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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영하의 날들/ 권상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4. 20. 16:03

 

영하의 날들

 

                    권 상 진

 

 

이 골목은 열대의 모세혈관

쪽문 깊숙한 곳까지 폭염을 나르던 적도의 시간들이

출구를 헤매는 골방에서

노인은 지팡이와 함께 싸늘하게 발견 되었다

 

직립의 시간은 끝난 지 이미 오래인 듯

폭염을 등에 진 채 골방에 ㄱ 자로 누운,

저 경건한 자세가 되기까지 열대의 밤은

블랙홀처럼 폭염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은 영하의 온도를 지녔다

버려진 시선들만 싸락눈처럼 쌓이는 골목 어귀는

외로움의 온도가 연일 기록적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홑청 같은 그의 피부에 살얼음이 얼던 날

맹렬하게 그의 체온을 데우던 열대의 밤은 결국

조등인 양 달을 대문 밖에 내걸었다

 

열대의 대륙에서 견뎌야 했던 영하의 날들이 저문다

강변 공원에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

시린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폭염을 견디던 그들은

부의처럼 더운 심장을 강바닥에 내려놓고

자정이 지나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빙하기 지층처럼 견고하던 얼굴에서

겹겹의  표정들이 차례로 녹아내린다

사람의 끝에서도 꽃이 피다니,

오래전 퇴적된 노인의 미소가 환하게 한 번 피었다 진다

 

생의 아슬한 등고선에 기대 사는 지표 인간들

빈방이 하나씩 늘어나면서부터

여기까지가 사람의 경계라는 듯

골목은 폭염을 다시 들이고

인적 없던 골방마다 간간이 낯선 인기척들

걱정스레 쪽문을 밀치고 있다

 

이 시를 읽은 지 오래 되었다. 2013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이다. 만일 시인의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면 이 시는 현실의 문제에 눈 돌리지 않는 증언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고 보여진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한 시각으로 현장을 스케치하는 시인의 내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란한 비유의 함정에 빠져 시의 말을 공허하게 휘발시키는 시들이 몰려다니는 요즘 세태에 묵직하게 시심을 눌러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를 읽은 지 오래 되었으나 함부로 글을 올리기가 두려웠다. 1916년 병진년 생인 아버지의 고독한 죽음이 떠오르고, 고독사가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그날부터 시작된 천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몽골 평원의 유목민처럼 죽음을 앞둔 부모를 광야에 버려두고 떠나는 자식들과 하늘을 우러르며 독수리에게 제 몸을 던져주며 죽어간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의 순간이 겹쳐지며 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용기 있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