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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8. 23:32

 

초현실주의

 

옥타비오 빠스 1914 -1998

 

이번 강연회를 주최한 사람들이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가 우리 시대의 주요한 테마의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퍽 의미 있는 일입니다. 날마다 서구문화가 구축한 집이라는 것이 하나의 감옥이요 피 흘리는 미궁, 내지는 집단적인 도살장이라는 느낌이 하루하루 더 확실해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을 일단 미루어 두고 다른 하나의 출구를 찾는 것 또한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까지 완전히 우리 사회가 어쩔 수 없는 고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해 온 문제를 근본적으로 옆에 젖혀두고 또한 거기에 출구를 찾겠다고 발버둥치는 안타까움도 일단 보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지요. 어떤 구원을 찾아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진정한 길>을 찾ㅇ서 간다는 말이 옳을 겁니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로보트>의 세계에 대항해서 <초현실주의>는 언제든지 우리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우리의 욕망의 도깨비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5,6년 전만 해도 이런 연설은 여기서 불가능했을 겁니다. 엄중한 평론가들께서 - 직업은 매장군, 항상처럼 너무나도 바쁘신 양반들 - 초현실주의란 벌써 철지난 유행이라고들 했으니까요. 이미 사망 신고서도 심심치 않게 이 정신 문화의 공증인들에 의해서 접수, 공표되었지요. 아무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초현실주의는 이제 세기 초의 미래주의니 입체파니 입체파니 이메지즘, 다다이즘, 울뜨라이즘 따위와 함께 영원한 잠 속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무슨 문학 역사가나 하나 나와서 우리 모두를 마음놓고 일상에 종사할 수 있도록 간략한 조사 정도만 한 마디 하셨으면 될 뻔 했었습니다. 일상에서 끌어낼 수 있었던 신비는 죽은거죠. 사실상 한 번도 존재한 일조차 없었던 겁니다. 존재한다고 하면 일상만이 존재해 왔죠. 노동의 윤리와 「피 땀 흘려 일해서 먹고 살라」는 소리라든가 고전 인본주의의 고착된 사회와 위대한 원자학의 발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체는 살아 있었습니다. 너무 말똥말똥하게 살아서 무덤에서 튀어나와 다시 우리 눈 앞에 선 겁니다. 그 무시무시하리만큼 청순한 얼굴로 느닷없는 폭풍우 같은 모습을 하고 신들린 숲 속의 선녀의 모습과 그 얼굴 그대로 불타는 눈초리로 나타난 겁니다. 그 광란에 미소짓는 소녀를 따른다는 것은, 그녀와 함께 황금빛과 초록으로 아롱진 푸르름의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은 나무마다 살아서 노래하는 기둥인 것을 보는 순간이요 바로 우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작업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른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잃었던 힘을 되찾아 떠나는 길, 그것입니다. 그 힘은 -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는 과학의 힘보다 더욱 위대한 것으로- 우리 하나하나의 내부 속에 아직 때묻지 않은 무엇입니다. 어떤 숨겨진 비밀이라기보다 한 방울의 이슬로 다이아몬드를 빚는, 그 다이아몬드로 신데델라 공주의 신발을 만드는 신비한 힘입니다. 이 힘은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이루는 원동력으로 소위 상상과 욕망이라고 하는 거지요. 인간은 상상의 존재이며 그의 이성이라는것도 사실상 끝없는 상상의 하나의 형태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보다 더욱 나아간다는 뜻이요, 더욱 더 먼 곳에 자신을 투영하여 끝없이 펼쳐나간다는 뜻이니까요. 본능적으로 상상하는 존재인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의 형태로 이 모든 우주를 변형시킬 만큼 힘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꿈의 현실화, 즉 살아있는 하나의 이미지 자체의 출현을 열망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욕망에 자극받아 그 영상과 혼합하기를 원하고 동시에 스스로가 영상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사랑의 태양 아래 쉴새 없이 부서지고 재생되는 육체들, 메아리들이, 거울 놀이, 노발리스의 금언은 「인간이 바로 영상이다」 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가 모토로 삼은 이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호적인 관계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즉 「영상은 인간에게서 육체를 얻는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는거죠.

 

현대 정신의 증후를 이해하려면 예를 들어 과거 독일이 낭만주의나 영국의 고틱 소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끝없이 초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향들이 역사를 통해 존속해 왔다는 점을 수긍하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와 와서 끊겨졌다고는 볼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가 초현실주의가 발생 초기의 경이적인 효력을 잃고 하나의 수사법이나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되겠습니다만 초현실주의는 우리 시대의 소산인 만큼 꼭 시간 앞에 불변하는 원리라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시대가 초현실주의적인 광명의 세례를 받고 그 불곷과 돌멩이의 풀밭이 온 세기를 뒤덮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찬란한 상채기는 금세기가 사라지기 전에 쉽사리 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찬연한 명작들을 산출했고 그 작품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포기하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귀중한 것들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초현실주의는 이런 명작의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의 문학 주의로서만이 아니라 (결국 주의나 파벌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시학 이상의 (비록 초현실주의의 근본적인 명제는 시적인 착상, 즉 영감의 자유에서 온 것이지만)종교나 정치 파당을 초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초현실주의는 인간 정신의 하나의 자세입니다. 어쩌면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인 가장 강력하고 은밀스러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아르까노 Arcano17』 앙드레 브루통은 다른 별들을 무색하게 하는 별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아침의 샛별, 루시퍼 Lucifer 다시 말해서 <반항의 천사> 별 말이지요. 그 빛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유와 사랑과 시라고 합니다. 이들 하나하나의 요소는 다른 나머지 둘의 요소에 각각 영향을 미치는데 이들 세 빛은 마치 하나의 별인 것처럼 서로 엉켜지고 함께 반사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시와 대해서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됩니다. 다다 Dada에서 출발, 지축을 흔들어 놓은 전적인 반항의 운동 초현실주의는 기성의 기독교적이며 이성적인 문화가치와 동등한 파괴적인 활동을 들고 나선 것입니다. 다다이즘과는 다르지만 초현실주의도 역시 현실을 변화시켜 보다 진정한 현실로 환원시키겠다는 혁명적인 과업입니다. 초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유에 대한 이념도 아니지요. 오히려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운동이라고 할까요. 말하자면 인간이 현실, 아니면 사실적인 것에 직접 몸으로 부딪칠 수 있는 그 기본 자세를 실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초현실주의의 개념은 현실에 대한 시적인 인식과 그 변화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되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시적인 행위는 다시 하나의 마술적인 작업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현실세계는 물체나 실체의 총체입니다. 현대 이전에는 그 세계가 어떤 의도, 말하자면 신의 의사로 지배된다고 보았지요. 인간이나 자연, 그리고 사물들은 그들 자신보다 더욱 초월적인 어떤 것에 지배받고 있었습니다. 즉 어떤 가치를 갖고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유용성의 개념은 - 다름 아닌 전래의 善의 개념의 전락된 형태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찾는 현실에 대한 관념을 지배해 왔습니다. 우리 세계를 이루는 물체나 실체는 이제 유용한 것을 빼놓고도 쓸데 없는 심지어 유해한 것으로 되고 말았지요. 현대에 있어 이 세상의 개념이란 이런 광대한 도구라는 것 밖에 아무 뜻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이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엇을 위한 어떤 것.....즉 우리 모두가 하나의 도구로 화한 겁니다. 그리고 그 사회 층계의 가장 윗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자들도 역시 이 어마어마한 파괴의 기재를 움직이는 도구밖에는 아닌 겁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연장 밖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파편을 먹고 사는 허공에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초현실주의는 바로 이런 세계에 대한 반항으로 나온 겁니다. 세상이 선과 악으로 갈라지고 성스러운 것과 허무로 찌든 세계로 이해되는 것을 초현실주의는 반대합니다. 바로 여기에 초현실주의의 반기독교적인 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유용한 것은 무용한 것의 총합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을 거부합니다. 거기에 초현실주의의 반자본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윤리와 유용성의 개념은 초현실주의에겐 무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는 세상을 순수과학자처럼 관중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가치관념을 떠나 벌거숭이 물체나 물체의 집단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물체를 그 자체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항상 그것을 보는 눈에 비춰진 현실이며 그것을 보는 눈에 의해 다듬어진 현실이거든요. 물체는 그것이 하나의 환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화산 속의 군주처럼 갑자기 형태를 달리하여 다른 것으로 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에 따라 양초처럼 부드러워질 수도 있고 그것을 만지는 손에 따라 이토처럼 보드라와질 수도 있습니다. 물체는 개관이 아니라 주관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르님 Arnim의 말처럼 「우리의 상상의 눈이 본 것과 현실의 눈이 본 것을 아프게 어루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분명히 같은 눈인데 제각기 또다른 힘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들이지요. 이리하여 이 관대한 현실의 변질 작업은 시작됩니다. 욕망이 아들이 바로 초현실주의의 물체입니다. 산들의 의회가 다시 거인들의 저녁상이 되고 벽의 얼룩이 생명을 얻어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건 한 때의 새의 무리가 되어 그 무서운 부리로 쇠사슬에 묶인 아름다운 여인의 배를 찢어발기는 것입니다.

 

꿈의 이미지는 이런 현실의 반란에 있어 일종의 몇 가지 전형을 제시합니다. 꿈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른 유사한 유사한 상태, 즉 광증이나 비몽사몽의 상태에서도 우리의 현실의 비젼에 대한 재구성 내지는 하나의 파격적인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계획에 뜻을 두고 엘루어드나 브레똥은 그들의 책 『無原罪의 受胎』에서 정신병 환자의 생각을 재생한 일이 있습니다. 이 시기쯤에 달리 Dali는 『비평의 편집증』 상태에서 글과 그림을 그리고 아다공은『꿈의 파도』를 쓰게 됨니다. 사실 이 모든 시로는 사실(현실)을 부서한다는 이미지의 범람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입니다. 이런 경이적인 이미지의 출현을 성취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평범한 사물을 그 습관적인 위치에서 잠깐 옮겨놓는 일입니다.

(가령 하나의 재봉틀과 우산 하나를 박제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든지 하는 것). 거기에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하면 유모어입니다. 즉 이 세상의 부조리에 의식은 엉뚱한 답변을 하는거지요. 거기에 유모어는 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일종의 타협을 성립시킵니다. 모든 이런 방식은 - 다른 여러 가지 방법도 있지만 - 미학적인 성격만을 띤 장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목적은 차라리 충분히 저항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의미를 잃어가는 문화가 가장 진실하고 유일한 것으로 우리에게 강요되고 있는 현실을 파괴하자는 것이었죠.

 

이런 작업의 파괴적인 성격은 사실상 첫 번째 태도에 불과합니다. 그 목적이라고 하면 현실에 껍질을 벗기우고 마침내 그 본 얼굴을 찾아내보자는 것이었지요. 「 존재는 스스로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 」고 한다면 시는 그 숨은 얼굴을 다시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어떻든 어떤 기회를 만나게 될 때 그 숨겨진 현실은 상식과 일상의 무덤에서 일어나 인간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열락의 순간, 처음이면서 단 한 번인 영원한 한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정말 우리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처음 유모어 밖에 아닌 모습에서 상상을 통해 다시 의미를 얻는 세계는 이제 하나의 <도구의 한계>를 벗어나 또 하나의 磁場의 세계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살아 있고 모두가 이야기하고 모두가 눈짓을 하는 세계, 물체와 말들이 어떤 신비스러운 부름을 따라 서로 뭉치고 헤어지는 경지, 벽을 침범한 담장이가 멜루시나의 금빛 파란 머리칼이 되는 순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원시인들에게처럼 하나가 되고 모두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는, 모두가 악령과 신령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결국 하나의 측량할 수 있는 표면이기 전에 구체적이고 깊이를 갖춘 어떤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세계가 욕망에 의해 장난꾸러기가 되는 순간 유용적인 개념을 벗어나 주관적인 것에 묶이게 됩니다. 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우리의 반란은 또 다시 보다 위험하고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체, 즉 객체가 주체화된다는 것은 자아가 분열된다는 뜻입니다. 「아르님 때부터 - 브레똥의 말입니다 - 현대시의 역사는 모두가 시인이 <내가 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추구한 자유구현의 역사입니다.」그 말이 사실인 것이 네르발의 초상화 밑에 자필로 씌어 있던 말 한 마디, 즉 <나는 남이다>라는 구절은 곧 랭보에게로 통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랭보는 네르발의 말을 따라 <내가 남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로 일컫는 말이 아니라 그 근원은 보다 멀리서 온 것입니다. 즉 윌리엄 블레이크나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 때부터 쉴새없이 반복되어 온 개념입니다. 이 자기 자신의 대역에 대한 생각은 - 카프카와 릴케도 예외일 수 없듯이- 이 다른 세계에 별로 무감각했던 아뽈리네르 Gillermo Apollinare 의 의식까지 파문을 남깁니다.

 

네가 오는 순간 내 이름은 기욤

어느날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인 어떤 것을 결국 찾아서

 

Je me disais Guiiiaume il est temps que tu viennes

Un jour je m' attendais moi - meme

Pour que je sache enfin celni - la que je suis ......

 

아뽈리네르가 스스로를 기다리는 이 따뜻한 경이의 자세는 안또닌 아또 Antonin Art명에게 분노에 찬 경악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놀라는 분위기>를 이야기합니다. 벤자민 베렡 Benjamin Peret의 책 『나는 숭고하다 Je sublime』에서는 자아의 시간적 물결이 태양 빛에 깨어지는 폭포수처럼 수천의 물방울로 분산되는 것을 봅니다. 이천 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서구시가 발견한 것은 결국 불교의 기본 교훈, 즉 <자아는 하나의 꿈(환상)이라는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감각과 사고와 욕망의 보따리라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번역 閔鏞泰

『시운동 5』, 이문재 외, 1982에서 옮겨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