,사랑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키워드는 시집 『천년바위』를 관통하고 있는 시인의 염원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 염원念願은 아직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삶을 역동적으로 끌고 가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 에너지가 한 권의 시집으로 지금 탄생하고 있다.

 

 

누구나 우리의 삶이 희로애락으로 얼룩져 있으며, 생노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생명을 둘러싸고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을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방식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느 사람은 명예와 부에 자신을 투신하기도 하고, 아예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생노병사는 회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개인과 개인, 인간과 자연,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에서 빚어지는 희로애락은 받아들이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 강도를 달리할 수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요가의 수행방식이 고통이 될 수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평안으로 가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시간을 유예시키면서 삶의 진경을 찾으려는 나름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노력 중의 하나가 시를 짓는 일인데, 시작 詩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실생활에 무용 無用한 까닭에 역설적으로 그 효용은 극대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시가 지식인이 전유물이었던 시대를 지나고 엄격한 율격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시의 영역으로 들어선 이후 시를 둘러싼 정의는 점점 애매모호해 진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시는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고, 분지分枝될 수 있다. 다양한 시각 視角으로, 표현 방법의 개발로 시의 위의 威儀를 새롭게 세우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비극적 상황의 간접체험을 통하여 감정을 배설함으로써 정화 淨化의 상태에 이르게 됨을 뜻한다. 시인은 소설가나 극작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시작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삶의 반추'가 반드시 시인의 개인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대 사회적 상황의 고발이나 비판이 될 수도 있고, 표현의 도구가 되는 언어 言語의 실험성을 강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여러 방향의 '삶의 반추'의 경중 輕重을 쉽게 판가름할 수는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여전히 시작 詩作을 인격도야의 방편으로 여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무관하게 작품의 독립성에 무게를 두면서 작자와 작품의 개별성을 추구하는 시인도 존재한다.

 

 

어찌 되었든, 시인은 시간을 유예시킨 상태에서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현실을 재편성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자기 확인을 반복하는 존재이다. 반복된 자기 확인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긍정적으로 수긍하거나 미적 존재로 승화시키려는 힘을 얻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경향을 헤치고 나와 시집 『천년바위』 를 통해서 이천종 시인은 개인사를 경유한 인격도야의 도정을 거듭 확인하고 신념화한다. ‘남의 눈길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음껏 목청 높여 외쳐보는 것(「구토」부분)’이 누구나 행하고 싶은 배설의 욕구이지만 ‘염병할’이라는 이그러진 세상에 대한 마지막 토로는 거칠고 단순한 배설로 끝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절제된 서정 抒情의 흥취를 놓치지 않으므로써 시인의 공력을 한껏 돋보이게 만든다.

2.

 

 

앞서서 시를 짓는 일이 실생활에 무용하며, 무용한 만큼 시작 詩作의 효용이 극대화 될 수 있다고 밝혔다.?멋있는 표현을 구사할 줄도 모르며/ 섬세한 표현도 할 줄 모릅니다/ 단지 제 가슴속 생각을 끄적입니다 ...중략 ... 작은 소망은/ 시를 통해 삶을 배우고, /시를 통해 사랑을 느끼며,/ 시와 함께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고백」1, 3연)? 와 같은 시인의 토로는 이천종 시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시는 명예나 부를 얻는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쉽게 말은 하지만 그 뜻을 지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시는 산문과 달리 생략과 압축이라는 절제의 양식 樣式인 까닭에 자신의 뜻을 덜어낼 수밖에 없다. 멋있고, 섬세한 표현의 욕구를 물리치고 가슴 속 생각을 끄적이다 보면 부지부식 간에 저절로 삶의 의미와 사랑을 배우게 되는 소중한 소득을 얻게 된다는 혜안은 이무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를 향해서 쓰는 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을 조준하는 화살로 시를 생각하는 이천종 시인의 고백은 그래서 소중한 일침 一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진솔한 외침은 시인을 둘러싼 환경과 삶의 여정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어진다. 생애의 대부분을 교단을 지켜왔다는 점, 첩첩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을 멀리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행운이 주어졌기에 시인 이천종의 심성은 바위와 같이 굳고 송백 松柏처럼 푸르며 교언영색을 멀리하는 강물을 닮아 있으리라. 이십 여 성상에 이르는 동안 시인으로 그가 간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집 『천년바위』의 편편들이 전통적인 서정시의 특징인?세계의 자아화?,?자아의 세계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시들이 일률적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결실을 앞둔 황도를 “노랗게 익은 젖가슴 위에 햇살 한 웅큼”(「그해 가을」부분) 처럼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거나 그늘을 취각으로 “창밖엔 녹차향 같은 그늘만 남아있다”( 「봄비」부분) 로 치환하기도 하며 사물의 속성을 직각적으로 채집하여 “폭포는 경계를 뛰어넘고서야/ 소리 내어 통곡할 줄 안다”(「정방폭포」부분) 는 은유로 섬세하게 기술하기도 하고, 아래의 예문과 같이 청자의 거리조정을 감안하여 직설적 대화의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먼 훗날/ 최선을 다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고//그때 웃을 수 있으면/진정한 승리자이다”(「준비하는 내일」 -아이들에게 부분)

 

우리가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그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길을 묻다」부분)

 

 

간략하게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천종 시인의 시법 詩法의 다양함을 발견하는 일은 시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3.

 

이 글의 서두에서 고향과 자연, 그리고 사랑이 시집 『천년바위』의 바탕에 깔린 주제임을 밝혔다. 이제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고향 故鄕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근대 近代의 특징은 도시화에 있고 도시화는 세계적 추세이다. 도시화를 부연하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인간 활동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 집약, 집중화 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또한 급격한 산업화로 농어촌 인구는 감소하고 도시가 늘어나는 추세에 놓이게 됨으로써 정주 定住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현대인들에게 고향은 선대 先代의 유물일 뿐이다. 어쩌면 앞으로 고향이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져 버리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성장의 추억이 집적된 공간,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공간으로서의 고향은 시집 『천년바위』에서는 오롯이 살아 있다.

 

 

까마득히 먼 산자락 아래

오르기조차 힘들었던

하늘 아래 첫 동네

그렇게 높고 크게만 보였던 뒷산이

어느새 저렇게 작아졌을까

솔가지 타는 냄새와

소죽 끓이는 냄새가

처마 끝 가득 서린 김에

구수하게 코 끝을 감돌고

 

 

노을진 저녁 너머로

부엉이 소리처럼

스산한 바람과 어둠이 밀려오면

어둑한 방안에는 호롱불이 켜졌다

 

 

초승달에 비친 문살 그림자로

시간을 재던 가난한 방안

모서리 닳은 다듬이돌과

양말 깁는 어머니의 얼굴이 있고

타작마당 넓었던 뜨락 아래로

부추나물만 돌 틈 사이 여전하고

대추나무 등 굽은 늙은이 되어

빈 집을 지키고 있다

 

 

- 시 「고향 집」 전문

 

 

이 시를 읽는 당신은 고향이 있는가? “섬강을 건너뛰면/ 치악이 저기/산자락 치마폭에/ 감싸인 고을/ 하늘이 오백 평 내 고향이다”(「고향 가는 길」 부분)처럼 세상에 패배하고 엉엉 울고 싶을 때 한걸음에 달려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정경이 당신의 가슴의 박동으로 남아 있는가? 돌아갈 곳이 없고, 기다릴 사람이 없는 우리의 삶은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군중 속의 고독’, ‘익명의 시대’로 대변되는 유목민 nomad의 세태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협동을 미덕으로 알던 ‘두레’의 풍습을 망각 속으로 매장시켜 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점을 반추하여 볼 때 이천종이 직시하는 ‘고향’은 단순한 퇴행의 추억이 아니라 마땅히 회복되어야 하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천종의 시편들을 통해 드러나는 맑은 심성이 작위적이지 않고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생활 영역이 고향과 멀리 이격되지 않고 있음에 연유한다. 시인의 생활 공간이 비록 도시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하여도 인공 人工보다도 자연 自然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행운이며, 행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천년바위』의 대다수의 시편들이 산과 강, 꽃과 같은 소재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도시인들이 잠깐 동안 머무르며 관상하는 자연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자아와의 일치를 증언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극즉반極則反 - 극에 다다르면 되돌아온다-는 법칙성을 어기는 법이 없다. 긴 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봄이 되면 새 싹이 돋아오르는 것이나, 훼손됨이 없이 그 자리에 우뚝한 바위나 청정한 강물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은 무한 경쟁과 갈등을 겪으며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현대인이 겪는 삶의 불안을 치유하는 영감 靈感을 갖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들꽃처럼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에 목숨 걸지 않고

고고한 품위로,

청초한 자태로 꽃피우자

 

- 「들꽃처럼」 첫 연

 

 

하얀 침묵으로

입을 닫고 있어도,

때가 되면 햇살 받아 비눗물처럼 부풀려

부드러운 바람소리

그를 깨울 것이다

 

- 「생강나무」 2연

 

봄바람

들꽃 속에는

호드기 소리가 난다

 

- 「꽃길」 첫 째연

 

위의 예문에 드러난 시행들은 순간의 관찰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풍경들이다. 들꽃이 때가 되면 시들어 버리는 것, 생강나무가 긴 겨울 침묵하다가도 때가 되면 기지개를 켜는 것, 들꽃 속에 호드기 소리가 나는 것 등등은 오랜 시간 눈에 익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는 자연의 생명현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천종 시인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시편들은 자아의 서정성을 미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자연 속에 숨은 생명의 숭고함과 의지를 육화肉化한 것이기에 뜻이 깊은 것이다. 또 한 편의 시를 읽어 보기로 하자.

 

태종대 지나

상원사 가는 길에

등 굽은 노송이 나를 반기고

 

횡지암 내린 물이

소리 내어 막아서도

냇물을 건너니 곧은치가 눈 앞인데

아름드리 늙은 몸에서 산죽 한 그루 자라고 있네

 

나도 더 나이 들면

저 나무처럼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 「나도 나이 들면」 전문

 

 

생명을 다해 가는 노송이 키우는 산죽을 보며 제 몸에 또 다른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심을 덜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이 시는 단순한 만큼 절실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그렇다면 너그러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 「응급실」을 읽어보면 조금이나마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주사 수액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응급실 침상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니

갑자기 허무해지고 가슴이 텅 비어

어디 기댈 곳이 없다

머릿속에 기억된 이름과

전화기에서 수배한 숫자들은

모두 내가 절실히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한 잔의 커피와

술과도 멀어지는 조짐

창문 열고 찬 바람으로 가슴을 식히고

결국에는 나 혼자 이겨내야 하는 침상 위의 시간들

 

 

결국 이렇게 연습없이 실전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보다

 

 

화자 話者(시인)는 응급실에 누워 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지고 있던 것들과의 결별, 결국은 단독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상함 때문에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매커니즘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는 힘(이성)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답을 알면서도 정담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찾고 신을 믿으며 영생 永生의 안식처를 찾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4.

 

 

예술(예술가)은 당돌하게도 신의 영역을 넘본다. 작품을 통해서 초월의 경지로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 누구도 예술을 통해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찬미하는 숭고함을 체득하였다 하더라도 시인은 인간을 통해서 영생과 구원의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천종 시인에게 있어서의 초월의 통로는 ‘사랑’이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하늘의 통곡에도

참을 수 없고

 

번쩍이는

번개에도 미동도 없이

지루한 장마에도 식지 않는

저주받은 열꽃

 

사랑

 

- 시 「사랑」 전문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랑의 속성 - 저주 받은 열꽃- 때문에 당신을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잊혀졌다/ 떠오르는 오래된 그리움”(「달」첫 연)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이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마실 수밖에 없는 독배인 것인가! 그렇다. 이천종 시인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칡넝쿨처럼 칭얼대면서도

급소만을 공격하는 산초나무 가시도

애초엔 뿌리와 줄기가 한 몸인 연두빛

 

 

둥근 모음의 떡잎이었다

드센 바람과

햇빛처럼 밀려드는 고통과

유리알같이 퍼붓는 슬픔이

순한 모종의 실뿌리까지 스며든 후

유연한 팔과 다리의 떡잎은

어느새 뾰족한 독 화살로 변했으리라

 

 

가시 돋힌 네 혀도 처음엔

옹알옹알 그렇게

둥근 모음의 떡잎부터 옹알거렸을 것이다

 

- 시   「독설 」전문

 

필자는 시집 『천년바위』 중에서 시 「독설」을 으뜸의 수작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평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파생되겠지만 「독설」이 궁극적인 사랑을 알레고리로 풀어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독설은 말 그대로 독한 ‘혀’이거나 독한 ‘말’(언어)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임을 역설했지만 그 언어는 끊임없이 재정의 되어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화는 상대방의 마음에 닿지 못하고 단지 수식 修飾으로 겉돌게 된다. 겉도는 수식이 일으키는 오해는 어느새 사랑의 정의를 슬그머니 증오로 뒤바꿔 버린다. 뾰족한 가시도 처음에는 둥근 떡잎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보자. 모든 생명체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랑의 원형은 아가페적인 무조건에 있지 않은가. 이천종 시인이 궁극적으로 깨달은 사랑은 가시를 벗어나서 둥근 모음의 떡잎, 뿌리와 줄기가 한몸인 감성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시집 『천년바위』의 키워드를 고향, 자연, 사랑으로 나누었다고 서두에서 밝힌 바 있으나 이 글을 마치면서 고향과 자연과 사랑이 일심동체임을 일러준 이천종 시인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대교약졸 大巧若拙 - 큰 기교는 졸열함에 미치지 못한다-의 화두를 견지하기를 시인에게 당부드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