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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메밀꽃 필 무렵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9. 9. 23:53
메밀꽃 필 무렵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죽도록 사랑한다던 여자는 편 지 한 통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에 수 천 통의 편지를 쓰고 또 썼다네
 잠들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보다
 아직 젊어 해독할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과
 아직 젊어 껴안을 수 없었던 바람과
 부동의 나무들과 함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는 적막 속으로
 수 천통의 편지는 쌓여만 갔는데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때문에
 눈에 눈물을 담고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몰라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영원토록 변치 말자던 여자는 편지 한 장으로 순간을 증명하고
 지나간 추억처럼 또렷하고 영롱한 별들을 향해 빈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네
 눈 부릅떠도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바에야
 아직 젊어 용서할 수없는 이별과
 아직 젊어 녹여낼 수 없는 그리움을
 그믐날 어둠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았는지도 몰라
 이제는 더듬거리며 막사를 나와 어둠을 향해가는데
 저기 수 만개의 등불이
 바람불면 꺼질듯 꺼지지 않고 환하게 돋아오르는 것을
 잊어버리자던 수 만개의 별들과 달이
 메밀꽃 여린 숨으로 매달려 있는 것을
 스물 넷 젊은 병사는 울면서 바라보았네
 또렷이 이별과 그리움을
 제 홀로 피워낸 너른 메밀꽃밭으로 가슴에 받아들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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