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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제목을 잃어버린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9. 5. 21:20

 제목을 잃어버린 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 2015.09.05 03:00

제목을 잃어버린 시

서울에서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해질 무렵 미친 듯이 노래 부르며 돌아왔네.
봉래산에는 속물이 너무 많기에
유희하며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지.

 

失題

大醉長安酒(대취장안주)
狂歌日暮還(광가일모환)
蓬壺多俗物(봉호다속물)
遊戱且人間(유희차인간)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일러스트

김가기(金可基)란 기인이 쓴 시다. 그는 생몰년도 알려지지 않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기행(奇行)을 일삼은 행적이 유명하다. 신선의 행적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서울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날이 저물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자칭타칭 신선이란 자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미친 듯이 노래까지 불러댔다. 어디서나 흔하게 눈에 뜨이는 술주정뱅이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시장 바닥에서 술에 취해 사느냐고 묻는다면 내 말해주겠다.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산에서 그대들은 살아본 적이 있던가? 내가 오래 살아봐서 잘 아네만, 거기도 속물들 천지일세. 선계(仙界)에서 벌어지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거리에 기가 막혀서 차라리 인간 세상에 내려가 살기로 했지. 건들건들 놀면서 여기 사는 게 겉은 고고하고 화려해도 실상은 천박한 속물들 틈에서 사느니보다 낫더군. 지금 세상 봉래산에도 속물 제법 많을 테니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적

 

시를 배우고 쓰게 되면 가슴에 응어리 진 분노와 증오가 사그러들 것으로 생각했다. 시인의 세계는 범인의 세계와는 다를 것으로 믿었다.재능이 없던 탓에 어렵게 시인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 겉맛 다를 뿐 속물의 세상인 것은 다름이 없었다. 명예를 좇고 권위를 내세우는 시인들을 어른으로 모시기에 나는 피가 불온했다. 숨어산 것도 아니고 애써 피한 것도 아니지만 명예와 명성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기쁨을 느낀다. 언감생심 , 언행일치를 행하기는 애시당초 글러먹은 일이지만 한 두분 마음으로 존경하는 시인 어른을 새겨두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시를 씀으로서 더러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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