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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내 생각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1. 21. 21:26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광릉수목원에 갔었다. 겨울이 막 삭막한 도시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어느 날 이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운집한 숲은 적막하였으나 그곳 또한 생명의 싸움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타세콰이어와 같은 활엽수들은 잎들을 떨구고 선정에 든 듯 하였으나 침엽수들을 여전히 바늘 같은 푸른 잎들을 내밀고 있었다. 나무들이, 숲들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는지 보려면 겨울이 되어야 한다는 숲 해설가의 설명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나무에 자리를 빼앗긴 메타세콰이어는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어린 엄나무는 온 몸에 가시를 박아 제 몸을 추스렸다. 피톤치트를 내뿜는 전나무 숲 아래에는 풀들이 자라지 않았으니 인간들의 건강에 그리 좋다는 피톤치트는 사실 그 나무들이 해충과 풀들의 접근을 회피하려는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숲에도 생노병사가 있어 이제 혈기가 돋는 젊은 숲이 있는가 하면 세월 따라 늙어 쇠퇴해가는 숲도 있으니 저마다의 본능과 재주를 다하는 뭇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광릉수목원에는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와 같은 잡식성 동물이 있는가 하면 고라니 같은 초식성 동물도 있었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 눈과 강열하게 마주친 것은 늑대였다. 세간의 비아냥과는 상관없이 음흉하게 보이는 푸른 눈빛이 내게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날렵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우울이 배인 회색 털은 도도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늑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습성을 가진 동물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하였으나 비정해 보이지 않고, 호랑이처럼 이기적인 단독자로 살지 않는다. 언제나 가족애로 뭉쳐서 집단을 이룬다. 짝을 지으면 평생을 같이 살고 암늑대가 먼저 죽어도 숫컷은 자신의 반려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을 마칠 때에는 암늑대가 숨을 거둔 곳에서 굶어죽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어느 가수가 새롭게 발표한 ‘늑대’ 라는 노래를 거듭 듣는다.

 

  우~우!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와 고독한 늑대의 아득한 거리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궁구했던 숙제였음을 나는 안다. 나무들 간의 치열한 자리다툼과 경쟁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사슬에는 증오가 없는데 사람과 사이에 들끓는 아귀다툼과 온갖 협잡을 견디지 못해 숨어들어간 것이 ‘시’라고 하는 소도蘇塗이다. 아직도 내게 있어서의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으며 늑대의 가족애와 같은 관계의 건강성을 담보하지 못한 위험한 동물이다. 이런 생각이 인간적 성숙을 방해하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나는 더욱 외롭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당연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로 귀환하려는 것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오규원이 그의 시 「용산에서」 읊었듯이 나의 시에는 근사한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생 生의 증언 밖에 없다.

 

  나는 가끔 ‘용산’을 생각한다. 남루하게 떠나고, 남루하게 도착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역사와, 과거를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기계적 욕망에 몸을 섞는 붉은 골목길과 그 길을 지나쳐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강변의 우리 집을 떠올릴 때면 근사하지 않은 생을 뒤엎는 환상을 꿈꾸던 청춘의 시절을 떠올린다. 불현듯 펜을 잡고 밝고 아름다운 그래서 융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는 시를 써보고 싶어진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시는 여전히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소통이 이 시대의 트랜드가 되어 있어도, 소통의 전제가 되는 유통 流通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시를 잘 써야 한다든가, 좋은 시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유통 말이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단의 은둔자가 되고 주변인이 되었다. 그 대신 나는 무아 無我와 진아 眞我 사이를 헤매는 삶의 모순을 증언함으로서 편견과 잘못된 신념으로 얼룩진 사유를 합리적 사유로 인도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합리적 사유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합리적 사유를 요약한다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가 언어로 이루어진 구축물이고 시를 어루만지는 자를 시인이라고 할 때 그 인 人은 언어를 속이지 않고, 언어를 속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절차탁마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수치를 무릅쓰고 초라하고 비루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인가!

 

  한 때 나는 시론이 없는 시인을 하찮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이 거룩한 세계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수단으로서의 시론은 마땅히 시인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반듯한 시론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다.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듯이,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를 체득하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까닭이다.

 

  끝끝내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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