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관찰의 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7. 17. 22:14

복도/ 김현희

그는 천성이 과묵하다

주인보다 먼저 입주한 그는 쿵쿵 뛰어오는 발소리를

귀에 저장하고 입을 다문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오는

사람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 또한 그의 몫

들고나는 이삿짐의 행로도 추적하지 않고

겹겹이 쌓이는 묵은 임대의 기록도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

 

복도란

집의 겉옷 같은 것

단추 같은 벨을 누르고 들춰보기 전까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복도 끄트머리

흔들거리는 공공근로 김씨의 불운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한다

막다른 벽에 부닥친 1401호 독거노인

통로에 신발을 벗어두어도 냉기로 가득 찬

그 집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정착지를 찾을 동안 잠시 머무는 임대아파트는

집들의 낡은 소매 깃이다

소매를 접거나 펴거나 옷이 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몇 개의 짐을 다시 무심하게 배웅하고 흘리고 간

소음 부스러기만 복도를 서성댄다

간혹 빗나간 꿈에 화풀이하는 사람들로

긴장하는 복도, 저 밑은 벼랑이다

 

빽빽한 침묵의 행간, 그의 몸에 서서히 균열이 보인다

복도의 어깨가 기울어지면

여기저기 터진 솔기 사이로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2012년 다층 봄호에 게재>

 

 

 

김현희는 2012년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이름을 내민 새내기 시인이다. 근래에 등단하는 신인들이 보여주는 충격적이고 해체적이며 난폭한 상상의 유혹에서 벗어나 시가 근본적으로 버려서는 안될 형식과 관찰의 꼼꼼함을 견지하고 있다.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으면서 우리 삶의 이면을 냉정하게 그려내는 리얼리스트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그의 시 「복도」는 이와 같이 시가 지녀야할 덕목을 빠트리지 않고 재생해내는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복도’가 함의하고 있는 다수의, 침묵하는, 너그러운 등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민중’의 애환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균열되어서는 안되는 민중의 미덕의 힘을 믿고 있는 시인의 신념 또한 가지런하다. 시를 새로 쓰려고 마음을 다잡는 순간에 번뜩 눈에 띈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