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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연극인 - 놀이의 원형을 찾는 사람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2. 29. 01:06

연극인 - 놀이의 원형을 찾는 사람들
                                                           
                                                            나 호 열                 
                             
여자가 제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세 여인이 있다.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이다. 연극 ?WWW?는 이들 세 여인을 온라인 상으로 불러내 현대 부부의 모습을 반추한다. 
역사학자이자 시간강사인 임규는 황진이의 시와 생애를 연구하다가 인터넷을 통해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을 만나게 된다. 능력 있는 아내 미나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그는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꿈꾸던 세 여인을 만나 현실의 열등감을 위로 받는다. 온라인 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임규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세 여인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는 또 인터넷의 역기능도 되짚는다. 극은 인터넷을 매개로 전개되지만, 인터넷에 지나치게 빠져 현실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모습도 보여준다. 무대 위 초대형 컴퓨터는 배우와 관객이 가상현실에 접할 수 있게 한다. 

                               세계일보 2005-04-14에서 인용  
 
 4월 15일부터 29일까지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WWW」( 극본 윤대성, 연출 김영수. 극단 신화)는 아마도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화두인 여성woman과 인터넷world wide web의 의미를 중첩시킴으로써 이 연극의 방향성을 뚜렷이 부각시키려는 것. 위의 인용문처럼「WWW」는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위축된 현대 남성의 왜소화된 심리를 인터넷을 통하여 시공을 초월한 만남으로 드러내면서인터넷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가상세계과 현실간의 혼돈을 이야기한다는 것.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영화에서도, 티브이 드라마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대에 컴퓨터를 갖다 놓고 극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연극 또한 현실적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WWW」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연재물은 인터넷과 예술의 각 분야가 어떻게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지를 살펴보는 기획인데, 인터넷(디지털)과 연극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뚜렷한 접합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필자의 연극에 대한 지식의 얄팍함이 가장 큰 원인이 되겠지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연극에 종사하는 여러분들도 인터넷, 또는 디지털의 기능과 연극과의 관계나 대응방향은 딱히 정립되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바로 이 점이 오늘의 연극계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라면 오늘의 주제는 마땅히 오늘날 한국의 연극의 명암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WWW」는 지난 호의 제목이었는데, 제목으로 부적절하다고 편집자가 판단해서인지 부제로 달았던 ‘디지털 시대의 연극 위기인가? 축복인가?’를 타이틀로 올렸다. 
 분명 오늘날. 우리의 연극의 현실은 여러 면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연극인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월 평균 소득이 3,40만 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연극보다는 대부분 영화를 선택하고,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처럼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체제도 아니다 보니, 급기야 연극인 스스로 복지기금을 조성하고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하자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처럼 연극은 IT의 첨단 기술을 활용하거나 콘텐츠화 할 수 없기에, 대중들이 선호하는 방향을 따라잡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태생적으로 연극이 가진 공간의 제약성 때문에 대중들의 성향을 따라잡는데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사진 등등의 장르에서는 좋던 싫던, 디지털과의 융합과 활용을 시도하고 있는데 연극에서는 그러한 탐색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역으로 연극이 반드시 존립해야하는 당위성을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한 마디로 연극은 인류 문화의 역사와 함께 해온 ‘놀이의 원형’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활의 양식이 바뀐다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놀이’의 개념조차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천 오백 년 전 소크라테스가 물었던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금언은 21세기의 현대인에게도 똑같이 제기되는 질문이다. 이 천 오백 년 전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며, 그 질문이 유효한 이상 ‘놀이’의 습성을 지닌 인간의 본성을 일깨우는데 연극은 매우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옛날처럼 연극은 무대에 선 배우들이 주인공이고,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관객일 뿐이지만, 연극의 관중은 영화관의 관객과는 본질상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잇다. 영화는 필름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정확하게 계산되고 때로는 은폐된 배우들의 행동이 편집됨으로써 관객이 영화 자체에 뛰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연극은 대사와 무대 장치의 상징성과 연속성, 일회적인(흘러가버리는) 상황의 직각적인 반응과 분석을 관객 스스로 진행함으로써 영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장과 예기치 못하는 불안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가 닿는 철학적인 예술장르라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대중들에게 홀대받고 -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서- 있다. 4호선 혜화동 출구를 올라 올 때마다 나는 마음이 울적해진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바람잡이처럼 연극 매표 호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중늙은이들에게는 아예 얼씬도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 실제로 연극을 즐기는 중, 장년층이 얼마나 있겠는가- 척박한 오늘의 현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문화의 속성이 대중들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해도, 연극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호응은 지나치게 적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처럼 좋은 연극이, 좋은 연극 배우가, 훌륭한 연출가가 많이 배출된다면 절로 관객이 느는 것이라는 주장과, 연극을 즐기는 관객이 많아져야만 연극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는 주장은
다같이 연극의 부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연극의 부흥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은 연극계 내부에서도 활발히 모색되고 있다. 지난 5월 6일에 개최된 ‘2005 문화예술위원회 전환을 위한 범문화예술단체 제2차 연속토론회’의 주제는 ‘공연예술의 비젼, 해법을 찾는다’ 였고, ‘연극부분의 활성화’가 독립 토론으로 다루어졌다. 

  최근에 들어 기초예술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기초과학이 있고, 응용과학이 있듯이 기초예술이 있고 응용예술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과연 기초예술과 응용예술의 확연한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칠게 말해서 기초예술은 창작자에게는 돈벌이가 되지 않으나 문화 향수자에게는 꼭 필요한 장르라고 해두자. 그 기초예술 분야에 연극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상순(대학로 포럼 사무총장)씨는 ‘현장연극의 부흥의 해법’ 발제를 통해서 연극 현장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 번 째로 연극전용 극장이 크게 부족하여 공연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공연물의 해외진출에 따른 제도적 지원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는 연극의 활성화를 위해서 연극 전체를 총괄하는 센터를 설립하여 각 연극 단체에 필요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토론자인 고준환(문예진흥원 연극전문위원)씨는 연극의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이 1년 단위의 지원이 되어서는 연극계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적어도 3년 단위 이상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토론자인 오세곤(순천향대 연극영화과 교수)씨는 ‘공연예술의 집’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공연예술의 집’은 희곡 작품, 영상자료 뿐만 아니라 배우, 작가, 연출, 스텝, 장치물(소품, 의상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이러한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화 하여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며, 작품 제작에 필요한 컨설팅 업무. 투자펀드 조성, 기금 조성, 지원금 확충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각 극단이 보다 경제적으로 작품을 생산하고 안정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앞으로 보다 많은 관심과 정부의 의지에 따라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필자는 진정으로 연극을 비롯한 기초예술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예술교육이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유치원,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문학, 음악, 무용, 미술, 연극 등의 기초예술 교육은 형식적이고 파편화된 행태를 보여왔다. 예술은 창작자뿐만 아니라 창작물을 향수하는 사람들에게도 놀이의 즐거움을 주어야 함에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예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즐거움과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 지, 그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과 수련이 필요한 것인지를 가르치지 않고 입시에 필요한 과목에 들러리서는 과목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는 예술을 향유하는 진정한 문화시민의 확대는 요원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자각을 체계화하지 못하고, 습관화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가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쉽게, 마음 편하게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출판물의 종과 수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면서도 좀처럼 독서인구가 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어려서부터 입시라는 과중한 난제에 휘둘려 독서를 생활화하지 못한 까닭에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의 즐거움에 기꺼이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연극계의 침체는 단순히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세대의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의 특성은 접근의 용이성과 반응의 신속성과 이동성에 있다. 전통음악의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은 그 음악에 익숙하지 않고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생소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자발적으로 연극 마니아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난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술의 생활화를 추구하는 연극계의 풍경은 필자의 주장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줄 것이다.
   
 경남 밀양시 부복면 가산리에는 밀양 연극촌이 있다. 스튜디오 극장 (150석).창고극장 (150석), 우리동네 극장(250석), 연극실험실(90석)등의 4개의 실내 공연장과 야외극장인 숲의 극장(500석)을 갖춘 밀양 연극촌은 폐교를 활용해 1999년 개관 이래 연극의 생활화와 대중화에 성공한 사례로 손꼽힌다. 교통의 발달로 경향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농촌체험과 더불어 연극에 관련된 워크숍, 어린이 연극 캠프 등에 참가할 수도 있고 1박 2일 동안 연극의 제작 과정을 연극 스텝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체험할 수 있으며, 직접 단역배우로 무대에 설 수도 있다. 

밀양 연극촌의 성패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지만, 단순히 연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극과 더불어 부수적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연극을 즐기고 사랑하는 관객들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인은 문명이 가져다 준 편리성을 즐기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연극은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자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에 있어서 디지털 시대는 위기가 아니라 하나의 축복임에 틀림 없다. 
         
  예술세계 2005년 6월호에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