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촉도 2015

경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4. 10. 17:35

경계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안과 밖
의 경계가 신기루처럼 멀리 휘날렸다 헛디딘 말들이
곳곳에 붉은 신호등을 걸었다
앞을 못 보는 농부가 밤에도 논으로 나갔다는 이야
기가 있다 몸이 졸리면 밤이지 캄캄하기는 마찬가지
인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걷고 달리고 밀어올리고 당기고 구부리고 펴고 운동
기구 앞에서 하는 일들이 몸에서 연둣빛 새잎이 돋아
오르는 듯하다고 하자 바로 그것이 한밤중 논에서 벼
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안경은 그까짓 흐리고 어두운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흐리고 어둡게 각인하는 일 그 눈먼 농부처럼 눈을 버
리고 귀를 얻어 볼까 손전등 없이도 밭두렁 논두렁이
두런거리는 소리 살아 있는 것들의 숨소리 그 거친 숨
소리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 볼까

헛도는 러닝머신 위에서 신 나게 길을 잃고 지금은
안경 벗은 꿈을 꾸는 중

'촉도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검變瞼의 하루  (0) 2020.04.25
촉도蜀道  (0) 2020.04.17
나의 멘티에게  (0) 2017.11.16
적소謫所의 그늘  (0) 2017.10.30
봉선사 종소리에 답함  (0) 2017.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