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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친절한 사부, 고통 / 최영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2. 17. 21:35

 

우리들의 친절한 사부, 고통 / 최영철

 

1.

 

시인은 언어를 빚는 재능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태어난다. 철따라 반복되는 사소한 자연의 움직임도 시인에게는 크나큰 희열이나 절망일 수 있다. 평범한 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라도 시인의 촉수에 닿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평범한 이에게 날벼락 같이 닥친 파경도 시인에게는 담담하게 맞이하는 일상사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머지않아 세상이 절단날 것이라고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도 냉철하게 사태의 전후를 따져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사소한 사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다른 예지력을 가졌고 그래서 먼저 세계의 불화를 알아차리는 시인에게 고통은 일상화된 정서적 활동이다. 고통의 일상은 시인을 시인답게 하는 조건이며 시를 시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고통스런 상황을 잘 인지하고 그것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 시인에게 부여된 천부적 기질이며 책무인 것이다.

 

시인의 천형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을 벗어던지려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정작 그 고통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고통과의 공생이 깨지고 나면 자신의 존재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은 고통을 숙주로 찬란한 꽃을 피워 올리고 고통은 시인을 숙주로 만천하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리며 영역을 확장한다.

 

시인과 고통은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동업자다. 쌍방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는 의미를 획득할 수도 자신의 가치를 전이할 수도 없다. 그 둘의 아름다운 협업은 강제로 짐 지워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자청한 터라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그 단단한 속박 앞에서 시인은 고통에 경배하고 고통은 시인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 속에 있을 때 행복하고 편안하며 고통으로부터 놓여났을 때 오히려 불행하고 불안하다.

 

2.

 

고통의 기원은 기독교와 불교에서 서로 상반되게 말해진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고통은 신의 뜻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데 대한 형벌의 결과이며, 불교에서의 고통은 유한한 생을 갖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 석가모니가 바라나시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처음 행한 설법의 주된 내용은 ‘인생은 고(苦)’라는 것이었다. 고는 곧 괴로움이며 고통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괴로움이며 그것에 여덟 가지가 있다고 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첫 네 가지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미운 사람과 만나며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하고 온갖 욕망이 들끓는 괴로움이 그 다음 네 가지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근원을 번뇌와 집착과 탐욕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없애는 것이 불교 수행의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괴로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갈애(渴愛)를 벗어던지고, 그 줄기라고 할 만한 집착을 자르고 그 뿌리라고 할 만한 번뇌를 끊어버려야 한다지만 범인에게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죄를 뉘우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비한다면 스스로의 개과천선과 깨달음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불교의 논리는 냉혹하기까지 하다. 한두 번의 생애로는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기독교에서 고통은 신이 내리고 신이 거두어가지만 불교에서의 고통은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 의해 형성되고 소멸된다.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세 가지가 탐욕(貪慾) 진애((瞋?) 우치(愚癡)인데, 그것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규정한다. 시인은 불교에서 권장하는 그 ‘알아차림’에 걸맞는 예민한 촉수와 자의식을 타고난 자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불교의 가르침과 시인의 추구는 서로 상반된다. 불교의 완성이 고통의 소멸인 것처럼 시의 완성이 반드시 고통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고통은 해소하고 소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깊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창작의 원천이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을 낳고 끌어안고 가지고 놀기를 즐긴다. 그것을 키우고 확산하고 재생산한다. 고통이 이제 그만 가버리려고 하면 조금만 더 놀다가라고 붙들어 앉힌다. 그렇게 불러 세운 고통과 교접하고 한판 신명나는 춤판을 벌이고 소곤소곤 밀담을 나눈다. 그러다가 진저리를 치며 이제 그만 가버리라고 꼴도 보기 싫다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멀어진 고통을 찾아 더듬더듬 밤길을 나서기도 한다.

 

시인은 미망을 즐기며 미망 속에 있으려고 하는 존재, 번뇌를 즐기며 번뇌 속에 있으려고 하는 존재들이다. 세속적 욕망에 취약하고, 그것을 향한 끈질긴 추구가 없다는 점에서 불교적 자성에 이를 소질이 다분할 것 같으나 그렇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세속의 가치는 쉽게 포기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훌훌 털어내지 못해 안달인 고통을 시인은 도리어 더 힘차게 바투 쥐려 한다. 시인의 절필은 이 지긋지긋한 고통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옥 행위일 것이다. 더러는 탈옥에 성공해 시인의 굴레를 벗었고 더러는 어두운 밤길을 가듯이 더듬더듬 그 길을 가고 있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망이 아니고 무엇이랴.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네 눈을 빼버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예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고, 번뇌를 끊어버리라고 한 부처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오히려 시인은 그 미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 한다.

 

시인이 당면한 고통은 이처럼 고통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다. 부처는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려면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명상하라는 이른바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쳤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는 오히려 시인이 경계해야 할 요소들이다. 시인은 좀 다른 위치에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표현해야 할 소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바르게’는 모든 욕망이 제거된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쫓아가는 방편이지만 ‘다르게’는 정도(正道)를 거스르고 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절망의 경지이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 그것에 먼저 가닿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낳은 절망이다. 시인의 고통은 그런 애타는 갈구가 만든 것이다. 거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 더해지면서 고통은 쉬임없이 확대재생산된다.

 

고통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해야 하는 고통은 환부를 스스로 도려내는 고통에 견줄 만하다. 시인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가진 형벌이 바로 이것이다. 일찍이 생의 허방을 짚은 자, 그 허무를 작품의 성취로 만회하려는 자, 그리하여 불멸을 꿈꾸어 보는 자. 그 가당찮은 욕망 앞에 모든 고통은 참고 견딜만한 과정이 되는 것이다. 변화 소멸하는 존재가 변화 소멸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거머쥔 불가피한 선택이다. 범속한 삶을 사는 자의 고통이 현재의 것을 지키고 늘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면 시인의 고통은 현재의 것을 허물고 의심하고 새로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3.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김지하 「푸른 옷」전문

 

 

시인은 감금되었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푸른 옷이 푸른 바다였으면, 하늘을 나는 새와 흐르는 물과 바람이었으면 하는 희구로 충만해 있다. 구속된 상태가 만든 열망이다. 여기서 감옥은 자유를 가두고 꿈과 새벽과 영롱한 나팔꽃, 햇살과 푸른 하늘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보다 절실하게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구속의 고통은 상실을 준 것이 아니라 더 큰 열망으로 나가는 통로를 열어젖혔다. 시종일관 자유로운 상태, 시종일관 구속된 상태에 놓인 상황은 자유도 없고 구속도 없다. 자유의 단맛과 구속의 쓴맛을 알지 못한다. 자유를 잃었을 때라야 자유의 단맛을 실감하게 되고 구속에서 놓여났을 때라야 구속의 쓴맛을 자각하게 된다.

 

구태여 감옥과 같은 엄혹한 구속이 아니어도 좋다. 국가, 사회, 직장, 학교, 가정 등, 이런저런 집단에 의해 지금 우리는 감금된 일상을 살고 있다. 크고 작은 일탈과 자유의 단맛은 사실 쓰디쓴 속박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즐거움은 모든 부자유와 속박에 빚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은 곤궁한 날들에 빚지고 있고 사랑의 열망은 이별의 상처에 빚지고 있다. ‘푸른 옷’의 속박은 ‘푸른 옷’의 자유를 낳았다. 이처럼 상실의 고통은 자유의 다른 이름인 꿈과 새벽, 영롱한 나팔꽃, 햇살, 푸른 하늘 등의 실재를 보다 확실하게 시인의 마음에 각인시켰다.

 

모순투성이의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심심하였으리

그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내 젊은 날은 개울 옆을 지날 때처럼

밋밋하였으리 무료하였으리

갯바닥 다 드러나도록 모조리 빼앗기고 나면

안간힘 다해 당기고 끌어와

다시 출렁이게 하는 날들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늪처럼 서서히 부패해갔으리

고마운 모순의 날들이여

싸움과 번뇌의 시간이여

 

--도종환「밀물」전문

 

불행한 천국, 행복한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루한 복지국가 보다 어수선하고 지리멸렬해 보이는 우리나라도 그런대로 살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시인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이다. 별다른 굴곡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나날은 나른하고 무의미해서 시인에게 지옥과 같을 것이며, 끝없는 소요와 분란으로 굴곡진 나날은 시인을 각성하고 고무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불편과 고통의 순간들은 시인의 의식을 민감하게 자극한다. 불편하지만 파란만장하고,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지옥. 시인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조건은 없을 것이다. 시의 모반과 모순 어법은 거기서 탄생한다. 시에는 찬탄과 비탄, 희망과 절망, 그리움과 망각이 모순 상태로 뒤엉킨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처럼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만 모순의 벼랑 끝 전략으로 언젠가는 실현가능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 모반과 모순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에게 주어진 고통이다.

 

시인은 모순투성이의 삶을 자각하면서,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서, 모조리 빼앗기고 다시 시작하면서, 차츰 강화되고 두터워지며 다른 곳에서 만나지 못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고통은 험난한 바다의 출렁임과도 같아서 항해를 위협하는 두려운 요소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쉼 없는 동력으로도 작용한다. 시시각각 자신을 덮치는 모순과 이율배반이 없다면 시인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고요한 무사안일과 정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도록 시인은 분열과 번뇌를 제 몸 속에 받아들이고 벼리며 그 칼날이 가장 예민해졌을 때 침묵을 깨고 앞으로 나아간다. 정지된 것, 고요한 늪의 평화는 심심하고 밋밋하고 무료해서 썩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고통 받는 모든 영혼이 구제될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기로 작정한 지장보살처럼 천국이 아닌 지옥에 머물기를 즐겨야 한다. 모순의 나날을 받아들이고,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고, 밋밋하고 무료한 일상을 걷어차야 한다. 구원은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이루어지는 것, 시인이 있을 자리 역시 초탈이 이루어지기 전의 질척한 진창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백 년 동안 장롱 아래 깔려 있듯이, 깔린 채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을 빨듯이,

 

예를 들면, 흡혈귀 이상으로 흡혈귀가 되어가듯이, 하루도 남의 피를 빨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예를 들면,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를 후벼 먹듯이, 하나뿐인 출구가 매독 걸린 입이듯이,

 

예를 들면, 그것의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이것의 피를 묻히듯이, 뭔가를 안 하려고 뭔가를 하듯이,

 

예를 들면, 주방 기구와 섹스하듯이, 너무나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 그것이 너를 삼키듯이 토해내듯이,

 

예를 들면, 어제가 기억나지 않듯이, 어제 뭐 했지? 어제 뭐 했더라……? 1분도 기억나지 않듯이.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 마야코프스키의 「나 자신에 관하여」 중에서.

 

--김언희 「예를 들면」전문

 

고통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빈틈을 조금도 허락지 않으려는 듯 이 시가 짜놓은 고통의 날줄과 씨줄은 촘촘하다. 한번 펼친 고통의 날줄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 위에 보다 더 강력하고 질긴 씨줄을 걸어놓았다. 백 년 동안 장롱 아래에 깔려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깔린 채로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을 빨아야 하고, 하루도 남의 피를 빨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흡혈귀를 넘어서는 흡혈귀가 되어야 하며, 하나 남은 눈동자는 멀어가는 중이고, 유일한 출구인 입은 매독에 걸린 상태다. 소통과 교접은 불가능해졌고 기억은 흐릿해졌다. 책임질 일도 그것을 반추할 필요도 없는 고통의 무한 행진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일말의 희망마저 차단한다.

 

고통의 경험은 불청객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 대부분 그것을 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어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시인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오신 손님처럼 붙들고 더 강한 고통을 내놓으라고 주문한다. 고통을 언젠가 소멸될 한시적인 불행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씨로 세상 모든 불행의 불씨를 불러들이고자 한다. 그것은 아마 희망을, 고통을 힘겹게 밀어낸 자리에 피는 꽃이 아니라 고통이 완전히 소진된 자리에 피는 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불씨를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것은 고통의 해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희망은 고통을 물리친 지점이 아니라 고통과 동거한 자리에 있다. 희망은 지금과 전혀 다른 꿈이어야 하고, 전혀 다른 꿈을 꿀 수 있으려면 일단 고통의 막다른 지점까지 가 보아야 한다. 그 막막한 지점으로 자청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이 흡혈귀 같다. 고통이라는 영양소를 공급 받으러 가는 흡혈귀.

 

몸살로 여러 날 아프다 아프니까 내가 살아 있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맥박은 뛰는지 숨은 쉬는지 몰랐다 아프니까 할딱거리는 내가 들렸다 할딱거리는 내가 만져졌다 약을 타려고 줄선 구부정한 뒤통수가 보였다 살려고 죽을 퍼 담고 있는 쪼그라든 부댓자루가 흔들렸다 아프니까 며칠 전 들은 아프리카 생각이 간절했다 할례를 한 엄마 품을 통과하느라 작게 작게 만들어진 아이들이 어두운 교실 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 책을 읽고 있다 폭삭 늙어버린 아버지들이 밀림으로 가고 있다 아프니까 아프리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처녀들이 더 새까매졌다 아프니까 아프리카가 된 것인지 아프리카니까 아픈 것인지 아프리카가 아프니까 나도 아픈 것인지 내가 아프라고 아프리카가 한 발 먼저 아팠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니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해주지 않는다 나도 이제 아프니까 어느 날 그만 아프리카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처럼 새까맣게 누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만 번득이다가 그것도 안 되면 이빨만 희게 빛내다가 아프리카를 지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 최영철 「아프리카」전문

 

 

 

 

시는 고통을 관리하는 양식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또한 오랫동안 동행한 고통의 등을 토닥이며 새로운 길 하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고통을 추궁하고, 고통에 힘을 실어주고, 고통을 발가벗기고, 고통에 그럴 듯한 옷 한 벌을 입혀주는 일이다. 시인은 조금 아팠으나 그것을 포장하고 확대하면서 더욱 아프게 된다. 하찮게 여기던 일,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 심각하고 슬픈 일이 된다. 그것의 파동을 어루만지고 그것에 이름을 달아주는 것이 시인의 과업이다.

 

모든 존재는 아프고 불편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존재가치를 드러낸다. 가전제품을 비롯한 여러 집기들, 집과 자동차, 돈과 명예, 사랑과 우정, 자기 자신까지도 그것의 존재를 보다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은 고장나거나 상실되었을 때다. 나의 살아있음 역시 신열과 할딱거리는 가쁜 숨을 통해 비로소 확인된다. 찬찬히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게 되는 것도 몸이 아플 때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몸이 아플 때 지구 저쪽편의 또 다른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고통의 공덕이다. 고통이 놓아준 다리를 건너서 먼 나라의 아픈 이웃들을 만났으니 고통이야말로 나와 이웃의 가교이다. 시인은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타자를 향해 걸으며 세상을 끌어안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빈집」전문

 

 

 

 

몇 잔 술이 오가면 구성지게 노래를 잘 불렀던 시인이 생각난다. 80년대 말 인사동 밤거리에서 몇 번 어울렸던 그는 예의가 발랐다. 앞길 창창한 일간지 기자로, 곧 나올 첫 시집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던 그가 후미진 삼류영화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될 개연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날 밤 빈소가 마련된 적십자병원 영안실 마당에서는 충격을 가누지 못한 동료 시인들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닥치는 대로 쥐어박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순간을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외면만을 보았을 뿐 내면에 도사린 깊은 상처는 도통 보지 못했다. 피차일반이었다.

 

그날 빈소에 모인 시인들은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거나 하소연할 수 없는 고통을 한 아름씩 가슴에 안고 있었고, 동시다발로 그것이 분출되자 난투극이 벌어졌다. 끝없는, 원인 모를, 누군가에게 꺼내 보일 수도 없는 고통의 천형이 서럽고 미웠을 것이다. 이 시의 내용으로만 추정해본다면 기형도의 죽음은 실연의 고통, 공포에 가까운 창작의 고통이 빚은 결과였다. 시의 열망이 뜨거워질수록 그 고통은 가증되고 빈집에 갇힌듯한 불안과 소외는 끊임없이 시인을 괴롭혔으리라. 그런 상실과 결여의 고통과 싸워야 할 두려움이 시인을 짓눌렀을 것이다.

 

인용한 시편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인에게 있어 고통은 외부와의 불화로 인해 생겨난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자기 갱신을 위해 내면에 붙잡아두거나 끌어들인 것, 또는 자가발전을 통해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외부에서 가해진 「푸른 옷」의 부자유가 더 넓고 높은 ‘푸른 옷’의 자유를 가능하게 했듯이,「밀물」처럼 쉼없이 다가온 고통의 나날이 없었다면 출렁이는 오늘의 생명력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안온한 일상을 난도질한「예를 들면」의 서슬 퍼런 자학이 없었다면 우리의 의식은 벌써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것이고, 「아프리카」와 같이 타자와 나의 고통을 동일시하거나「빈집」과 같은 상실의 변주가 있어 세상의 황량한 빈 구멍들은 조금씩 메워졌을 것이다.

 

4.

 

인류가 당면한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 지구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 억압과 소외와 빈곤의 문제 등은 인식하기에 따라 혼란한 상황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사람 사는 곳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일상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시인이 과민해서 세계의 위기를 성급하고 과장되게 발설하는 점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발언을 호들갑스럽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시인의 발언이 성급하고 과장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위기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문 앞에 당도한 저 불길한 조짐, 소리 소문 없이 진군한 저 불화의 기운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따스한 봄바람을 먼저 감지하고 호들갑을 떨듯이 시인은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저 어둠의 징후를 먼저 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시인에게 세계의 찬란한 환희를 먼저 맛보게 하는 동시에 세계의 불화도 먼저 감지하는 고통을 주었다. 시인이라면 마땅히 환희보다는 불화에 더 잘 반응해야 하겠지만, 갈수록 그 촉수가 무디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인 스스로 그 촉수를 퇴화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고통을 반가운 손님처럼 수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문전박대하는 것 또한 시인의 도리가 아니다. 신제품으로 개발된 식약품을 시음자가 먼저 맛보듯이 시인은 세상의 고통을 먼저 복용하고 시음해 보아야 한다. 이로써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세상은 소수의 고통으로 큰 재앙을 예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들마저 잠수함 속의 토끼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인간의 멸망은 훨씬 더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다.

 

 

 

5.

 

십대 중반의 1년 남짓, 내 몸은 가슴에서 발끝까지 딱딱한 석고붕대에 묶여 있었다. 심각한 사고가 아니었음에도 골절된 나의 대퇴부는 수술 후유증으로 쉽게 접합되지 않았고 병원 측에서는 계속 이런 상태로 가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장 왕성한 성장기에 찾아온 이 위기는 무척 느닷없는 불청객이었지만 곧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상황을 거부하고 못견뎌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난관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의 운명은 그것을 수락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만 묻고 있었다. 군말 없이 나는 그 상황을 수락했고 긴긴 면벽의 시간이 흘렀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바로 옆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함성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간호사는 항생제를 수도 없이 놓았고 의사는 무료하게 상처를 닦아주고 갔다. 나는, 이왕 머물다 갈 요량이면 좀 더 가까이 바짝 다가와 앉으라고 그것들을 내 옆으로 끌어당겼다. 따져보면 내가 자청한 일인지도, 오래 전에 예정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2년 전쯤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다. 더 이상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는지 처방된 진통제와 진정제를 우리 몰래 침대 밑에 버리셨다. 극심한 공포로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말없이 수락하는 과정에서 육신의 통증 따위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감당한 아버지는 이미 시인이셨다.

 

고통은 흥얼거리며 삶의 진창을 건너가야 할 시인에게 주어진 두둑한 노잣돈이다. 그 길이 질척거리고 멀다 해도 주머니가 비지 않는다면 시인은 부지런히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고통은 아프지 않다. 힘들지도 않다. 양수처럼 출렁이는 고통이 없다면 세상은 시인에게 사막과 다름없을 것이다. 일찍이 생의 허방을 짚어버린 나의 서글픈 청춘에게도 고통은 변하지 않는 동무였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심심할 뻔 했다. 나의 잡다한 글쓰기는 고통과 동행하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자리를 바꾸어가며 여전히 나를 닦달하고 있는 고통이 있어 즐겁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성취의 모태 역시 고통이었다. 도스토예스프스키를 고무한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고 베토벤을 고무한 것은 계속되는 실연과 청각 손실의 고통이었다. 예술가에게 지나친 행복과 성취는 결과적으로 불행일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친 불운과 불행은 불후의 성과물을 이룰 터전이 될 수 있다. 시인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는 고통에 빚지고 있고 모든 창조적인 생산물은 결핍이 만든 엉뚱한 성과물이다. 결핍을 자각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가 거둔 결과물. 그것은 불균형과 불안정, 불편부당과 불만족과의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이다. 시인은 고통의 수렁에 서슴없이 발을 담글 줄 알며, 그것을 잘 포장하고 치장할 줄 안다. 시의 성패는 스쳐가려는 상처와 고통을 자기 곁에 얼마나 잘 붙들어두느냐에 있다. 고통을 얼마나 잘 요리해서 독자의 식탁에 올리느냐에 따라, 하찮은 상처를 어떻게 부풀리느냐에 따라, 엄청난 비극을 어떻게 사소한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시는 성공하고 실패한다. 시인은 필요하면 언제든, 뚜벅뚜벅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남의 고통까지 등짐으로 지고 먼저 저 산마루를 올라가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재검토하는 좌표가 된다는 점에서 고통은 시인이 공손히 받들고 섬겨야 할 사부님이다. 그런 의지가 있는 시인에게만 고통은 친절하게 다가와 생의 비의를 살며시 보여주고 간다.

 

<출처: 최영철의 맛있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