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몸과의 상상적인 대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1. 27. 00:44

 

 

몸과의 상상적인 대화

 

정유화

 

 

인간은 소유하기를 좋아한다. 그 소유의 대상은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다. 의식주에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거나 간에 아주 사소한 물건이나 물품에서부터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어쩌면 인간은 소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인간이 소유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자기 동일화의 욕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 동일화의 욕망이란 주체인 ‘나’가 타자인 ‘대상’을 자기의 욕망대로 흡수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부연하면 주체가 타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킨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기 동일화 욕망을 지닌 소유는 ‘나’와 ‘대상’의 관계를 주종의 관계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주종의 관계가 되면, 소유대상인 타자는 그 고유한 존재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소유의 차원을 아주 좁혀 몸이란 것에 한정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신체인 몸은 인식의 주체인 나의 소유일까 아닐까. 다시 말해서 살덩이인 몸은 인식의 주체인 나의 타자일까 아닐까 하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몸을 정신과 이성에 대립하는 육체성의 기표로 인식한다. 이는 몸을 정신과 이성에 종속되는 열등한 기표로 본다는 의미이다. 상대적으로 정신과 이성은 우등한 기표가 되는 셈이다. 이럴 경우, 몸은 나의 소유가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타자인 몸을 마음대로 써먹고 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와 몸이 주종의 관계를 형성할 때 몸은 주체의 욕망을 실현해 주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자로서의 몸은 주체인 나에게 종속되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하나의 수단으로써 몸을 소유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도구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몸을 도구로 인식하는 순간 ‘나-몸’의 상호 결합적 관계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곧 나의 몸이라는 의미를 상실한다는 얘기이다. 나의 신체로서의 몸은 느껴지는 그대로의 몸이다. 그래서 마르셀은 ‘나의 몸 그 자체는 대상도 아니고 수단도 아니며 소유한 어떤 무엇도 아니다.’라고 언술한다. 여기서 ‘그 어떤 무엇도 아니다’라는 언술은 ‘나-몸’의 결합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계의 사물을 알고 있는 것은 ‘나-몸’이 결합된 상태로 그 사물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몸은 이 세계의 사물과 공명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몸이 이 세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몸과의 상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몇 편의 시 텍스트를 만나보도록 하자. 먼저 김충규 시인의 「배꼽」을 만나보자.

 

 

 

 

가끔 배꼽을 내려다본다/ 특히 샤워하고 나올 때 약간 물기가 묻은 배꼽을// 내 몸이 가진 아주 작은 우물,/ 샤워할 때 고이는 물로, 혹은/ 몸이 땀을 낼 때 그 땀으로 연명하는,// 태어나자마자 얻은 흉터/ 이 흉터는 평생 가져가야 한다/ 살아가면서 갖가지 흉터가 몸에 기록되지만/ 배꼽은 그 모든 흉터의 원형인 것,/ 허리를 체조선수같이 구부릴 수가 있다면/ 혀로 살짝 핥아보고 싶은 배꼽,/ 사랑하는 여자의 배꼽을 애무할 때면/ 그 몸의 전체가 서서히 비틀거리며 전율하는 것같이/ 결국 흠씬 땀을 흘리는 것같이/ 내 혀가 내 배꼽에 닿을 때의 느낌도 그러할까// 배꼽에 귀를 대어볼 수 있다면/ 끊기기 전 모친의 자궁과 연결되었던 탯줄의/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 거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으나/ 배꼽은 고개를 밑으로 젖히고 보는 게 제격,/ 평생 메우면서 살아가는 삽질의 달인도/ 제 작은 배꼽은 메우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한다// 배꼽을 가끔 들여다보면서 때를 벗겨준다/ 태어나자마자 얻은 최초의 고통,/ 그 신성한 흉터의 제단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그 아주 작은 우물 안에 내 첫 울음이 매장돼 있으므로

 

──김충규, 「배꼽」, 『현대시』(2009. 7.)

 

 

 

 

인간의 몸은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느 부분이라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다. 가령 팔, 다리, 머리, 눈, 코, 귀, 입, 오장육부 등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가운데 제 각기 기능을 하면서 몸을 생존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구성하는 각 부분들을 중요한 곳과 중요하지 않는 곳으로 가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에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경우가 많다. 몸을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속에는 몸에 대한 소유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주체인 ‘내’가 몸의 구성 요소에 대해서 그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몸에 붙어 있는 배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살펴볼까. 특별한 어떤 기능을 보여주지 않는 배꼽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하찮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분을 통합한 몸 자체로 보면 배꼽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배꼽은 그냥 살덩이에 불과한 부분이 아니다. 내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김충규 시인의 「배꼽」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몸과의 상상적인 대화를 통하여 ‘배꼽’의 고유한 세계를 발견해내고 있다. 시 텍스트에서 배꼽은 먼저 “내 몸이 가진 아주 작은 우물”, “태어나자마자 얻은 흉터”, “모든 흉터의 원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화적으로 보면 우물은 모든 존재를 발아시키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리고 동굴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물인 배꼽’은 몸 전체를 살리는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몸을 재생시키는 곳이 된다. 물론 이러한 배꼽이 되기 위해서는 배꼽은 흉터를 가져야 한다. “모친의 자궁과 연결되었던 탯줄”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통과제의에 해당하는 흉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배꼽의 흉터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록한 생명의 영원한 기호이자 최초의 고통을 기록한 고통의 원형적 기호이다. 시인이 배꼽을 “모든 흉터의 원형”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배꼽을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조정할 수 없는 타자임을 깨닫고 있다. 시인이 자기의 혀로서 배꼽을 살짝 핥아보고 싶어 하거나 자기의 귀로서 배꼽에 대어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이를 대변해 준다. 그러나 혀가 배꼽에 닿을 때의 느낌과 귀로서 “자궁과 연결되었던 탯줄의/ 가느다란 떨림”을 맛보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주체가 배꼽을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조정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요컨대 배꼽은 주체를 초월한 타자인 셈이다. 이에 따라 주체는 정신적 이성적 능력으로도 배꼽의 세계를 모두 밝혀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배꼽은 늘 신비의 영역으로 남는다. 시인이 배꼽을 “신성한 흉터의 제단”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성한 곳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신의 존재적 영역이니까 말이다. 덧붙여 말하면 신성한 제단은 세계의 중심이다. 따라서 신성한 제단인 배꼽은 몸의 중심인 동시에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배꼽의 상실은 몸의 상실이요 세계의 상실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주체는 ‘나-배꼽(몸)’의 결합을 통하여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으며 이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배꼽(몸)은 주체인 나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배꼽」과 마찬가지로 김기택 시인의 「갈라진 몸 꿰매기」도 몸과의 상상적인 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갈라진 몸을 꿰맨다는 것은 상처 난 몸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지를 탐색해 보자.

 

 

 

 

의자에 꽉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엉덩이를 억지로 떼어내/ 산에 오른다 기진맥진 약수터에서/ 찬물 한 모금 들이키자/ 자글자글/ 온몸에 물 스며드는 소리 들린다/ 살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비명이다/ 물에 닿자마자 건조함이 터지는 소리다/ 살 깨지는 소리가 ‘뻥!’ 튀기 하는 소리만큼 크다/ 따끔따끔하다/ 귀가 멍멍하다/ 찬 물바늘이 바싹 마른 상처를 찌르고 있다/ 찔린 자리마다 돌기가 일어나고 있다/ 물 두어 모금을 마시고도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이라도 꺼낸 듯 헉헉거린다/ 한 발짝도 더 올라가지 못하고/ 몸이 다 터지도록 기다린다/ 물바늘이 마른 균열을 일일이 꿰매도록 기다린다/ 한참 걸린다

 

──김기택, 「갈라진 몸 꿰매기」, 『시산맥』(2009. 6.)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몸은 단순한 육체성의 기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주체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살덩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주체가 몸을 부양한다고 하더라도 몸을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소유할 수는 없다. 다만 ‘나-몸’의 결합만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텍스트의 언술 주체도 ‘나-몸’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언술 주체는 몸을 육체성의 기표, 즉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하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 텍스트에서 언술 주체는 두 종류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언술 행위의 주체와 언술 대상의 주체이다. 예컨대 언술 행위의 주체는 “의자에 꽉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엉덩이를 억지로 떼어내/ 산에 오”르려고 하는 주체이다. 이에 비해 언술 대상의 주체는 “의자에 꽉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엉덩이를” 지닌 주체이다. 전자는 ‘나-몸’의 결합을 욕망하는 주체이고, 후자는 몸을 단지 소유하려는 주체이다. 이 두 주체의 심리적인 싸움에서 언술 행위의 주체가 승리함으로써 이 텍스트는 ‘나-몸’의 결합을 시도하게 된다.

 

언술 행위의 주체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산에 오르다가 약수터에서 ‘찬물 한 모금을 들이키게’ 된다. 이러한 결과적 행위에 의해 ‘의자’와 ‘약수터’는 죽음과 삶, 상처와 치유의 공간으로 이항대립한다. 왜냐하면 찬물을 들이키는 순간부터 ‘의자’에 있던 몸과 ‘약수터’에 있는 몸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찬물을 들이키기 전, ‘의자’에 있던 몸은 주체의 욕망에 종속된 것으로써 생명의 물을 공급받지 못한 ‘건조한 몸’, ‘마른 상처의 몸’, ‘마른 균열의 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상처로 죽어가는 몸, 억압당하는 몸이었다. 하지만 주체가 몸을 소유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몸의 독자적인 욕망을 수납해 주자 그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몸이 욕망하는 생명수를 주자 모든 살들이 일제히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찬물이 몸에 스며들자 건조함이 터지는 소리, 곧 “살 깨지는 소리가 ‘뻥!’ 튀기 하는 소리만큼 크”게 난다. 그러면서 “찬 물바늘이 바싹 마른 상처를 찌르”게 되고 “찔린 자리마다 돌기”가 일어나게 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상처에서 치유로 전환되고 있는 몸이다. 그래서 시인은 “몸이 다 터지도록”, “물바늘이 마른 균열을 일일이 꿰매도록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은 다름 아닌 ‘나-몸’의 행복한 결합을 위한 기다림이다. 생명으로서의 몸은 나의 타자이다. 몸을 환대하지 않으면 ‘나-몸’의 행복한 결합을 기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김상미 시인의 「밥의 힘」도 ‘나-몸’의 행복한 결합을 욕망하는 작품이다. 몸과 밥의 관계를 탐색해 보도록 하자.

 

 

 

 

악몽에 가위 눌려 식은땀 흘리다 깨어나 밥을 먹는다. 새벽 3시. 배추김치를 쭉 찢어 밥을 먹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새하얗다. 귀신같다. 귀신처럼 외롭다. 귀신보다 더 외롭다. 어두움을 틈타 창가로 몰려든 나무 그림자들이 낄낄거리며 유령 행세를 한다. 하지만 나는 밥과 함께 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절절 끓는 공기를 무찌르는 데는 밥 만한 장수가 없다. 밥도 그걸 알기에 꿀맛같이 든든한 자신을 귀신보다 더 외로운 내 뱃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다. 희붐히 동쪽 지붕이 밝아온다. 뱃속이 꽉 찼으니 이제 악몽 퇴치는 시간문제다. 창문을 열자 창가에 눈을 갖다 붙이고 나를 염탐하던 나무들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시침을 뗀다. 나는 씨익 웃으며, 씩씩하게 부엌으로 나가 다시 밥을 짓는다. 밥은 삶의 성기다. 그를 품기 위해 새 아침이 빠르게 밝아오고 있다!

 

──김상미, 「밥의 힘」, 『시와사람』(2009.6.)

 

 

 

 

주체인 ‘나’는 ‘나-몸’의 결합을 통하여 이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만약에 나와 결합된 몸이 세계와 공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면, 나 또한 그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나’는 몸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몸을 부양해야 할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시인의 몸은 “악몽에 가위 눌려 식은땀을 흘리”는 악몽의 몸이다. ‘씨익 웃는 몸’과 대립되는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악몽의 몸’은 자아가 수축되는 부정의 몸이라면, ‘씨익 웃는 몸’은 자아가 확산되는 긍정의 몸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악몽의 몸’을 ‘씨익 웃는 몸’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런 일을 수행하기 위한 시인의 비법은 매우 단순하다. “새벽 3시”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배추김치를 쭉 찢어 밥을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은 정신성과 대립하는 육체성의 기표로써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몸을 부양하는 것은 정신성의 원리가 아니다. 곧 육체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시인은 정신력으로써 악몽의 몸을 벗어나고자 하기보다는 육체성으로써 그것을 벗어나고자 한다. 몸이 욕망하는 것은 육체성 원리인 밥이니까 말이다. ‘꿀맛같은 밥’을 뱃속으로 꽉 차게 밀어 넣자 ‘악몽의 몸’은 ‘씨익 웃는 몸’으로 바뀌게 된다. 곧 악몽이 퇴치된 것이다. 악몽의 몸일 때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신처럼 외로웠으며, 나무들이 유령행세를 하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씨익 웃는 몸’이 되자 그런 부정적인 요소는 모두 사라지고 생기로 가득찬 시공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밥은 삶의 성기다.”라고 언술한다. 이처럼 시인은 생명력(육체성)을 담고 있는 밥을 통하여 ‘나-몸’의 행복한 결합을 이루고 있으며, 새 아침의 밝은 세계까지 맞이하고 있다.

 

이에 비해 김양숙 시인의 「길을 돌아보다」라는 작품은 ‘젖은 몸’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부연하면 ‘나-몸’에 대한 결합적 탐색보다는 ‘몸’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비는 문 밖에 두고 빗소리가 문턱을 넘었다/ 방안에서 한나절 동안 몸이 젖었다// 처마 끝에 몇 폭 그림을 걸었다/ 그림 속에서 안개가 풀리고 몇 그루의 나무가/ 여기 저기 기둥을 세우고 흩어졌다/ 바람 끝에 빼곡하게 서서 자라던 구멍이/ 행간과 행간 사이에 몸을 밀어 넣었다/ 깃발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흔들렸다// 오랫동안 탕진했던 길을 돌아 봤다/ 울퉁불퉁해진 길 안쪽에서 웅덩이가 너덜거렸다/ 쳐진 바퀴가 물벼락을 쳤다/ 사는 동안 젖지 않는 날이 얼마나 될까/ 치맛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아무도 몰래 훔쳤다// 윗물이 아랫물을 밀었다/ 데인 자리에서 달이 자랐다/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물의 저녁을 달랬다

 

──김양숙, 「길을 돌아보다」, 『시와산문』(2009. 6.)

 

 

 

 

‘나-몸’의 결합은 나를 세상에 열어 놓기도 하고 세상을 나의 안으로 들여다 놓기도 한다. 이러한 ‘나-몸’과 ‘세계’와의 무수한 교류의 경험은 ‘몸’에 저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경험이 기억으로써 몸에 저장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기억의 보관소라고 일컬을 만하다. 김양숙 시인이 “한나절 동안 몸이 젖었다”라고 한 언술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비는 문 밖에 두고 빗소리가 문턱을 넘었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나절 동안 몸을 젖게 한 것은 비가 아니라 빗소리이다. ‘빗소리-몸’의 상상적 결합은 이 텍스트를 건축해가게 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빗소리-몸’의 상상적 결합이 주체로 하여금 삶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언술이 바로 “오랫동안 탕진했던 길을 돌아 봤다/ 울퉁불퉁해진 길 안쪽에서 웅덩이가 너덜거렸다/ 쳐진 바퀴가 물벼락을 쳤다”로 나타나고 있다. ‘탕진했던 길’, ‘웅덩이’, ‘물벼락’ 등의 이미지는 예의 삶의 기억들을 반추하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삶 자체가 젖으면서 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사는 동안 젖지 않는 날이 얼마나 될까”라고 한 언술도 여기에 기인한다. 결국 시인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물의 저녁을 달”래는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는 세속적인 삶에 젖은 몸을 정화 재생하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인은 ‘나-정화된 몸’의 결합을 욕망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탐색해 온 바와 같이 몸은 주체인 ‘나’에게 종속되는 소유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인 나의 욕망대로 사용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나의 타자로서 고유한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호이다. 그래서 주체인 ‘나’는 몸을 환대해야 한다. 그 환대를 통해 ‘나-몸’이 결합을 이루게 되면, 그때에 주체는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