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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사라진 한국의 시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2. 4. 23:52

 

독자가 사라진 한국의 시단

 

나태주 (시인)

 

제가 처음으로 시를 공부할 때인 1960년대 초, 시단의 가장 큰 화두는 난해시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의 시가 독자들에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까닭이 독자에게 있느냐, 시인 자신에게 있느냐, 따져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앙의 대형매체(예를 들면 한국일보)들이 이문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공개토론을 하면서 시인과 독자의 생각을 끌어내고 그 해결방안을 논의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그 때의 결론은 독자들보다는 시인들 편에 그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50년,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저 자신 1971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되었고 또 40년, 한국 시단 말석에 발을 묻은 현역으로 살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언제든 현재의 삶은 고달프고 절망적이고 힘겨운 법이지만 오늘날같이 한 사람의 시인으로 바로서서 살기가 힘겨운 때가 없었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냉엄한 눈으로 보았을 때 오늘날 한국에는 시인도 없고 시인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있다면 시 비슷한 글이 있겠고, 시인 비슷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유사품으로서의 시, 껍데기로서의 시인만 있다는 말이지요, 본격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의 시는 너무 까탈스럽고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비밀장치가 많아서 일반 독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몇몇 시인들의 시는 또 지나치게 상업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독자들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도는 흥행사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반성해보자는 목소리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저 60년대의 황막한 시대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어떠한 사람이어야하고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점이 없습니다. 시인은 시인들대로 따로 놀고 독자들은 독자들대로 따로 노는 상태입니다. 누가 시인이고 누가 독자인지 그 분간조차 없습니다. 말하자면 독자다움도 없고 시인다움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두가 저 잘나서, 너도 나도 시인인 세상입니다. 여기서 시의 위의성 威儀性, 시의 시다움의 문제가 강하게 대두됩니다. 당연히 시인의 시인다움, 시의 시다움을 위한 노력과 고민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 다음은 문학매체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문단에는 문학매체가 너무나 많습니다. 과영양화 상태입니다. 이제 한국은 경제든 교육이든 문학이든 과다함, 지나친 풍요가 문제입니다. 특히 시문학 매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시를 쓰는 저 자신조차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문학매체는 시단(또는 문단)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일부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줍니다. 문학의 공기 公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학잡지란 실상 동인지 그 이상이 될 수 없고 그것은 패거리 의식이 만들어 낸 집단이기주의자들의 또 다른 자위행위에 다름이 아닙니다.

웬만큼 이름 있고 실력 있는 시인치고 문학매체 하나쯤 거느리고 있지 않은 시인이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문학매체는 시인의 권위의 상징처럼, 문학권력의 아성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실정이기에 어떤 잡지도 공중의 동의를 끌어내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독자들의 외면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또 한국에는 시 독자들 수 보다 문학잡지의 수가 많고 시인의 수는 더욱 많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인들만 서로 까불며 서로 잘난 척 시를 읽는 것이 오늘의 시단 풍경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이버매체의 영향입니다. 사이버 매체는 참으로 새로운 형식의 매체로서 매우 훌륭하고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페이퍼 북이 가진 제한성을 충분히 극복하고 대체해 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구원투수입니다. 그래서 재주 있는 사람들은 그 쪽에 첫째가 지나치게 찰라적 이라는 점입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항구성에 문제가 있고 그 방향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제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이버 공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작품의 정확성 부재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부정확하게 올린 자료들이 부유물처럼 떠도는 것이 사이버 공간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다고 판단하여 올린 한 편의 작품을 이 사람 저 사람 퍼 나르다보니 정작 좋은 작품이 묻혀버리고 누군가에 의해 운 좋게 한번 빛을 본 자료나 작품이 그 사람의 대표작처럼 행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작가에 대한 접근이 단편적이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으로의 문제점은 위작 僞作의 문제입니다. 웬만큼 명성이 있는 시인의 이름을 쳐놓고 검색해 보면 위작이 수두룩하게 나타납니다. 누군가 유명한 시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의 작품을 사이버 공간에 띄워 넣은 것이지요. 이 점은 매우 화가 나고 답답한 일입니다. 누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지 밝혀내기 또한 쉽지 않습니다. 제 3의 독자가 보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정말로 비슷하게 닮은 위작을 만들어 올리는 데는 혀가 내둘러지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법으로 시를 읽고 공부하고 또 시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완벽한 해답을 내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날 시인 편에서든 독자들 편에서든 가장 커다란 문제는 시를 읽는 기쁨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시를 읽어도 기쁘지 않고 머리가 아프니까 시를 읽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시를 읽는 기쁨을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역시 이를 위한 시인들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공자님의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소통의 문제라고들 입을 모으는데 시에 있어서도 시인과 독자와의 소통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 역시 시인들 편에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문제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상호 소통이 안 되면 오해가 생기고 벽이 생기고 끝내 단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합의점이 없게 됩니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데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현실(400만 유태인 학살)이후 (이런 비극적인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다)라고 까지 극언했다고 하는데 이런 극단적인 상황과는 관계없이 오늘의 현실은 정말로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시는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시는 장식품이나 사치품이 아닙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시야말로 시 쓰는 사람에게는 생필품이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시, 바로 그것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해결이 안 될 때만이 시입니다. 오로지 시 쓰는 행위만이 그의 유일한 능력이요 발언일 때 비로소 시인은 시인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는 절대로 시가 아닙니다. 시인도 아닙니다.

 

시 쓰는 사람은 오직 시 쓰는 일로서만이 살고 죽습니다. 저는 105일 동안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면서 투병생활을 할 때,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 시를 쓰는 기쁨과 보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가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가진 것입니다. 시는 산문과 그 질서부터가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격하게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신과 산문가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평소 김남조 선생님이 후배들에게 즐겨 들려주신 충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는 질투심이 많은 존재라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다 돌아오면 쉽게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려 하지 않는다

 

주:

1. 이 글은 2011년 8월 20일부터 21일간 열렸던 충남시인협회 여름세미나의 주제발표문이다.

2. 이 글은 다시 『포에지 충남』 (충남시인협회 간, 2011.11.30)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