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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사진의 사유, 사유의 사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3. 7. 13:59

                                            사진의 사유, 사유의 사진

                                                                                                                                나호열

 

  알타미라 동굴에 소를 그려 놓은 사람들이 떠난 후 繪畵는 오랫동안 사물과 인간의 관념을 드러내는 통로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회화가 담당해 왔던 그 막중한 임무가 사진으로 옮겨지면서 사진은 생활 곳곳에 깊숙이 범람하는 이미지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디지털화된 휴대용 전화기나 컴퓨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공중파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DMB Digital Muutimedia Broadcasting 시스템이 구현된 동영상의 시대에도 사진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축소되거나 약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로버트 리쳐드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영화가 문학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동영상과 사진은 서로를 간섭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탈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 한 바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운동론자와 이데아와 같이 부동하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플라토니스트의 두 개의 기둥이 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분출하는 욕구나 충동의 흐름을 조감하려는 의지와 정지된 思念에서 영원한 시간의 단면을 추출하려는 기대가 팽팽히 맞서 있는 한, 눈부신 디지털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지금 누리고 있는 영광의 권좌에서 내려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운동과 부동의 개념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우리가 놓아버릴 수 없는 사유의 딜렘마라고도 볼 수 있다. 활자를 축출하고 그 여백에 이미지로 채워진 정보는 무의식의 심층을 가로질러서 암각화처럼 우리의 뇌수에 들어와 박힌다.

 

 사진의 매력은 구체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운동 속에 무한히 변화해가는 모든 존재의 순간적 이미지를 정지해 놓고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는 직관을 제공해 주는데 있다. 이제 범용화된 디지털 카메라는 누구나 손쉽게 촬영하고 편집하고 현상과 인화를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기기와 접속하면서 사진의 대중화에 앞장선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 기술의 자동화와 대중화가 전문 사진작가의 영역을 훼손하거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특수한 효과를 기대하는 상업적 목적의 사진이나 누드를 비롯한 예술 사진은 여전히 훌륭한 사진작가의 소임으로 부여되어 있다. 또한 현장성이 강조되거나 헌팅된 장소에서의 장기간의 탐사기록은 일반인들에게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진은 기록과 기억의 저장소 일뿐 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세계의식의 탐구와 인간에 대한 계몽, 고발 등의 인간 사유의 영토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 충분히 증명될 만하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인간이 지나온 시간과 공간의 각질을 관통하는 사유를 지향하는 것을 사진의 사유라고 한다면 사유나 관념을 繪畵化하는 사유의 사진- 카피, 또는 복제-의 개념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작고한 김영갑이 자신의 관념과 일치하는 현상을 포착하기 위해서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듯이, 보들리야르가 무심히 내던져진 순간의 영상 속에서 세계의 구조를 포착해내듯이......

‘기표는 영원히 기의에서 미끌어질 수 밖에 없다’ 라는 라캉의 언어에 대한 懷疑를 감쇄하는 역할을 포스트모던의 시각에서 음미해 볼 수 있는 장점을 사진이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이 우리의 생활과 사유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몇 몇 외국 사진 작가의 사진전을 기억한다. 이 말이 뛰어난 예술성과 테크닉을 겸비한 국내 작가의 사진전이 끊임없이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글의 초점이 현대에 있어서의 사진의 역할에 맞춰져 있는 까닭에, 또 사진에 깊은 식견이 없으면서 작가의 주제의식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필자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많은 작가들을 언급할 수 없는 까닭에, 세바스티앙 살가도Sabastio Salgado 1944~,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 Bresson 1908~2004, 장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d 1929~ 이 세 사람을 논의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 작가의 사진전은 올해 전반기에 집중 개최되었다. 브레송의 사진전은 올해 5월 21일부터 7월 17일까지 선화랑과 예술의 전당에서. 보들리야르의 사진전은 5월 25일부터 7월 7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살가도의 사진전은 7월 8일부터 9월 3일까지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살가도는 예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번혁시키며, 증언해야하는지를 사진을 통하여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는 세계 곳곳의 소외되고 궁벽한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함께 공유함으로써 그의 사진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휴머니즘의 온기를 느끼게 하여준다.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타리 사진가로 추앙받는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은 보도와 기록이라는 다큐멘타리 사진의 특성을 넘어서 지역과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휴머니즘의 사진가로 평가받고 있다.

 

 

                                                                                           1985, 말리, 살가도

 

 이번 전시는 살가도가 1977년부터 2001년까지 24년간 찍은 방대한 분량의 사진 중에서 회고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살가도가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오리지날 프린트로 1.라틴 아메리카 2.노동자들 3.이민,난민,망명자 4.기아,의료 등 4개의 섹션, 총 17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가도는 브라질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시로 이사했다. 69년 브라질 정부의 압력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프랑스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커피 재배 현황을 조사차 방문한 살가도는 극심한 가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를 보고 이 참상을 경제학 보고서가 아니라 사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이 더욱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경제학 박사에서 사진으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한 살가도는 1979년 매그넘 사진의 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다큐멘타리 사진의 길로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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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도의 사진은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승부하는 사진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살가도는 자신이 직접 필름을 감아서 쓰고, 하루에 16시간 동안 직접 수천 장의 작은 시험 인화지를 만들고, 그렇게 하여 살가도는 사헬지역, 샤드, 에티오피아, 말리, 수단에서 장기간에 걸쳐 촬영하며,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위압감이나 거리감을 주지 않기 위해 자가용이 아닌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언제나 홀로 촬영을 다녔다. 살가도의 사진은 그 지역의 사회, 문화와 역사 전반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공유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살가도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생한 사진으로 전체가 하나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장엄한 서사시와 같다.

살가도의 사진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그 이익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 되어만 간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생명을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한없이 비참한 것도 아니며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는다. 살가도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존엄한 생명을 가진 인간임을 깨달았고 가장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그들의 숭고한 몸짓을 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가도의 사진은 현대 사회의 가장 진실한 보고서임과 동시에 20세기 가장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영섭(김영섭사진화랑 대표)의 글 부분 인용 -

 

 

 

마르세이유Marseilles, 1932,브레송

 

 브레송은 ‘찰라의 거장’. 사진의 선승 Zen Master 이라 불리울만큼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분투한 작가이다.

20세기의 눈’, ‘현대 사진영상의 아버지’, ‘사진미학의 교과서’, ‘사진의 톨스토이’, ‘전설적인 사진작가’, ‘근대 사진미학의 최고봉’… 그에게 붙여진 여러 수식어는 2004년 8월 3일 타계 시 국내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르몽드,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등 세계 각국의 추모 기사가 그 명성을 대변했다.

서거 1주년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사진예술의 진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사진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에서 작품이 들어오는 대규모 특별전이다.

 

 현대사진의 여명에서 새로운 영상사진의 문을 연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 ‘결정적 순간’을 포함한 초기 작품부터1999년 후기 작품까지 전 생애 작품들을 226점이라는 최대 작품수와 엄선된 중요 작품을 통해 그의 사진 철학과 예술성을 확인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그의 예술성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는‘찰나’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공간의 순간(moment)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지속되는 찰나(instant)인 것으로 단순히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며, 작가 의도나 피사체, 그리고 그 주변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고, 구도와 형태의 예술적 감각이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을 의미한다.

카르티에-브레송은 거리에서 촬영했다. 그의 작업 전반기에 단편적인 찰나 내에서 시각적인 응집을 발견하였는데 스스로 ‘눈에 의한 고유의 통합요소’라고 불렀다. 즉각성과 복잡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고 서사 구조를 회피하였다. 그는 1952년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으로 불리는 사진에 있어서 새로운 유연성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삶의 전개에 있어서 예감적인 방법이 있듯이 움직임의 조화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 촬영은 이 순간을 포착해야만 하고 그것의 평형상태에서 고정된 때를 잡아야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여 제시하였으며 그의 사진 형식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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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 뵈브 (Saint-Beuve), 1999, 보드리야르

 

 보드리야르는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뮤라시옹 Simulation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곳이 가상의 세계이고, 이미지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하고 생존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획득한 상품이 지니는 상징 즉 위세와 권위를 소비한다고 함으로써 종국에는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타이틀이 붙은 사진전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이론과 부합되는 증명이 되는 셈이다. 보드리야르는 사진의 이미지가 주는 상징적 의미를 배제하고 사진의 화면만을 볼 때 가장 순수한 이미지를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진을 해독해야 할 기호가 아닌, 시각적 즐거움으로 여기면서. 사진 이면의 어떤 의미나 추측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즉 사진을 찍는 나(주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체를 끌여들여 사진을 찍는다는 그의 주장은 언어로 해석할 수 없는 이미지의 의미를 설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살가도, 브레송, 보드리야르는 각기 독특한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자신이 구축한 세계관을 사진을 통하여 재현하고자 했던 작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자연스럽고(살가도),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결정적 순간이 가장 진실되며(브레송), 우리의 눈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의 무의미성(보드리야르)을 부각하려 했던 그들의 작업은 디지털의 매력인 합성과 조작을 통한 환상성을 거부하면서 아나로그 영역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드높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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