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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인이 詩人인 이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10. 6. 18:44

 

시인이 詩人인 이유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1.

시인은 늘어나는데 시를 읽는 독자가 줄어드는 현상에 난감해하는 것이 오늘의 시단詩壇이다. 더 적확하게 말한다면 시인이 되는 관문이 넓어져 일 년에도 수 백 명의 신인이 등장하고 수 백 개의 잡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들이 범람하는 저 편에서 시를 힐링healing이나 교양의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 대중大衆들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전문적인 수련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열망이 시의 생활화에 가까이 있다는 순기능과 동시에 문학보다는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영화를 비롯한 음악과 같은 대중 예술에 관심을 두는 지식인 층이 두꺼워졌다는 비관적 사실의 혼재 混在가 반드시 문학(시)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문학(시)에 대한 외면이 대중예술의 무한한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인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 욕구의 표현은 존재의 집인 언어를 통해 구사될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지는 법인데, 우리 학교 교육은 문학 작품의 읽기와 쓰기를 비롯한 자기 표현력 증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이 학교 교육 현장에서 개선이 된다면 문학의 저변 확대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교육의 현장에서 많은 기성세대가 시 창작에 관련된 강좌에 관심을 두고, 뒤늦게 등단의 열망을 감추지 않는 현상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단이 당면한 문제가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도구인 언어의 소멸이라는 비관적인 추세에 놓여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비관적 전망으로부터의 탈피 내지는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문자 행위의 중요성은 반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인은 끈질긴 기다림의 자세로 대중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2.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고 좋은 시의 뼈대에 대해 고민해 왔다.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좋은 시에 대한 정의는 시 창작에 관심을 둔 사람들에게는 난마亂麻와 같은데 마침 『산림문학』에 기획연재 중인 임보 시인의 「시창작론」(『산림문학』 2014년 봄. 여름호 참조)은 간단명료하게 좋은 시의 기준을 설명해 주고 있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요점을 정리한다면 첫 째 독자에게 이로운 글, 둘 째 재미가 있는 글, 세 째 작품은 아름다운 언어구조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임보 시인의 좋은 시의 기준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이롭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글 이라는 얼개는 독자들의 개인적 성향과 인식 수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롭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글의 개별적이고 상대적 인식을 포용하기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 글 쓰는 이의 치열한 체험인 것이다. 체험이란 무엇인가? 본능에 의존하는 욕망을 의식 없이 분출하는 삶이 아니라 욕구를 통제하고 투철한 자기반성을 통하여 삶을 긍정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는 일체의 활동을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 체험을 언어를 통해 구현(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시 쓰기의 첫걸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아도 詩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언言과 사寺의 구조를 통해서 단순히 언어가 머무는 사원이 시詩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함이 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언지 詩言志의 의미를 궁구한다면 시詩는 언言의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를 부여잡고(지持), 자신의 체험을 올곧게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3.

 

 

이런 점에서 『산림문학』은 자연/인간의 대립적 구조에서 탈피하여 자연 속의 인간,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자연적 속성을 탐구하는 문학지로서의 내실을 더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완상玩賞에서부터 문명 비판에 이르기까지 산림 山林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시인들의 다양한 체험은 공리 公利를 추구하고, 시 읽기의 즐거움과 이미지를 구현하는 언어가 이룩해내는 조화를 드러내는 시들로 구현되고 있으나 그 모두를 완벽하게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김정선의 시 「두물머리」는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집약할 수 있는 물의 속성을 통해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들에게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박명숙의 「맨밥 가시네」는 맨밥이라는 절대 절명의 생명보존의 절박함과 ‘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는 ‘가시네’와 어린 여성을 지칭하는 ‘가시내’와 同音동음화 되는 ‘가시네’를 결합시켜내는 재치를 보여주고 있다. 오영록의 「아지랑이 울타리」는 봄날의 풍경을 그저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지랑이를 인간의 잘못을 일깨우는 따스한 경고로 아래와 같이 재해석 하므로서 신선한 감동을 선사한다.

 

 

오늘 같은 봄날엔

들길도 조심하라고

꼭 그러라고

아지랑이가

울타리를 칩니다

 

            - 「아지랑이 울타리」 마지막 부분

 

 

그런가 하면 이선옥의 「적상산. 8」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풀꽃에 불과할 지 모를 산약초와 그 효능을 열거하면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무언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적상산 아래 뿌리내리며 날마다 만나는

나무와 풀들이

사람과 더불어 잘 살자며

환하게 꽃을 들고 있다

 

                         - 적상산.8」 마지막 연

 

 

이 밖에도 자연 현상이나 사물의 관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음은 『산림문학』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김행숙의 시 「금강송」은 ‘노란 페인트 완장 두른 한 떼의 소나무들/나라가 부르면 목숨바칠 병정들 같다’, ‘살아서 천 년 , 죽어서 천 년 영화를 이어가는/소나무 팔뚝을 가만히 쓸어본다’ 와 같이 감히 인간이 넘보지 못할 생명의 기개를 그려냄으로서 삶의 본령에 대해 사유의 깊이를 가늠해 볼 시간을 갖게 해준다. 이와는 달리 임술랑의 「산복숭 세 자매」는 시인의 유년과 세 그루 산복숭 나무를 회고로 병치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욕심을 되물리는 동심童心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간결하게 언급한 시들이 얼만큼 공리성, 재미, 언어의 아름다운 꾸밈과 절실한 체험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지는 독자들이 가늠할 문제라고 본다. 좋은 시의 요건을 모두 갖춘 시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임송자의 시 「적멸寂滅」 은 새로운 시법을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좋은 시의 요건을 두루 갖춘 시의 전범典範으로 삼을만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고사된 고욤나무를 ‘추억을 달여 먹은 노인 같다’라고 형상화 한다던가 ‘수 십 년 묵은 저 고요와/ 수만 섬이나 되는 저 적막을’과 같은 치밀한 묘사력은 오랜 시간 말을 다듬고 가라앉힌 공력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가 아름다운 묘사에 그친다면 교언영색 巧言令色의 병폐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질문이다. 레드 클라우드 Red Cloud라는 인디언 추장은 탐욕에 가득 찬 백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지막 남은 강물도 썩고, 마지막 남아 있던 물고기마저 잡혔을 때 인간은 황금은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돈으로 아무 것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죽어서도 할 일이 많다는 듯

허공에 팔을 들고 저녁 새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 「적멸」」 마지막 부분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다. 우리 선조들은 ‘늙어 죽는 것’을 복 福으로 여겼다. 나이가 들면 보약을 먹지 않고 죽을 때가 되면 곡기를 끊고 서서히 적멸의 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의연하고 향기로운 죽음은 죽음에 대한 사색을 넘어 내면화하려는 의지의 발동 없이는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어야 할까? 엄밀히 말해서 인人은 치인 治人, 즉 다스리는 사람, 근본根本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왜 시인을 시가詩家가 아니고 詩人이라고 부르는 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이다.

 

 

*

이 밖에도 언급해야 할 시들이 다수 있었으나 이미 지난 호에서 몇 번 다루었던 시인들이어서 부득이 이번 평에서 제외했음을 말씀드린다.

*

 

 

 이 글에서 언급한 시

 

 

두물머리에서

                     김정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온전히 알지 못하는 너라서

어쩌면 너무 절 알 것도 같은 너라서

천천히 서로의 가슴으로 스며들다 보면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강물

그 깊이를 읽는 사이

내가 너를 헤아리는 사이

저 평온한 흐름이

해일보다 높은 파문으로 온다해도

부서진 기억의 파편으로 박힌다해도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금강송

                  김행숙

 

 

울진군 구룡계곡 가는 길

금강송 군락지의 나무들

노란 페인트 완장 두른 한 떼의 소나무들

나라가 부르면 목숨 바칠 병정들같다

 

궁궐의 기둥, 고찰의 대들보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년 영화를 이어가는

소나뭄 팔뚝을 가만히 쓸어본다

결 곧은 기상을 그에게서 배운다

 

 

솔향기 지천인 부드러운 길을

백두대간 낙동 정맥을 따라가노라면

매끈하게 뻗어나간 금강송의 자태

능선은 지금 갈맷빛 물결로 출렁이고

금강송 너만은 굽힐 줄을 모른다.

 

 

맨밥 가시네

 

                                  박명숙

 

 

여보세요 아직 아직도

그 음식점 하고 있나요

 

 

맨밥 가세네 수필을

가슴으로 읽다가

울컥 치밀어

눈으로 읽어가며

필경 눈물로 씻어내는

맨밥 가시네

 

 

사람다운 사람

사람 냄새

맨밥 냄새

 

 

여보세요

아무리 물뭍 구석구석 두루 찾아도

가슴에 와닿는 당신의 향기, 이 뿐

 

 

목 터져라 불러보는

당신 작품

맨밥 가시네!

 

 

 

적상산 ․ 8

                            이선옥

 

 

적상산 기슭에 발 뻗으며 사는 산야초

작아서 몰랐던 약이 되는 풀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하나님 이 작은 것들에게 손을 내밀고

약속 하신다

 

 

위장에 좋은

찔레나무 비자나무 노간주나무

기침에 좋은

도라지 참나리 맥문동

해독을 잘 시키는

할미꽃 꿀풀 닭장풀 국화

통증을 완화 시키는

진교 흰독말풀 약모밀 잇꽃 현호색

열을 물리치는

시호 중대가리풀 용담 개구리밥 깽깽이풀

염증을 가라앉히는

우엉 박하 황금 이질풀 미나리아재비 민들레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하는

결명자 질경이 자리공 아주까리

기쁨을 주는

메꽃 쇠무릅 원추리 산부추 칡 잔대

하늘나리꽃 무릇

 

 

적상산 아래 뿌리내리며 날마다 만나는

나무와 풀이

사람과 더불어 잘 살자며

환하게 꽃을 들고 있다

 

 

 

 

 

적멸 寂滅

                      임송자

 

 

 

담장이 고욤나무에게 기대었는지

고욤나무가 담장에게 기대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깊어지기로

단단히맘 먹은 것이다

 

 

바람도 어깨를 낮추고 들어가는 집

빈 집의 뒤뜰에 아주 오래 되었을

캄캄한 고욤나무 한 그루

추억을 달여 먹는 노인 같다. 비스듬히

 

 

 

번열 煩熱을 제거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고욤나무 열매

그 착한 품성이

빈 집을 거느리며 산 것이다

 

 

나는 바람보다 더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고욤 털던 먼 날의 왁자함을 눌러 밟으며

그 집에 들어 서 보는 것이다

수십 년 묵은 저 고요와

수만 섬이나 되는 저 적막을

어디 가서 만날 수 있으랴

간신히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할 일이 많다는 듯

허공에 팔을 들고 저녁 새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산복숭 세 자매

                             임술랑

 

 

 

꾀꼴새 우는 산골이다

도랑물소리 곁에서

꾀꼴새 연방 울어대는 산골이다

봄이다

연한 봄

모두 신록이다

그 산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산복숭 세 자매가 내 앞에 있다

막내는 두 뼘이요

둘째는 다섯 뼘이요

큰 언니는 내 키만 하다

붉은 복숭꽃 진 망아리가

여린 가지에 아직 붙어 있는

언니 나무

초경 初經의 흔적

나는 첨에 둘째 복숭이 너무 귀여워

올타꾸나! 저 놈 캐어 내 집 뜨락에

심을란다 싶었는데

그 자리에 앉아보니 아니더라

산복숭 어린 세 자매

부모 없이 자란 유년 시절

열한 살에 어머니 잃고

자서 살 동생을 키운 여인

산나물 뜯으러 같이 온 그 여인이

산 저쪽 모퉁이에서

워꾹워꾹 우리를 부른다

 

반년간 『산림문학』 (2014년 봄,여름호) 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