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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4. 11. 23:32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박 진 희(문학평론가 ․ 대전대 교수)

 

나호열 시인이 2015년 시집 『촉도』를 낸 데 이어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물든다는 말』을 상재한다.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30여 년간 평균 2년에 한 권 정도로 시집을 낸 셈이니 실로 왕성하고도 꾸준한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시력이 시인 스스로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적 발전이 보이지 않으면 시를 그만 써야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시인으로부터 벌써 수차례 들어온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시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때일까. 그것은 아마도 진실을 드러낼 완벽한 말을, 표현을 찾았을 때이거나 진실에 대한 욕망 자체가 사라졌을 때가 아닌가 한다. 진실을 포착해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말’을 찾을 수 있다고 할 때 시인은 흔히 하는 말로 ‘하산’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굳이 소쉬르니 데리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 진실을 지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진실에 근접해갈수록 말은 미끄러지고 의미는 산종되고 만다. 시적 긴장과 시인들의 치열함은 바로 이 말들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나호열의 『촉도』 이후의 신작시들에 대해 필자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의미’를 그 특징으로 규정하고, “모호하고 애매한 의미는 그것의 본질 속으로 더 깊이 탐구해 들어가는 통로가 되고 있으며, 상충되는 이미지는 서로의 그 심상과 정서에 깊이를 더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한 바 있다.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의미’를 말의 미끄러짐 내지는 말의 실패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난해함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시인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말’과 ‘이미지’를 찾기 위해 치열한 고민과 실패를 거듭해왔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진실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사유와 사랑에서 비롯된다. 시가 세계와의 불화에서 연원한다는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관찰도 사유도 없으며 결핍감을 내재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결핍을 느끼지 못하니 욕망이 따르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나호열의 시에서 세계는 ‘촉도’로 인식된다. ‘촉도’란 말 그대로 ‘촉으로 가던 매우 험난한 길’을 일컫는 것으로 그의 시에서 그것은 불화의 세계, 불모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처럼 나호열 시인은 여전히 ‘지금 여기’를 불화 · 불모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말’과의 치열한 고투를 하고 있으니 시를 놓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

나호열 시인의 ‘촉도’로 표상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물든다는 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시에서 세계는 “탈출이 곧 유배”가 되는 폐쇄된 공간이자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불모의 땅으로 암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를 쇼핑카트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짐수레라고 나를 불렀다

무엇이라 불리우든

그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기꺼이 몸을 열었다

내 몸에 부려지는 저 욕망들은

또 어디서 해체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살구나무 아래 버려져 있다

탈출이 곧 유배가 되는

한 장의 꿈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왔다

누가 나를 호명할까봐 멀리 왔다

뼈 속에서

한낮에는 매미가 울었고

밤에는 귀뚜라미가 우는

풀섶 어디쯤

 

-「후일담 後日譚」전문

 

위 시의 시적 자아는 누군가에게는 ‘쇼핑카트’로 불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짐수레’로 불린다. 이렇든 저렇든 이 세계에서 자아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 타자의 ‘욕망이 부려지는’ 대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기꺼이 몸을 열었다”는 시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는 것이 강제적이라기보다는 시적 자아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임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언표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치열한 경쟁의 대열에 서있다는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페러다임에서 앞서있는 계층의 다양한 표상들을 욕망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가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지점은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불모의 세계, “탈출이 곧 유배가 되는” 폐쇄적 세계일 터이다. 존재의 진정한 가치가 맹목적인 경쟁을 통해 구현될 리 없으며 그렇다고 이 대열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그것이 사회에서는 낙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무리와 다른 길을 간다는 것,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유배’의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의 시적 자아는 ‘버려짐’, ‘유배’를 택한다. 누군가의 ‘호명’을 피해 ‘멀리’ 와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줄타는 광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광대는 군중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줄 위를 걸어가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익살꾼이 광대를 조롱하며 따라가고 있다. 광대가 아슬아슬하게 줄의 반쯤 갔을 때 빨리 가라고 재촉하던 익살꾼은 광대를 뛰어넘어 버린다.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줄을 타던 광대는 중심을 잃고 허둥대다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이를 두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 밤은 어둡고 차라투스트라가 갈 길 또한 어둡다. 자, 떠나자, 너 차디차게 굳어버린 길동무여! 나 손수 너를 묻어 주겠거니와, 그곳으로 너를 등에 지고 가겠다.”

위버멘쉬, 그것은 인간 존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의미를 터득한 자다. 어떠한 계기로 누군가 혹은 특정한 계층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획일적이고 확정된 의미를 초월하는 자다. 군중이라는 ‘먹구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과 같은 존재다. 이러한 존재가 무리에서 환영받을 리는 만무하다. 무리에서 일탈하는 행위란 줄 위에 서있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럼에도 줄 위에 설 경우 감당해야 할 위험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익살꾼이다. 광대의 죽음을 목격했다면 어느 누가 다시 그 줄 위에 서겠는가.

차라투스트라가 광대를 ‘길동무’라 칭하며 손수 묻어 주겠노라 위무하는 까닭은 광대가 바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정작 위버멘쉬, 즉 초월한 자보다는 그 과정에 있는 인간, 구체적으로는 초월하기 위해 몰락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가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 “깨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랑하노라 고백하는 까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광대는 비록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한 채 죽음으로써 그야말로 ‘몰락’했지만 니체에게 그것은 결코 실패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몰락의 움직임들이 위버멘쉬의 세계를 구현할 근본 동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세월을 붙잡고 보니/어느덧 고물이 되었다”(「맹물」)는 시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나호열의 “탈출이 곧 유배가 되는/한 장의 꿈”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존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몰락’, 군중의 ‘호명’을 거역하기 위한 능동적인 ‘유배’ 말이다.

 

2.

시적 자아가 ‘기꺼이 몸을 열어’ 받아들인 욕망, 자신의 것인 줄 오인하며 좇았던 ‘타자의 욕망’은 ‘이카루스’의 날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듯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의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밀랍 날개를 달고 날다가 너무 높이 나는 바람에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으면서 추락하고 만다. 진정한 자아는 외면한 채 타자의 욕망을 좇아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현대인의 삶을 이카루스의 날갯짓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가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의 비상은 불안하기만 하다.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땅에게 바침」전문

 

위 시의 시적 자아는 평생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카루스의 꿈’과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닥’이다.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바닥’이라는 대목에서 그것은 타자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난 뒤의 자아, 그 단독적인 자아의 고유한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내면화한 ‘타자의 욕망’이란 결코 채워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재생산될 뿐이다. 우리가 성취한 듯한 가치도 기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내지는 본래 “없던 날개”,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카루스의 날개’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의 의미가 결코 이러한 가변적인 것에 의해 규정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쓰러지면 지는 것이라고

사나운 발길에 밟히고 밟혀

흙탕물이 되는 눈처럼 스러진다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샅바를 질끈 쥐었으나

장난치듯 슬쩍 힘을 줄 때마다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흔들거렸다

눈물이 아니라 땀이라고 우겨보아도

몸이 우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법

나를 들어 올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지금껏 알지 못하였던 어리석음을 탓하지는 못하리라

으라찻차 힘을 모아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찰나

나는 보았다

내가 쥐고 있던 샅바의 몸이

내가 늘어뜨린 그림자였던 것을

내가 쓰러져야 그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허공은 억세게 잡을수록

더 억세진다는 것을

씨름판에 억새가 하늘거린다

 

-「씨름 한 판」전문

 

현대인이 자아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린 채 타자의 욕망을 좇아 고투하고 있는 원인에 외부의 요인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아 내면의 문제임을 위 시에서는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경쟁에서 지면 "사나운 발길에 밟히고 밟혀/흙탕물이 되는 눈처럼 스러진다고" 믿고 있기에 시적 자아는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뭇잎처럼" 안간힘을 다해 위태로운 삶을 영위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허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시적 자아는 경쟁을 타자와의 필연적인 그것으로 알고 “으라찻차 힘을 모아 상대를 쓰러뜨리려” 온 힘을 모으지만 그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의 ‘그림자’임이 드러난다. 자기 ‘그림자’와의 싸움은 끝내 이길 수 없는 싸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인식하기 전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은 자신이 쓰러지는 것 외에는 상대를 쓰러뜨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허공’을 붙잡겠다는 의지와 같은 것이다.

 

이 싸움이 끝나기 위해서는 싸우는 대상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깨닫고 스스로 멈추거나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쓰러지는 길밖에 없다. “허공은 억세게 잡을수록/더 억세”지기 때문에 집착할수록 에너지 소모는 그와 비례해 커지지만 그럼에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시의 “내가 늘어뜨린 그림자”나 ‘허공’을 현대인이 내면화하고 있는 타자의 욕망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좇는 삶이란 이처럼 자아 성찰에 따른 인식의 변화나 에너지의 탕진으로 인한 무너짐이 있기 전까진 결코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남긴 경구로 알려져 있고 우리는 속된 말로 ‘네 주제를 알라’라는 의미로 써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델포이 신전에 적혀 있는 신탁 중 하나로 그 진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네 자신이 고귀한 존재임을 알라’라는 의미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그러므로 고귀한 존재에 걸맞은 덕을 행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신탁이 지시하는 인간의 고귀한 존재로서의 가치가 결코 타자의 욕망으로 표상되는 가변적이고 휘발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남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 주체가 인지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상이 추락을 예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자기 그림자와의 싸움이 패배로 귀결되듯이 맹목적으로 욕망을 좇는 현대인의 삶 또한 종국에는 ‘괴물’이(「맹물」) 되거나 허망함만이 남게 될 것임을 나호열의 시에서는 적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3.

나호열 시인의 『물든다는 말』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많은 시편들에서 ‘텅 비고 사그라들고’(「가을과 술」), 스러지고(「저 너머」), 저물고(「낙엽」), 무너져 내리는(「서 있는 사내 2」) 등 소멸 내지는 ‘몰락’의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몰락’의 이미지가 ‘몰락’의 의미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나호열의 시에서 ‘몰락’의 이미지는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탐구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낙엽」이다.

 

공손히 허공에 내민 손은

한번도 움켜 쥔 적이 없는 손은

깃발처럼 휘날리던 손은

벌레 먹어 구멍 송송 뚫린 손은

그윽하게 저물어가는 어느 가슴을 닮은 손수건 같은 손은

 

이제

새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한다

 

낙엽

 

-「낙엽」전문

 

‘낙엽’은 흔히 소진, 쇠락, 소멸, 죽음 등과 관련하여 의미화 된다는 점에서 몰락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채우는 것이 아닌 절정을 지나 기울고 저무는 과정에 위치지어지기 때문이다. 위 시에서 ‘낙엽’이 “벌레 먹어 구멍 송송 뚫린 손”이라든가 “그윽하게 저물어가는 어느 가슴을 닮은 손수건”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다. 그러나 ‘낙엽’의 의미가 단순히 상실이나 소멸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손히 내민 손’에서는 겸허의 태도를, “한번도 움켜 쥔 적이 없는 손”에서는 비움의 의지를 발현하고 있다. 또한 “깃발처럼 휘날리던 손”은 참여, 결의, 변화 등과 같은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이 시에서 ‘낙엽’은 단순히 쇠락이나 소멸의 과정으로 의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 나아가 ‘낙엽’은 “새 이름으로/새 출발”을 하는 대상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낙엽’이 ‘새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나무를 세계 내지 인생의 표상이라 할 때 새싹은 중심의 가능성을 내재한 존재이며 절정의 푸른 잎은 에너지를 창출해 내는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낙엽은 나무에 붙어있을 힘조차 없는 쓸모없는 존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론적 인식,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되면 모든 존재는 그것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된다. 가령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혹은 되기 전의 미숙한 존재가 아니며 노인은 여생을 살고 있는,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아이만의, 노인은 노인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낙엽이 “새 이름으로/새 출발을 한다”는 표현에는 바로 시인의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나호열 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중심에서 벗어난 대상, 주변화된 대상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 그려지기도 하고 주변화된 대상의 상처, 이에 대한 시적 주체의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전자는 이미 살펴 본 「낙엽」이라는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고 소외된 대상의 상처와 이에 대한 연민의 정서는 「생각하는 사람 2」외의 여러 시편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람이 소리치는 줄 알았다

바퀴가 투덜대는 줄 알았다

접시가 깨지며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다

 

바람을 맞으며 아파하는 것들이 있다

접시에 닿아 먼저 깨지는 것들이 있다

바퀴에 눌리는 바닥이 있다

 

수동태 문장은 주어가 슬픈가

저 소리들의 주어를 슬그머니 되찾아 주고 싶은 밤

 

바람도, 접시도, 바퀴도 아니었던 소리의 주인은

성대가 없다

 

-「생각하는 사람 2」전문

 

사실 주변화된 대상, 소외된 대상을 시적 소재로 삼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 그런데 나호열 시의 경우 그 대상을 설정함에 있어서 매우 섬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라는 보편적 구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령 위 시에서 '바람'이나 '접시', '바퀴'의 경우 명확하게 중심의 편에 서는 대상은 아니다. 이들 자신도 깨지고 부딪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 맞부딪히면서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시적 주체는 이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나쁜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도 이 세계에서 누군가는 ‘수동태 주어’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때로 "주인공이 분노에 가득차서 제멋대로 휘젓고 내버린 풍경의 소품"(「소품들」)과 같이 취급될 때도 있다. 이들 존재가 느꼈을 슬픔과 설움 생각에 시적 주체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소품들」) 하여 '소리'낼 줄 모르는 그들에게도 '소리의 주인'의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것이다.

 

초식의 질긴 기억이 스멀스멀 몸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의 송곳니도 갖지 못한

쫓기는 자의 슬픔

그 슬픔을 용서하지 못할 때

불끈 뿔은 솟구쳐 오른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는

높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되거나

못으로 온몸에 박히는 뿔이 된다

 

나도 뿔났다

 

-「뿔」전문

 

위 시에서도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초식의 질긴 기억"을 가진 시적 대상이 소외된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의 송곳니도 갖지 못한/쫓기는 자"이면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상응하는 중심 내지 핍박의 주체는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슬픔'과 '한숨'은 그저 "높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될 뿐이다.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는 그나마 '뿔'이 되지만 이 '뿔'은 오히려 "못으로 온몸에 박히는 뿔"일 뿐 상대를 찌르는 '뿔'이 아니다.

 

시적 자아가 '뿔'이 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처받고 소외되는 존재가 분명 있지만 수없이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존재에게서는 오히려 자신의 “온몸에 박히는 뿔”이 돋아날 뿐이다. 이 세계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슬픔이 부유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4.

그렇다면 나호열 시인은 왜 이토록 주변화된 대상을, 그들의 상처와 슬픔을 그리면서 이와 관련한 뚜렷한 비판의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먼저 ‘슬픔의 지속’의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위의 시뿐만 아니라 「비가 悲歌」, 「봄눈의 내력」,「수오재 守吾齋를 찾아가다」등등 많은 시편들에서 시인은 슬픔을 끝내 해소되지 않을 무엇으로 남겨두고 있다. 슬픔의 해소가 끝끝내 유보되는 양상, 이는 시인 자신에게나 독자에게 이 세계의 상처와 결핍, 슬픔 등을 쉽게 흘려보내지 않고 포회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시인의 의도가 비극적 정서를 발현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에 드러나고 있는 슬픔의 정서나 몰락의 이미지에서는 쓸쓸하면서도 무언지 모를 따듯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감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저 너머」이다.

 

‘저 너머’ 라는 말이 가슴 속에 있다. 눈길이 간신히 닿았다가 스러지는 곳에서 태어나는 그 말은 목젖에 젖다가 다시 스러지는 그 말은 어디에든 착하다. 주어가 되지 못한 야윈 어깨에 슬며시 얹혀지는 온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손의 용도와 같이 드러나지 않아 오직 넉넉한 거리에 날 세워두는 '저 너머' 그 말이 아직 환하다.

 

-「저 너머」전문

 

이 시의 시적 자아가 “‘저 너머’라는 말”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이유는 바로 “눈길이 간신히 닿았다가 스러지는 곳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며 “목젖에 젖다가 다시 스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 너머’라는 말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와 등가를 이루며 ‘스러짐’과 같은 몰락의 이미지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저 너머’라는 말이 “어디에든 착하다”는 대목이다. 소외와 몰락의 이미지를 선(善)에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드러나고 있는 슬픔의 정서나 몰락의 이미지에서 따듯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이 굳이 이들 존재와 이항대립의 관계에 있는 중심적 존재를 상정하고 비판하는 구도를 만들지 않는 까닭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했던 윤동주와 같이, 나호열의 시는 불모의 세계에 대한 날선 비판보다는 그 세계에서 소외된 존재, 몰락 · 소멸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 나아가 사랑의 정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시인의 행위는 “주어가 되지 못한 야윈 어깨에 슬며시 얹혀지는 온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에게 ‘저 너머’로 표상되는 대상은 미미한 존재일지언정 중심이 아니기에, “드러나지 않”는 주변적 존재이기에 오히려 “넉넉한 거리”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넉넉한 거리”에는 또 다른 많은 주변적 존재들이 공감이나 이해, 연대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저 너머’라는 말이 “아직 환하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의 대상을 뚜렷하게 상정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로 사랑에 대한 시인의 의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세계와의 불화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안은 날선 비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 시인의 판단이라는 의미이다. 나호열 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것이 전면화되었든 아니든 그의 시정신에 포진해 있는 정서의 바탕은 단언컨대 사랑이다.

이는 시집『물든다는 말』의 머리말격인「自序」에도 잘 드러나 있다.

 

천만 번 겨루어

천 번 만 번 진다해도

부끄럽지 않은 일

사랑을 주는 일

 

천번 만번 내 주어도

천번 만번 부족하지 않은

가난해지지 않는 일

사랑을 주는 일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끝끝내 남아 있을

우리들의 양식

이제야 그 씨앗을 얻어

동토에 심으려 한다

 

눈물 한 방울

백년 뒤에라도 좋다

피어주기만 한다면

 

-「自序」전문

 

시인은 “천만 번/겨루어/천 번 만 번 진다해도/부끄럽지 않은 일”이 “사랑을 주는 일”이고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끝끝내 남아 있을/우리들의 양식”이 ‘사랑’이라 표현하고 있다. ‘저 너머’라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감수성을 이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눈물 한 방울/백년 뒤에라도 좋다/피어주기만 한다면”이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시인이 ‘저 너머’라는 말을 ‘소외’와 ‘몰락’의 이미지로 의미화하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아직 환하다”고 단언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내면에 ‘피어주기만 한다면 백년 뒤에라도 좋다’는 ‘사랑’에 대한 절실함과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나호열 시인의 몰락의 상상력은 그의 시에서 불모의 세계에 대한 응전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주변화되고 몰락한 존재의 군상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몰락’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매개,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으로 의미화되는 경우가 전자에 해당한다. 이를 창조를 위한 파괴, 긍정을 위한 부정의 맥락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한 채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삶의 궤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고 유배시키는 것, 이것이 나호열 시의 ‘몰락’에 함의되어 있는 의미 중 하나다.

 

또 다른 한편으로 ‘몰락’은 세계에서 타자화된 존재를 표상한다. 이들 존재는 깨지고 부서지는 슬픈 존재들이지만 분노를 표출하거나 타자에 날을 세우지 않는다. 이러한 유의 시편들에서 타자화하는 주체에 대한 비판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은 양상의 까닭은 시인이 ‘몰락’의 정서에 대한 공감, 그러한 존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표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중심과 주변이라는 세계의 폭력적 구도에 대한 비판에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세계의 질서로부터 주변화하는 존재, 동일한 맥락에서 ‘몰락’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가 나호열 시의 서정적 자아이다. 그는

스스로 ‘몰락’하는 자이자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품고 있는 존재다. 밟지 않으면 밟히는 냉혹한 세계에서 ‘밟히는’ 존재이며, 모두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위치에서 거리화되어 있는 존재가 ‘몰락’이 표상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물든다는 말』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지극히 불온하면서도 애틋한 ‘몰락’의 감수성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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